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의 철학
최장순
눈들이 일제히 교자상으로 몰려들었다. 밥과 국을 중심으로 뚝배기들이 자리하고, 불고기, 보쌈, 생선구이, 낙지볶음, 간장게장 등 얼추 스무 가지가 넘는 반찬들. 수랏상이 부럽지 않다. 이 많은 음식들이 어쩌면 이토록 잘 어우러질 수 있을까. 음식 고유의 빛깔과 식감을 살려주는 그릇의 절묘한 조화. 문득,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과 그릇의 관계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투박한 돌솥이 밥상에 오른 것은 파격이다. 신데렐라에서 일약 왕비가 된 신분, 창의성의 절정이다. 밥을 덜고 나면 돌솥은 누룽지 그릇이 되니, 멀티의 신분이 아닌가. 밥솥이자 밥그릇이었던 야전용 반합을 연상시킨다. 물을 부으면 은근한 숭늉 맛이 일품이다. 돌솥은 두툼한 외모에 가려져 처음엔 눈에 띄지 않지만 보면 볼수록 감춰둔 끼가 많은 사람 같다. 캐면 캘수록 구수한 매력을 우려내는 뒤끝도 개운한 사람.
밥그릇은 사람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다. 밥상의 독보적 존재, 먹는 일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반찬그릇과는 협업의 관계다. 군대에서 보병을 위해 지원병과가 존재하는 것과 같다. 밥그릇은 융통성이 있다. 인심을 쓸 줄도 알고, 적당히 욕심을 덜어내기도 한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은 이 밥그릇에서 나온 것, 고봉의 마음을 얹어준 이들로 해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덜어낸 밥은 뚜껑이 필요 없지만, 뚜껑 덮은 밥주발은 정성이다. 우리는 맨 먼저 밥뚜껑에 두 손을 얹는다. 밥에 대한 경건함 내지는 먹는 일에 대한 경배다. 어릴 적 첫돌을 맞으면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수저 한 벌을 장만해주었다. 먹는 일이 곧 사는 일이어서 평생 식복을 누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밥그릇은 어떤 모임에서든 빠져서는 안 되는 가장 핵심적인 사람이다.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는 말처럼 인색한 말이 있을까. 사래가 걸리게 하는 말, 명치에 불쾌함이 걸리는 말이다. 국그릇은 그래서 여유로운 사람 같다. 넉넉한 사람, 인심 좋은 사람, 근심을 쑥 내려가게 해주는 사람이다. 운두가 낮은 널찍한 국그릇은 조심스럽다. 국물은 7부정도가 적당하다. 밥그릇과는 궁합이 딱 맞으니, 어떤 조직에서든 조화를 이루는 구성원이다. 밥그릇의 재질과 같아야 보기에도 좋다. 같은 성향의 사람과 만나면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하지만 제 짝이 아니어도 적당히 어울릴 줄 안다. 부부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머슴 같은 그릇이 뚝배기다. 궂은일도 마다 않는 믿음직한 사람, 걸진 농담을 해도, ‘썩을 놈’이라고 욕을 해도 그저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다. 어디 미워서 그러랴. 그릇의 크기와 용도를 알기에 믿거니 내뱉는 말들. 토라지지 않는 미더움이 좋아서 그럴 것이다. 막걸리 같이 텁텁한 사람이 아니던가. 쉽게 뜨거워졌다가 빨리 식어버리는 양은냄비가 아니라 서서히 달아오르는, 오랫동안 그만의 온기를 유지하는 뚝배기 같은 사람이 필요한 요즘이다. 내 허물마저도 덮어줄 것 같은 사람이다.
하얀 사기접시는 이성의 차가움으로 보이지만 어떤 색깔의 음식이라도 제대로 표현해 준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위한 로맨틱한 식탁을 차릴 요량이라면 빠질 수 없는 그릇이다. 심플하면서 깨끗한 완벽성, 그러나 깔끔해서 다루기 쉽지 않듯 조심스러운 그릇이다. 섣불리 다루다가는 자칫 배신의 칼날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플라스틱 접시로 바꾼다면 식탁의 품격은 떨어지기 십상이다.
종지는 밥상의 마스코트다.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을 담기에 적당한 그것은 작지만 옹골진 사람이다. 한식에서 장이 빠진 식탁은 상상할 수 없다. 아무리 보기 좋은 음식도 간이 맞지 않으면 제 맛을 낼 수 없듯, 어느 자리든 꼭 필요한 그릇이 아닌가. 식탁과 균형을 잘 맞추는 종지는 쉽사리 내용물을 엎지르거나 깨지지 않는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 작다고 얕잡아 보지 말 일이다.
그릇은 무엇인가 담겨질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 피동被動의 신분이다. 허기진 시절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먼저 관심을 두었다면, 이제는 ‘어디에 담을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용도에 따라 주발, 대접, 접시, 뚝배기, 종지 등으로, 재질에 따라 질그릇, 사기그릇, 유리그릇, 스테인레스그릇이나 플라스틱 그릇, 놋그릇, 심지어 일회용그릇까지 다양하다. 주인의 기호에 따라 밥상의 중앙이나 변방에 질서 있게 배치된다. 재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물에 따라 위치가 달라지는 것들. 인간세상도 다 제자리가 있어서 묵묵히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는가.
인류의 역사는 그릇의 역사와 함께 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릇과 인간은 닮은 점이 있다. 이를테면, 세상에 나오려면 혹독한 시련이 필요하고 운명적인 삶처럼 대체로 쓰임새가 정해지며, 그 생명이 유한해서 사후에 이름을 남기거나 골동품으로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이고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
칸트의 말은, 그릇에서도 타당성이 읽혀지는 것 같다. 형식을 위해 내용이 희생되거나 내용을 위해 형식이 희생되어서도 안 되듯. 다양한 만큼 제 몫이 정해져 있다. 대접에 간장을 담거나 쟁반을 양념접시로 사용하면 어색하지 않은가.
밥상은 각기 다른 것들이 모여 어우러지는 삶의 축소판이다. 크거나 작거나, 네모지거나 둥글거나, 단순하거나 세련되거나, 얇거나 투박한 그릇의 형태와 재질에 따라 촉감과 소리와 느낌이 다르다. 사람도 그릇처럼 크기도 성향도 다르다. 다 제만큼의 크기에 알맞은 자신을 담는다. 다만 때와 장소에 따라 도자기나 사기그릇이 되기도 하고, 질그릇이 되기도 하며, 플라스틱이나 일회용 그릇이 되지 않는가. 의미 없이 태어나는 존재가 없듯, 각기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소통하고 어우러지는 그릇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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