좋은 수필

바람의 집 / 심선경

희라킴 2016. 11. 20. 21:17



바람의 집


                                                                                                                                     심선경

 

 어렸을 때, 세상의 모든 바람은 대나무 숲에서 생겨나온 것이라 믿었다. 씨름선수의 팔뚝보다 굵은 왕대나무가 긴 창을 치켜든 장군의 기개처럼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 대숲에 숨어살던 바람이 저 혼자 심심해져서 슬그머니 세상 구경을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할머니를 따라 큰 절에 가면 뒤 안에는 울타리 같은 대숲이 있었다. 궂은 날이 아니더라도 대숲에는 늘 소소한 바람이 일었다. 너무 조용할 땐 강물이 가을바람에 뒤척이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바람이 잦아지면 댓잎들끼리 사그락대며 몸을 비비다가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살이 밀려왔다 조약돌 사이를 빠져나갈 때 들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대숲에 깃들어 살다 발걸음 소리에 놀라 숲 여기저기서 잽싸게 날아올라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봄비가 내린 후, 대밭엔 죽순이 여기저기 쑥쑥 올라와 있었다. 어린 생각에 대나무는 비를 맞을 때마다 죽순을 하나씩 낳는 줄 알았다. 며칠 뒤 그곳에 다시 가보면 땅속에 곤두박질쳐진 고구마 크기만큼 했던 죽순이 어느새 내 키만큼 자라 있었다. 무엇을 먹고 저렇게 빨리 자랐는지 궁금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대나무 숲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느낌과 뭔가 알 수 없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할머니의 백팔 배가 지겨워서 절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대숲에 다다르면 서걱대는 댓잎소리가 왠지 무섭게 들릴 때도 있었다. 절에 와서 한 곳에 조용히 있지 못하고 온 천지로 쏘다니는 나를 혼내려고 산신령이 노해서 바람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대숲이 휘파람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리끝이 쭈뼛 서며 무언가가 내 발목을 덥석 붙들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절간 앞으로 뛰쳐나오면 마당을 쓸던 작은 스님이 죽비를 던져놓고 다가와 등을 토닥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었다.


 작은 스님은 손재주가 뛰어나 대나무만으로 여러 가지 재미난 것을 많이 만들었다. 어떤 때는 가느다란 대를 한두 마디 잘라서 구멍을 여러 개 내더니 그걸 퉁소라며 불어보라고 했다. 처음엔 대나무 숲에서처럼 ‘휘-익’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스님은 싱긋 웃으며 눈을 감더니 대나무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대나무 마디 어디에 그렇게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숨어 있었을까. 대숲의 바람을 타고 날아간 피리소리는 산사의 풍경을 쳤고, 앞 산 그림자까지 마당으로 불러들여다. 풀릴 듯 휘어 감는 애잔한 곡조에 나무들과 풀포기조차도 귀가 열려 하늘하늘 춤을 추는 듯했다. 일순, 스님의 짙은 속눈썹에 어떤 영롱한 빛이 반짝였으나 지나가던 햇빛이 잠시 그곳에 머문 것이었는지 눈물방울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알 길이 없다.


 그렇게 무서웠던 대밭의 바람소리도 언제부터가 친근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내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작은 스님이 만들어 준 퉁소를 불며 달래기도 하고 어머니가 몹시도 보고파지면 남몰래 대밭에다 그리움을 쏟아놓곤 했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었다. 지금도 푸른 댓잎이 누군가를 부르는 듯 ‘우우우’ 소리를 내는 대숲에는 그때 내가 함부로 쏟아놓고 온 속말들이 새록새록 죽순처럼 솟아날 것만 같다.


 가을이 되면 할머니는 대나무 간짓대로 나무 꼭대기에 달린 감을 땄다. 아래서 밑동을 아무리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던 감들이 신기하게도 간짓대가 닿아 간질이기만 하면 마당에 펴놓은 멍석 위에 고분고분 내려앉곤 했다. 살다보면 떼쓰는 아이에게 무리한 힘을 가하는 것보다 어르고 달래는 것이 한결 더 나을 때가 많다.


 할머니는 그 절에 자주 가셨다. 어김없이 백팔 배를 끝내고 법당에서 내려오시면 노스님께서 손수 차를 끓여 대접하셨는데 내게도 한 잔 돌아올 때가 있었다. 대나무 사이에서 자란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달인 차라고 했지만 한 모금 마셔 보고는 슬그머니 찻잔을 밀어놓았다. 그저 씁쓰레할 뿐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그것을 죽로차라고 했다.


 아마도 나는 대나무 피리를 불며 여린 마음을 다잡고, 노스님은 죽로차 한 잔으로 수행의 어려움을 다스렸던 것 같다. 도시에 나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노상 선생님의 대나무 회초리에 종아리를 내주며 나태한 마음을 떨쳐내었으니 뭔가를 다스리는 일에는 대나무만한 것도 없지 않나 싶다.


 내게도 스무 해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을 향해 턱없는 오기를 부려보기도 했고 아무런 준비 없이 맞아들인 ‘어른’ 이라는 이름 앞에서 더럭 겁을 집어먹었던 일도 많았다. 단 한 점의 불빛도 내 것이 되어 줄 것 같지 않았던 깜깜한 절망의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 작은 스님이 건네준 대나무 피리를 꺼내 불어보았다. 퉁소가 소리를 낼 때마다 내 마음 속엔 마디 굵은 대나무가 한 그루씩 살아나고 있었다. 아직도 희망은 존재한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는 속이 비어서 제 속에 바람을 지니고 사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었다. 그래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대숲에는 바람이 차는 것이라고. 별 내리는 밤, 제 몸 속의 적막을 피리삼아 불어내는 한숨소리.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대숲에서는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 바람의 집은 바로 내 마음속이었기에. 댓잎보다 먼저 내 안이 술렁거렸고 잠잠한 바람 또한 내 속에서 일었으며 그 바람을 잦게 하는 것도 내 마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날이 흐리면 대숲이 먼저 비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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