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유리새 / 최장순

희라킴 2016. 11. 19. 21:12

 


                                                      

 

유리새

 

                                                                                       

                                                                                                                                         

 

 세상은 문으로 통한다. 산다는 것은 열고 닫음의 연속이니 문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모든 건축물에도 반드시 문이 있게 마련이니 그곳을 통과해야만 한다. 겨우 몸 하나 들일 토굴에도 거적문이 있고 개장에도 들고 나는 문이 있다. 한옥의 나무문도 있고 아파트의 철제문도 있다.

 

 어떤 문은 기능에만 치중할 뿐 모양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창고 문이나 아파트 문이 그렇다. 한옥이나 단독주택의 문은 다양한 재료와 문양으로 치장을 한다. 기능 위에 아름다움을 덧얹음으로써 우리의 미감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삶의 질이란 기능만의 문제는 아니니까.

 

 하지만 문은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문밖의 사람에게 약간은 거부의 몸짓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아파트 문은 그 정도가 심한 편이다. 우선 단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거의 적대시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경비원에게 동호수를 대야하고 차단기를 벗어나야만 한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각 동의 출입문 버튼을 눌러 방문 사실을 알려야 승강기를 탈 수 있다. 그것만으로 용납되는 것도 아니다. 현관문 앞에 도착하면 다시 인터폰을 눌러 확인한 후에야 겨우 받아들여진다.

 

 이런 복잡한 통과의례를 치르고 나면 기운도 빠지지만 기분이 상하고 만다. 그러니 친구에게 하고 싶었던 정담도 그만 귀찮고 번거로워져서 어서 용무를 마치고 나가고 싶어진다. 나를 찾아오는 친구라고 다르겠는가. 요새 들어 친구들 사이에 왕래가 뜸해진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이란 쉽게 열려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이처럼 삼엄해서야.

 

 어렸을 때 살던 집 문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열려 있었고, 설혹 닫혀 있더라도 반만 닫혀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싸리나 가는 나뭇가지나 송판으로 만든 대문은 그저 집과 바깥의 경계의 표지일 뿐이었다. 안방의 격자문도 행랑채의 용자문도 정감이 넘쳤다. 겨우 종이 한 장으로 그 매서운 추위도 막아내고, 도심盜心도 막아 주고, 비바람도 막아 주던 소박하고 자상한 문들이었다.

 

 가을이면 아버지는 볕이 밝은 날을 택해 문창호지를 바르셨다. 먼저 풀을 쑨 다음 문을 모두 떼어내서 양지바른 곳에 쉬엇 자세로 세워 놓았다. 그리고는 입에 물을 가득 머금고는 문짝 하나하나에 물세례를 퍼붓는 것이었다. 물보라가 아버지 입에서 품어져 나와 허공으로 하얗게 분산될 때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아버지 입에서 무지개가 피어났던 것이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작지만 맑고 투명하던 그 인공의 무지개. 나는 속으로 아버지가 그 일을 자꾸 했으면 싶었다. 그러나 아버진 언제나 필요한 만큼만 하셨다. 그 신기한 광경을 자주 못 본다는 것이 내내 섭섭할 지경이었다.

 

 그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아버지는 담배 한대 맛나게 피우고는 마당 한 쪽에 피어 있는 국화 송이와 잎을 몇 개 따가지고 오셨다. 어떤 때는 그것이 단풍잎이 될 때도 있고 화살나무 잎이 될 때도 있었다. 그해의 가장 고운 단풍잎만이 창문에 장식되는 영광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잠시 쉬었다 물에 불은 창호지를 찢어내셨다. 지난날의 나쁜 기억이기나 한 것처럼. 그리고는 되게 쑨 풀에 물을 붓고 묽게 한 다음 솔이나 빗자루에 묻혀서 창살에 고루 바르고 종이를 붙이셨다. 한 참 지난 후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그 종이를 튕겨 보셨다. 장고소리처럼 탱탱하게 울릴 때 문고리 근처에 뜯어온 국화 송이나 단풍잎을 적당히 놓고는 세모로 자른 종이를 그 위에 바르셨다. 이 때 아버지가 빠뜨리지 않고 하는 일이 있었다. 그 밑이나 옆 어디쯤에 창호지의 일부를 엽서 크기로 오려내시고 거기에 유리조각을 대는 일이었다.

 

 어느 핸가 나는 깨진 거울 조각을 주어다 뒷면을 새 모양이 되게 긁어낸 다음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잠시 보시더니 내 뜻을 알아채셨던지 종이를 새 모양으로 오려 내신 다음 내가 가져온 유리 대신 전에 쓰던 유리에 그걸 붙이셨다. 전과는 달리 조그만 새 모양의 창문이 생겼다. 나는 그것을 나만이 아는 ‘유리새’ 라고 불렀다.

 

 유리새를 통해 나는 바깥 세계와 마주할 수 있었다. 비오는 날도 눈 오는 날도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눈이 세상을 모두 가두어도 유리새는 부지런히 세상 소식을 물어왔다. 겨울 산등성이로 사뿐 고개를 내민 햇살이 유리새의 잠을 깨운 아침. 나는 그 투명한 눈으로 세상 풍경을 읽었다. 낱낱이 뒤져도 미처 읽지 못한 두툼한 잔등 너머 꿈의 세계로 언젠가는 날아가 닿으리라. 나는 가슴지핀 불씨에 날마다 풀무질을 했다.

 

 이 문 속의 또 하나의 문을 나는 좋아했다. 문을 열고 내다 본 세상보다 유리새를 통해 내다 본 세계가 훨씬 신비했기 때문이었다. 햇빛은 더 밝았고 바지랑대를 물고 있는 빨랫줄에 맺힌 이슬은 더없이 영롱했다. 성에라도 끼면 그건 나의 조그만 캔버스가 되었다. 내 상상 속에 피어오른 꽃도 그리고 새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 얼굴도 그렸다. 상상속에서보단 못했지만 나는 그런 행위를 통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확인했다. 그것을 통해 나는 조금씩 성장의 길을 걸었는지 모른다.

 

 요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창문은 시원해서 좋다. 커다란 풍경이 한 눈에 다 들어오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옛날 우리 집 문에 붙어있던 엽서만한 크기의 그 유리 조각 창문에서 느끼던 오붓함이나 아름다움은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풍요를 위해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는데 우리가 얻은 풍요가 오히려 우리로부터 자그만 행복을 앗아간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언젠가 조그만 단독 주택을 가지게 된다면 문 하나는 한지를 바르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 어린 날의 그 새 모양 유리조각을 붙이고 싶다. 수십 년을 훌쩍 건너온 유리새가 세상소식을 부지런히 물어다 주리라. 작은 유리문으로 세상을 내다본다면 소박하지만 오붓한 행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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