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여유당(與猶堂)의 가을 / 이혜연

희라킴 2016. 3. 20. 13:44

 

 

 

 

여유당(與猶堂)의 가을

 

                                                   이혜연

 

 

 다시 가을입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창을 열어보니, 뜰 안의 초목들이 이별을 준비하느라 부산합니다. 밤새 뒤척이어 핼쑥해진 모습으로 잎은 줄기와, 줄기는 뿌리와 그렇게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바람을 따라 길을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별의 순간만은 참으로 담담들 합니다.

 

 초조해지는 건 오히려 저입니다.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바람을 따라 길을 나서 봅니다. 마치 가는 세월을 붙잡아 보기라도 할 듯이…

 

 팔당대교를 건너자 양평으로 이어지는 새 길이 시원스럽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낯설음에 잠시 쭈뼛거리다가 이내 후미진 옛길을 찾아 들어섭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차들이 이어 달리던 길은 이제는 잊혀진 여인처럼 쓸쓸하기만 합니다. 강을 따라 구불거리는 길을 그러나 제 차는 정인(情人)을 찾아가는 김유신의 말처럼 익숙하게 달려갑니다.

 

 중앙선 철로가 지나는 굴다리를 밑을 빠져나오자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습니다. 더욱 한적해진 길은 휘돌아 오르는 고갯길입니다. 마현(馬峴)이라 불리던 고개지요. 그 재를 넘어 느슨하게 풀어진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산 75-1번지, 옛 이름으로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바로 열수(洌水)선생, 당신의 고택이 있는 곳입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몸을 섞는, 두물머리 변이지요. 그 때문이었을까요, 선생은 이곳을 초천(苕川), 혹은 열상(洌上)이라 즐겨 부르곤 하셨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선생을 다산(茶山)이 아닌, 열수선생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선생의 학문이 무르익었고, 수많은 저서들의 산실이 되기도 했던 아랫녘 초당의 이름은, 그러나 지아비요 아버지이기도 했던 한 남정네에게는 너무나 가혹했던, 인고의 세월을 상기시켜주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 보다는 선생의 향리이자 젊은 시절의 추억이 오롯이 남아있는 이곳을 연상하게 해주는 열수라는 별호가 한층 정감이 갑니다.

 

 기념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선생의 생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야트막한 담장 곁으로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충직한 머슴처럼 묵묵히 고택을 지키고 있군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 먼저 ‘여유당’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는 행랑채 툇마루에 앉아 봅니다. 선생께서 사랑채로 쓰시던 곳이라지요. 수굿이 비껴드는 햇살에 빛바랜 마룻장의 나뭇결무늬가 말갛게 드러납니다. 그 결의 흐름을 따라 모든 것들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요즘 들어 이곳으로 자주 발길이 향하는 것은 이런 낮고 느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의 필적이 담긴 현판을 올려다봅니다. 여유당(與猶堂)! 문득 어지러운 요즘 정치판이 생각나는군요. 18년이라는 긴 형극의 시간을 선생께 내릴 만큼 선생의 시대 역시 당쟁이 치열했지요. 그래서 벼슬살이를 끝내고 이곳 소내(苕川)로 돌아오던 해에 선생은 ‘겨울의 내(川)를 건너는 듯하고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라’는 뜻을 담은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상인방에 걸었던 것 아닙니까. 하지만 물밑 당쟁의 치열함 속에서도 선생과 같은 선비들이 있을 수 있었던 그 시대가 오히려 그리워지는 요즈음입니다. 선생은 공약(空約)이 아닌 신실한 애민의식,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닌 철저한 실험, 실용정신으로 거중기(擧重機)와 녹로(轆轤) 같은 기계를 제작해, 민초들을 부역(賦役)에서 해방시키는 한편 국세를 절감하게 했습니다. 배다리를 만들어 임금의 행차에 번거로움을 덜게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지요. 뿐만 아닙니다. 궁벽한 살림 때문에 홍역을 앓으면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민초들을 위해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의약서를 엮었으며, 자칫 억울한 송사로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을 앗을까 저어해, 옥사(獄事)를 다루는 목민관의 자세와 사례(事例)들을 흠흠신서(欽欽新書)에 담았습니다. 목민심서도 같은 맥락이었지요. 경기 암행어사와 금정찰방, 곡산부사를 지내면서 목도한 관리들의 횡포와 민초들의 고초에 마음이 아팠던 선생은 시를 짓는 선비의 마음가짐에 대해서조차 이렇게 일렀습니다.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주고자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가진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

 

 두 아들 학연, 학유에게 보냈던 글입니다. 선생의 시가 두보의 시를 많이 닮고 있음은 바로 이런 까닭인 듯싶습니다. 명문(名文)<파리를 조문하는 글>이 탄생하게 된 것도 굶어 죽는 백성들을 애통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아니었습니까.

 

 대문이 있는 동쪽으로 천천히 돌아섭니다. 순간 저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두 그루의 나무와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와 향나무입니다. 흔하디흔한 나무들이지요. 하지만 제 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은 그 두 나무의 자태였습니다. 어느 수필가의 표현처럼 신라 금관과도 같은 형태를 한 은행나무가 향나무를 지긋이 품에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은행나무의 노란 빛 때문에 향나무는 더욱 푸르게 보였고, 향나무의 푸른빛으로 해서 은행나무의 노란빛은 더욱 순수해 보였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목이 메어 옵니다. 그 두 나무의 형상이 마치 정조대왕과 선생의 모습인 것만 같아서입니다. 임금과 신하라기보다는 지기(知己)와 같았던 두 분, 아니 아우를 아끼는 형의 마음처럼 선생을 향해 날아오는 질시와 음해의 화살들을 몸소 막으며 다독여 주셨던 정조대왕의 사랑은 바로 저 은행나무의 자태였습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선생의 학문은 든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경세제민 의식은 제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지음(知音) 종자기(鍾子期)의 죽음에 거문고 줄을 끊고 돌아섰던 백아(伯牙)처럼, 임금이 붕어 하자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손수 쓰신 묘지명에서 두 분의 영결의 순간을 엿봅니다.

 

 “여름 유월 열 이튿날, 마침 달밤이어서 한가하게 앉아 있었더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내각의 서리였다. 한서선(漢書選) 열 질을 임금께서 하사하시며 유시하시기를 ‘오래도록 보지 못했다.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서 주자소에 벽을 새로 발랐으니 그믐께쯤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다섯 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다섯 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셨다 한다. 서리가 말하기를 유시를 내리실 때 얼굴빛이 못 견디게 그리워하는 듯하셨고 말씀도 온화하고 부드러우셔서 다른 때와는 달랐다고 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임금의 건강에 탈이 났고 스무 여드렛날에 이르러 하늘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날 밤에 책을 하사해주시고 안부를 물어주신 것이 끝내는 영결의 말씀이셨고, 임금과 신하의 정의(情誼)는 그 날 밤으로 영원히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이 일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짐을 참지 못하곤 한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얼른 문안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행랑채를 발밑에 두고 ㄱ자로 앉은 집은 방 둘에 대청뿐으로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관람자를 위한 배려인 듯 두어 칸쯤 도려 놓은 창호지 사이로 대청 안을 엿봅니다. 유품들을 한데 몰아 놓은 듯 먼지를 뒤집어 쓴 집기들이 엉거주춤 놓여 있습니다. 아니 뒹굴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싶군요. 휑뎅그렁하기는 건넌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으로 접힌 야외용 돗자리가 미아처럼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뿐 텅 빈 채입니다. 해배기를 보내던 말년의 선생의 마음이 저러했을까요.

 

 쓸쓸하여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돌아서는데 처마를 따라 가지런히 난 낙숫물 자국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을 찾는 발길이 잦아질수록 선생을 향한 그리움이 저 낙숫물 자국처럼 깊어 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 대한 아픔이기도 하지요. 지금은 뉘 있어 진실로 민초들의 고단함을 아파 해주겠는지요. 북학파의 몇몇 이름들이 스쳐갑니다. 그러나 이용후생과 실사구시를 위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준절히 나무라셨던 선생님. 초고속시대로 세계가 지구촌이 되어버린 지금, 선생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셨던 우리의 것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잘 지켜내고 있는 것일까요.

 

 뒤란을 돌아 후문을 나섭니다. 한 줄기 바람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문득 스미는 한기에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벤치에 앉습니다. 굳이 낙엽이 아니라도 손안에 느껴지는 차의 온기만으로도 가을이 이미 깊었음을 알겠습니다.

 

 유택이 있는 뒷동산을 오르는 길은 두 개입니다. 생가를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이지요. 오늘은 후문 쪽인 왼편 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계단과 돌이 번갈아 놓인 길은 떨어져 누운 솔잎들로 향긋하고 푹신합니다. 상석 앞에서 공수(拱手)로 재배를 대신합니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선생 앞에 서면 그저 침묵뿐입니다. 비석의 뒷면과 옆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선생의 행장을 읽고 또 읽어봅니다. 그리고 충주에 있는 선산을 마다하고 굳이 이곳에 묻히고자 했던 선생의 유지(遺旨)를 헤아려 봅니다. 수종사로 용문사로, 북한강과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호연지기를 키우던 시절을 잊지 못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임금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있는 한양성을 차마 떨치고 갈 수 없었음일까요.

 

 추측은 그저 추측에 그칠 뿐, 선생의 마음을 헤아릴 길 없어 선생이 바라보고 계실 곳을 향해 몸을 돌려봅니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 때문인지 두물머리가 보이지 않는군요. 지금은 양수리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두 개의 물줄기가 하나 되어 거대한 흐름을 만들 듯이, 옛것과 새것을 조화시켜 보다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선생님. 그러나 물은 기꺼이 하나로 몸을 섞건만, 세류(世流)는 그렇지 못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나 봅니다. 이합집산과 음해성 폭로를 일삼는 선량들, 부정부패에 길들은 목민관들…

 

 오늘, 오백 여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긴 학자로서도, 시서화에 능했던 문장가로서도 아닌, 목민관으로서의 선생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이유를 선생은 아실런지요.

 

 가을바람 불어와 흰 구름 몰아내니

 푸른 하늘에 그림자 하나 없어라

 갑자기 이 내 몸이 가벼워져서

 바람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파라

 -흰 구름-

 

 열수 선생, 당신은 정녕 한 줄기 가을바람이셨습니까?

 

 

 

- 이혜연 수필집 <숨은 길>에서 -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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