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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시인 조명] 나비의 욕망과 윤리적 애벌레 / 윤의섭

희라킴 2017. 2. 20. 12:01


[문정영 시인 조명]


나비의 욕망과 윤리적 애벌레


윤의섭


결핍이 없으면 시도 없다는 게 평소 생각인데, 가만히 보면 결핍이란 욕망을 불러오는 커다란 구멍인 셈이다. 이 욕망의 양태는 시인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문정영 시인의 시에서 읽어낸 욕망의 이미지는 신발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신발은 결핍과 욕망을 한 몸에 지닌 자웅동체여서 그것이 함께 움직이는 존재다. 다시 말해 신발은 주체의 발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텅 빈 구멍을 결핍으로 갖고 있으며, 동시에 사방 어디로든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때문에 문정영 시인의 시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나타나는 신발과도 같은 욕망의 이미지와 더불어 결핍의 상태 역시도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은 늘 결핍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실현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끊임없이 건너뛰어야 하는 상징계를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문정영 시인은 윤리의 실천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문정영 시인의 사유를 따라가며 이 부분에 대해 숙고해 보고자 한다.


날아가는 몸짓 멈출 때까지

새는 잠시 나비를 입에 물고 있다.

숨이 멈추기까지는 짧은 시간,

새는 나비의 바람을 눈으로 묻는다.

새가 나이고 나비가 당신이라면

나비는 새의 입에서 펄럭이는 눈물.

점점 조여 오는,

스스로 날아가거나 천천히 멈출 수 없는 체위.

그 후로 생강나무 꽃은 샛노란 생각뿐이다.

- 새가 나비를 물고부분


시에서 새와 나비는 서로 극단의 위치에 놓여 있는 대척 관계이다. 이때 는 시적 주체와 등가물로서 욕망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새는 나비를 물고 있다’. 무는 행위는 곧 나비를 먹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인데, 시는 물고 있는 순간의 장면에 집중되어 있다. 욕망은 그것이 실현되면 곧 다른 욕망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그러기 전까지의 욕망 충족 행위에는 그 순간을 만끽하려는 포식자의 머뭇거림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 순간, 희생물로서의 나비의 결핍을 채워주는 또 다른 주체로 작용한다. 시인는 새의 입장과 나비의 입장을 동시에 대변한다. 나비의 입장에서 라는 욕망은 자신을 점점 조여 오는’, ‘스스로 날아가거나 천천히 멈출 수 없는 체위를 강요하는 절대적 권능의 소유자로 보인다. 여기서 나비의 관계는 다시 물리적으로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결핍과 욕망으로 인한 이접상태를 형성한다. 새는 나비를 물고 있음으로 해서 욕망을 채우고, 나비는 생강나무에게 샛노란 생각을 남김으로써, 즉 자기 존재의 잔영을 남겨 놓음으로써 관념적 형식의 욕망을 이룬다. ‘나비에 대한 시적 주체의 강제는 물고 조이며 못 움직이게 하는 체위로 이루어지는데, 다소 성적인 은유가 섞여 있는 이 상황은 다음 시에서 보이는 신발이 갖고 있는 속성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나는 나비가 아니에요.

나를 신고 나비가 되는 꿈은 꾸지 마세요.

내 몸에 날개를 달아놓고, 날고 싶은 사람들 발을 들이미네요.

어쩌다 한 쪽 날개가 펴지는 날이 있어도

다른 쪽은 후미진 골목에 걸려 있기도 해요.

너무 희망적이지 않다고요.

희망의 크기만큼 날개를 펼 수는 없잖아요.

멕시코에서 미국까지 기차로 1200키로를 밀입국하는 아이들은 신의 날개가 있어야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작은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곳까지 나를 신어요.

내 발등에 봄빛을 그려 넣으면 봄날이 되고, 바람을 접어 넣으면 멀리까지 갈 수 있지요.

세상은 날아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골목은 한 발 한 발 걸어서 빠져나가는 것이지요.

그래도 한 번 날아보고 싶다고요.

- 나비 신발전문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이 시에도 나비가 등장한다. 얼핏 보기에 앞의 시에서는 나비는 욕망을 가진 대상의 결핍을 메워주는 존재로 등장하였고 이 시에서는 욕망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때 나비는 욕망의 가능성인 동시에 결핍을 함께 내재하고 있는 존재, 신발이다. “내 몸에 날개를 달아놓고, 날고 싶은 사람들 발을 들이미네요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신발이 욕망을 수용하고 욕망을 펼치는, 다원적 역할을 수행하는 환유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나비’(편의상 를 부기함)의 의미를 앞의 시에 등장하는 나비’(편의상 을 부기함)와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등가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나비은 새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다. 나비는 곧 신발이다. 이때 나비=신발은 또한 나비가 되길 원하는(“나를 신고 나비가 되는 꿈은 꾸지 마세요.”에 역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군가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다. 그런데 나비 신발을 신는다면 나비가 될 수도 있다는 결과를 염두에 둔다면, 누군가나비=신발이 갖고 있는 결핍을 메우는 잠재적 욕망으로서의 나비의 역할을 한다. 결국 나비은 나비이다’. 나비조이는 새’, ‘날개 달린 신발등의 등가적 상징물로 변신한 끝에 그래도 한 번 날아보고 싶은나비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욕망과 결핍, 피학과 가학, 더 나아가 이 욕망과 저 욕망이 동일성을 이루고 있는 시적 주체의 심리적 기저에는, 결코 물러섬 없는 지속적인 욕망 추구에 주저함이나 후퇴는 없어야 한다는 일관되고 강렬한 의지가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지하듯 과유불급이라고, 욕망이 지나치면 바라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다. 끝없는 포식이나 비상은 자칫 목적 없는 목적으로 향하는 맹목적인 이기주의로 치달을 수 있다. 가끔은 뒤돌아보고 선회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정영 시인의 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도 바로 이 선회 지점이다. 문정영 시인의 시선이 한 개인적 주체의 가없는 욕망 추구에서 탈선하여 이타적이고 인류애적인 윤리적 욕망의 차원으로 확대되는 지점에는 문정영 시인 스스로의 자아 내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얻은 성찰이 놓여 있다. 그것은 다음 시에서처럼 통증을 겪은 다음에 이루어진 性情으로 보인다.


어떤 통증은 다른 통증으로 대체될 수 있을까.

바람의 빗자루로 몸을 쓰는 나는, 너무 쓸어 봄까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다.

물푸레나무 잎처럼 바람에 견뎌볼 요량도 없다. 나긋해진 것의 반은 여성성 때문인가.

어쩌다 한 번 홀로 서 있는 고추목처럼 발끈한다.

남자라는 몸에 숨고 싶어서다.

들을 것 다 들어버린 귀는 소리에 예민하지 않다.

그런 날이 계속되면 공기만큼 가벼워진다. 제대로 한 번 붙어볼 심사는 얼음장 밑으로 흐른다.

변모된 어떤 것들의 결과는 상처라는 이름이다.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겨울 논흙이 뭉쳐져 꽁하듯 걸어 왔다.

검독수리를 쫒는 수리매처럼 다중 인격도 한 때 부리고 싶었다.

모질지 못한 눈썹만 남은 한 남자가 내 안에서 바람을 빗질하고 있다.

어떤 품성은 다른 품성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 어떤 品性전문


남자라는 정체성에 숨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적 주체는 바람의 빗자루로 몸을 쓴다’. 그것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지금 위 시의 시적 주체는 세상사에 찌들대로 찌든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자책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반은 여성성이 있는 남자로서 공기만큼 가벼워지고’, 세상에 맞설 엄두는 나지 않고 얼음장 밑으로숨어버릴 뿐이다. 결국 상처만 남은 자아. ‘다중 인격이라도 부리고 싶을 정도로 원래 갖고 있는 성격과 현실에 의한 또 다른 성격과의 대립과 은폐와 갈등 등등이 시적 주체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자신의 자아에서 스스로를 빗질하는 한 남자를 사유하고 있다. 한 남자다른 품성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남자이다. 즉 거센 파도처럼 세파에 흔들려도 굳건히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본질적인 자아라고 믿는 남자이다. ‘다른 사랑으로 바꿀 수 없는 사랑을 일관되게 품고 있는 이 남자는 너무 쓸어 봄까지 풀 한 포기 나지 않을정도로 몸을 닦는 修身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그 길은 곧 齊家治國平天下로 가는 길이기도 한데, 문정영 시인의 윤리적 성정은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문정영 시인의 관심이 전지국적 문젯거리로 확대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특히 문정영 시인의 관심은 박해받는 지구촌 아이들이다.


태어난 것이 어차피 가시라면 불편이 집이다.

누군가 버려놓은 뒤틀린 목숨은 불평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

하나는 어제 창가를 뛰어 내릴 각오를 했다.

반쯤 창틀에 걸려 있는 생각을 접었으나 편하지가 않다.

세상에는 2억 명 넘는 아이들이 휘어진 생각을 지구에 심고 산다.

저 그릇 밖으로 뛰쳐나갈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있다.

- 세 개의 선인장부분


남수단 보르 지역 아이들은

물의 눈을 보기 위해 걷고 또 걷지.

돌아오는 길에 백만 개의 슬픈 눈동자가 따라오지.

- 백만 개의 눈동자부분


위 두 편의 시를 보면 문정영 시인의 관심이 ‘2억 명이 넘는 아이들’, ‘남수단 보르 지역 아이들과 같이 전쟁 등으로 고통 받는, 자기 보호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의 고통을 인지하고 통감할 수 있는 시인의 동질감과 인류애가 표면화된 양상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문정영 시인의 윤리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시편에 등장했던 신발은 시 세 개의 선인장에서 좁은 그릇이 되어 있지만, 신발=그릇뛰쳐나갈 발의 욕망을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나비=신발이 갖는 의미작용을 역설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신발은 시 배만 개의 눈동자에서 걷는 행위로 바뀌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앞의 시에서 보았던 신발의 이미지, 즉 결핍과 욕망이 함께인 이 신발의 변전이 위의 두 편의 시에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면, 자신만을 위하던 개인적인 욕망이 수억의 아이들을 위하고 그들의 안녕을 바라는 이타적인 욕망으로 변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배추흰나비 애벌레는 배추를 떠나지 못한다.

잎에서 나서 잎에서 죽는다.

고치벌은 배추흰나비애벌레의 몸에 알을 낳아 기른다.

애벌레들은 애벌레의 몸속을 갉아먹으며 자란다.

고치벌 애벌레들이 몸을 뚫고 나올 때까지

배추흰나비의 애벌레는 날아가는 몽상을 한다.

내 숨을 먹고 자란 별빛들아,

너희들이 날아 또 다른 몸에 수태할 때까지

너희들은 내가 기른 목숨이다.

내 속이 까맣게 타고 뱃가죽이 딱딱해져가도

내가 날아야 할 한 평의 배추밭마저 너희들에게 나누어주마.

아프리카 수단 4만 명의 유괴된 아이들아.

내 몸속에 너희들의 계절이 푸르게 남아 있구나.

- 배추흰나비 애벌레전문


곰곰 생각해 보면 배추흰나비 애벌레역시 다른 애벌레들을 담고 있는, 그러면서 날아가는 몽상을 하는 나비이자 이자 신발이다. 그런데 이 배추흰나비 애벌레내가 날아야 할 한 평의 배추밭마저 너희들에게 나누어주려는이타심에 속이 까맣게 타고 뱃가죽이 딱딱해가도크게 신경 쓰지 않는 존재다. 여기에는 너희들은 내가 기른 목숨이라는, ‘낳은 정기른 정을 같이 보는 부모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 부모의 마음으로 보자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 대한 마음은 똑 같은 것이다. ‘아프리카 수단 4만 명의 유괴된 아이들을 호명하는 문정영 시인의 마음은 다른 애벌레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배추흰나비 애벌레의 성정처럼 그들이 누려야 할 푸른 계절을 펼쳐주고 싶은 따스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애벌레’(결국 애벌레신발과도 같은 고치 속에서 나비로 변신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와도 같은 犧牲供犧의 윤리성은 어쩌면 욕망의 또 다른 범주에 속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공분하고 연약한 아이들을 끌어안고자 하는 이 욕망의 윤리는, 한 개인의 발에만 맞는 신발을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갈 비상하는 신발로 바꾸어 나간, ‘품성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었기에 경직되어 보이지 않고 의외적인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는 문정영 시인의 시심을 깊이 새겨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참하고 슬프기 그지없는 4월이 지나가고 있다.



-'시와 산문' 2014.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