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변산 바람꽃 / 윤승원

희라킴 2016. 9. 17. 19:32



변산 바람꽃 


                                                                                                                                     윤승원


 눈 덮인 골짜기를 땅만 보고 걸었다. 아직 이른 봄이라 살갗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귓볼이 얼얼하다. 경주에서 감포 가는 굽이 길에 위치한 시부걸 마을 뒷산을 올라간다. 변산바람꽃을 찾아가는 길이다. 경주 근교에도 꽃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몇 해를 찾아갔지만 매번 허탕을 치고 돌아서야 했다. 오늘은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꽃을 알고도 수 해째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다. 기다림이라는 꽃말을 가진 변산바람꽃은 전라북도 변산반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하여 그렇게 부른다. 겨우내 언 땅을 뚫고 피어나는 다섯 장의 꽃잎은 제 안에 슬픔 같은 여러 개의 보랏빛 수술을 가지고 있었다. 봄바람이 살짝 불어야 피는 꽃은 애틋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물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비와 대처로 떠난 어미를 기다리다 아이는 꽃이 되었다고 한다. 혼자만의 슬픔을 제 안에 간직해서일까? 다른 바람꽃들과는 색깔이며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꿩의 바람꽃, 만주바람꽃, 홀아비바람꽃은 노란색 수술인데 비해 변산바람꽃은 보라색 수술을 가졌다. 보라색은 우아함과 쓸쓸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단발머리 소녀는 국어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딸이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진학조차 허용치 않을 만큼 ​고지식했다. 겨우 아버지를 설득했으나 산골마을에서 장거리 버스통학은 멀미에 시달려 무척 힘이 들었다. 첫차를 타기 위해 아침밥은 고사하고 날마다 뛰어야만 했다. 그러기를 1년, 체력은 차츰 바닥을 보였다. 나무젓가락처럼 여윈 몸은 더 말라깽이가 되었다. 급기야 영양결핍으로 그 나이에 왕성해야할 신진대사는 엉망이 되었다. 결국 대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발이 푹푹 빠져 제대로 걷기가 힘들 정도다. 능선을 덮은 흰색의 파노라마는 눈이 시리도록 아프다. 그러나 잠시도 시선을 놓을 수 없었다. 혹시나 내 오랜 기다림의 속살을 비집고 변산바람꽃이 얼굴을 내밀지 않을까 한 걸음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붉은 나뭇가지만 봐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여 눈에 묻혀 못 찾는 건 아닌가 싶어 손으로 눈을 파헤쳐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짧은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하산을 해야 했다.

 누구든 가슴 속에 희망 하나쯤 품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내가 이루지 못한 국어교사의 꿈을 접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몇 번이나 대학진학을 꿈꾸었지만 현실은 그런 나를 자꾸 넘어지게 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었고 힘든 결혼생활로 내 꿈은 장롱 깊숙이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먼지 묻은 꿈을 꺼내 들여다보며 위안을 삼았다.

 척박한 환경과 세찬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꽃대를 올리고 그럴수록 더 깊이 뿌리를 내려 당당히 꽃을 피워내는 변산바람꽃, 내가 살아온 날들은 어쩌면 그 꽃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사업에 실패하여 정처 없이 떠도는 남편을 기다렸고, 단칸방 가난한 살림을 면할 날을 기다렸고, 첫 아이를 낳고 7년 동안이나 둘째를 기다렸다. 해마다 꽃을 찾아 나설 때는 어쩌면 그런 고단한 내 삶을 위로 받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변산바람꽃을 만난다면 그 모든 고난도 다 없어지리라.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마침내 몽우리를 올리는 것처럼 나도 꿈을 피울 수 있으리라.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에 나오는 양치기소년 산티아고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리처드 바크의  『 갈매기의 꿈 』에서 갈매기 조나단은 완전한 비행의 꿈을 위해 일상의 사소함을 버린다. 내가 찾는 변산바람꽃은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일 것이다. 그건 산티아고의 보물일 수도 있고 조나단의 완전한 비행일 수도 있다. 생떽쥐뻬리의 『 어린왕자 』에서 여우는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변산바람꽃은 너무 중요해서 아직 나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리라.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할 때 친구들과 토론을 했다. 벽을 칠해서 하루하루을 연명하는 가난한 페인트공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세상의 벽이란 벽을 다 도색해서 돈을 많이 벌었을 때가 행복하겠는가? 아니면 가난하지만 지금처럼 내일, 그리고 모레, 새 날이 밝으면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도 자신이 칠할 벽이 남아 있을 때가 행복할 것인가? 다른 친구들은 다 전자의 삶이 행복하다고 했지만 나는 어쩌면 후자의 삶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놀렸다.

 그림지도까지 들고 찾아온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변산바람꽃, 그러나 실망하기보다 고마움이 더 컸다. 꿈은 이루고 나면 더 이상 꿈이 아닐 것이다. 변산바람꽃을 만나고 나면 나는 또 어떤 꽃을 희망할 수 있을 것인가? 국어교사라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진정한 국어교사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희망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그것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그런 믿음을 가진 덕분이었다. 그러니 변산바람꽃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눈 덮인 골짜기를 샅샅이 헤매느라 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마음은 훨씬 가볍고 행복했다. 귀한 변산바람꽃이 내 눈에 쉽게 발견 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을 남겨두었습니다.' 생의 벽지에 가지 않는 길 하나쯤 남겨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냐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도 생각났다.

 꽃을 보려면 당장 변산반도로 달려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너무 쉽게 행복을 찾는 방법일 것이다. 내년에도 또 그 다음에도 나는 변산바람꽃을 찾아 삶의 벽지를 헤맬 것이다.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하산 길 맞은 편 산봉우리 위로 보랏빛 노을이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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