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아내의 꽃밭 /손광성

희라킴 2016. 9. 14. 15:05


아내의 꽃밭


                                                                                                                          손광성


 

  꽃밭이라야 두어 평 남짓한 땅.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봄이면 아내는 한가할 틈이 없다. 채송화와 금잔화 봉선화와 백일홍 그리고 마거리트 같이 키 큰 꽃들은 그 위에 심는다. 그리고 맨 뒷줄은 족두리꽃이며 맨드라미며 코스모스 같은 키다리들의 차지가 된다.


  칸나나 달리아는 아내의 꽃밭에 초대받지 못한다. 요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미라서 그렇다. 나팔꽃은 다른 꽃들을 감고 올라기기 때문에 밉다. 하지만 아침마다 해말갛게 피는 모습이 예뻐서 아내의 사랑을 받는다. 보라색 나팔꽃은 굴뚝을 따라 올리고, 분홍색 나팔꽃은 흰 창틀을 따라 올라가게 한다. 창문을 열면 신선한 아침 공기와 함께 햇빛에 반짝이는 앳된 웃음. '뚜우우'하고 나팔 소리라도 경쾌하게 울릴 것만 같다. 이 해맑은 꽃을 보면서 아내는 매일 아침을 늘 그런 신선한 기분으로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아내의 꽃밭은 언제나 초만원이다. 빽빽하게 자란 모종들을 솎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더러 솎아 내야 하지 않냐고 하면 그래야 하겠다고 말하지만 잠시뿐, 뽑아 낸 모종을 안고 서성거리다가 도로 제자리에 심고 만다. 버리자니 아깝고 다른 데 심자니 그럴 만한 공터가 없다. 그냥 놔두면 작지만 제 몫의 꽃을 피울 텐데 왜 매정하게 뽑아 버려야 하느냐는 것이 아내의 생각이다.


  꽃밭이 좀 작고 비좁다고 해서 계절이 무심한 법은 없다. 철따라 이 꽃밭에도 꽃이 피고 지기를 그치지 않는다. 제일 먼저 피는 것은 제비꽃이다. 심지 않아도 해마다 봄만 되면 어김이 없다. 아직 다른 꽃들이 겨울잠에서 옴쭉도 않을 때 그 가냘픈 잎 사이로 보라색 애잔한 꽃을 피운다. 그 뒤를 이어 차례로 피는 여러 가지 꽃들.  둘째딸애 같은 황금빛 금잔화, 우리 막내딸 같은 데이지와 채송화, 혀를 낼름 빼물고 웃는, 짓궂은 아들놈 같은 봉선화, 녀석은 제 누나를 보고 언니라고 부르는 바람에 늘 놀림감이 되곤하는데......


  그리고 큰 딸애 같은 마거리트의 청순한 모습. 여름내 밑동에서부터 쉬는 일이 없어 층층이 피는 족두리꽃과 늘 바람에 몸을 흔들 때면 애잔한 노래 소리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코스모스. 아내의 꽃밭은 그래서 언제나 웃음과 노래와 삶의 향기가 충만한 공간이 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순간도 잠시뿐, 어느 가을 아침 갑자기 내린 서리는 이 행복한 꽃밭을 금세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소금에 절인 배추 잎같이 주저않고 마는 일년초의 초라한 모습. 더구나 텅 빈 꽃밭에 서 있는 코스모스와 족두리꽃의 쓸쓸한 잔해. 꽃이 없는 아내의 꽃밭에 남는 것은 빈 해변 같은 공허함뿐이다.


  겨울 동안 아니는 가끔 문갑 서랍 속에서 싸 두었던 꽃씨를 봉지 봉지 꺼내서는 방바닥에 차례대로 늘어놓는다. 마치 그것이 진차 꽃밭이기나 한 것처럼. 그리고 새로 얻어 올 꽃모종에 대한 이야기와 이웃에 나누어 준 꽃들에 대한 이야기로 길고 깉 겨울밤을 보내기도 한다. 언제나 좀 더 넓은 꽃밭을 가졌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끝을 맺고 말지만. 겨울은 이제 막 시작인데 아내는 벌써 봄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이었다. 새로 집을 지으려고 집을 헐고 마당까지 다 파헤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봄이 되었지만 아내에게는 씨를 뿌릴 꽃밭이 없었다. 꽃씨를 안고 며칠을 서성거리던 아내는, 어느 바람이 세게 부는 날, 그 꽃씨를 모두 들고 나와서 허공에 날려 버리는 것이었다.


  어떤 것은 이웃집 담을 넘어 멀리 날아가기도 했지만 거의 가까운 아스팔트 길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꽃씨들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거나 아니면 빗물에 씻겨 하수구 속으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예쁜 꽃으로 한 번 피어 보지도 못하고 만 가련한 목숨들. 바람에 날아가는 꽃씨를 바라보고 서 있는 아내의 뒷모습이 잠시 흔들리는 것 같았다.


  가끔 아내가 외출하고 없는 날, 혼자 마당을 서성거릴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발길은 절로 아내의 꽃밭에 가서 멈춘다. 거기에는 티 없이 밝은 우리 아이들 웃음 같은 꽃들이 언제나 환히 피어있다.


  바람도 그곳을 지날 때면 숨을 죽이고 구름도 멀리서 기웃이 건너다볼 뿐, 그곳은 언제나 햇빛이 밝았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으면 시름도 저만치 물러나 앉는 듯, 마음의 공허함마저 밝은 빛으로 가득히 채워진다.


  아내가 없는 날 나는 이렇게 해서 그녀가 비워 놓고 간 빈자리를 그녀의 꽃밭으로 채우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없는 더 많은 날들을 아내는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니다. 먼 훗날 내가 아주 가 버린 뒤에 남을 아내의 공허를 나는 무엇으로 채워 줄 수 있을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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