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그녀, 외로운가 보다 / 전성옥

희라킴 2016. 3. 20. 13:43

 

 

 

 

그녀, 외로운가 보다

 

 

                                                                                                         전성옥

 

 

 

 그녀는 얼마나 쓸쓸한 것일까. 이렇게 거센 폭풍이 치는 날 국화를 안고 오다니….

 

 자그마한 저 여자는 얼마나 외로웠기에 가을 태풍이 몰아치는 이런 날 국화 다발을 안고 왔을까. 힘이 뻗어 주체를 못하는 바람, 바람의 부대낌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버린 나무의 생이파리들…. 그 이파리들이 빗물과 함께 허공을 휘젓는 이런 밤에 어쩌자고 국화를 한 아름이나 안고 왔을까. 저 여자는.

 

 두 시간가량의 수업 시간 내내 국화는 조용히 누워 있다. 얼굴이 조그만 국화들, 벽돌색과 보라색의 소국들은 그녀의 옆자리 빈 책상 위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여자는 딱히 전해줄 누구도 없는데 그냥 국화를 안고 온 모양이다. 수업이 끝나자 가져가고 싶으면 아무나 국화를 안고 가라고 하는 걸 보니. 여자는 그 말을 하며 까르르 웃는다. 그녀의 웃음에서 낙엽처럼 팔랑팔랑 떨어져내리는 것들…. 어쩐지 낯설지 않아.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나이 든 이들이 취미 삼아 듣는 평생교육원 강좌에서 만났을 뿐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나는 그녀가 국화를 안고 오기 전까지는 얼굴도 알지 못했고 이 수업을 같이 듣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껏 그렇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누구도 느껴주는 이 없이, 이렇게 국화라도 한 아름 안고 오지 않으면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 나는 수업에 못 갈 형편이었다. 고질적인 기침병이 도져서 죽을 듯이 기침을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비바람이 몹시 휘몰아치는 날이라 기어코 차를 몰고 나왔다. 이 비바람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 넓고 휑뎅그레한 캠퍼스는 비와 바람이 온통 차지하고 있을 거야…. 나무들도 마구 흔들릴 거야. 가야겠다. 기침약을 삼키고 도라지차를 보온병에 담는다.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을 커다란 마스크로 덮는다. 편한 옷을 입고 말캉한 젤리슈즈를 신는다.

 

 장전동 B대학 인문관. 오래된 건물, 기다란 복도…. 눅눅하고 서늘하다. 어두운 유리창 너머에서 검은 춤을 추는 나무들, 파바박 파바박 낡은 창을 때리는 빗발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걷는 내 앞을 자그마한 여자가 걸어간다. 짧은 숏커트의 머리라 목덜미가 환하게 드러난다. 그 목덜미 너머로 국화가 보인다. 저 여자…. 국화를 안고 있구나. 여자는 누비 조끼를 입고 있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이긴 하지만 아직은 철이 이른 옷차림이다. 나는 금세 알아차린다. 저 여자, 추위를 타나 보다. 아니면 마음이 시린가 보다.

 

 수업 내내 국화에 눈이 간다. 그녀에게 눈이 간다. 수업을 마치고 그녀와 비슷하게 교실을 나선다. 옆에 걷던 그녀가 우산살을 만지작거린다. 혼잣말처럼 말을 한다. 바람이 불어서 살이 부러졌네요…. 살 부러진 그녀의 우산은 잔뜩 젖어 있다. 아마 대중교통으로 온 모양이다. 차를 가지고 왔으면 바로 건물 앞에 주차를 했을 것이고 저렇게 우산이 젖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세요, 하는 내 물음에 여자는 내 손을 살펴본다. 그녀는 웃는다. 우산이 없는 나를 살 부러진 우산이나마 씌워줄 생각인가 보다. 나는 나대로 그녀를 태워줄 요량이다. 이렇게 비바람이 부는 날 국화를 안고 온 그녀를 태워주고 싶다. 여자 둘이 나란히 걷는다. 누비 조끼를 입은 여자, 커다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여자, 추위를 타는 여자 둘이 어두운 복도를 타박타박 걷는다.

 

 건물 현관 앞에서 우산을 펼친 그녀가 몸을 살짝 뺀다. 나는 그녀의 우산 반쪽을 차지하고 걷는다. 내 차 앞, 방향이 같으면 같이 가자고 말을 한다. 그녀는 화들짝 반가워하면서도 괜찮겠냐 되묻는다. 다행히 그녀의 집은 내가 가는 길과 많이 벗어나 있지 않다. 어차피 많이 벗어나 있어도 상관은 없다. 추위를 타는 여자를 이 비바람 속에 그냥 보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가을 태풍이 몰아치는 밤, 달리는 차 안에서 두 여자가 서툴게 말을 한다. 말끝마다 까륵까륵 웃는 여자, 말 중간에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여자. 띄엄띄엄 이야기하던 두 여자는 아이들끼리 나이가 같은 걸 알고는 금세 마음 거리를 좁힌다. 그녀가 내 마음을 빤히 들여다본다. 나도 그녀의 마음을 말갛게 들여다본다. 그렇구나, 여자도 내 나이 근처겠구나, 아이들을 다 키워냈겠구나. 가슴에 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줘야 할 즈음이 되었구나.

 

 가슴에 무엇을 안고 있다는 것은 충만함이다.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안아주던 날들, 떨어져 있어도 항상 가슴에 안겨 있던 모습들, 젖비린내 나는 가슴에 머리를 묻고 색색 잠들던 어린것의 얼굴, 풋사과처럼 탱글탱글하던 젊음, 그 모두를 이제는… 떨구어내어야 한다. 바람에 부대낀 나무가 생이파리를 떨구어내듯이.

 

 그녀는 우장춘로 끝머리에 있는 마을 입구 부근에서 내려달라고 한다. 만덕터널 아래 잠겨 있는 외진 동네다. 오르막을 올라간 언덕바지에 있는 동네, 이 궂은 날씨에 살 부러진 우산을 쓰고 어두운 동네로 올라갈 여자가 걱정이다. 그러나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려던 마음은 그대로 접어놓는다. 때로는 지나친 친절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녀가 말한 자리에 차를 세운다. 차에서 내린 여자는 굽힌 허리로 나를 들여다보며 반달눈으로 웃는다. 차 안의 나는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입꼬리를 당겨 올리면서.

 

 국화를 안고 왔던 여자는 두 손으로 우산을 꼭 붙들어 쥐고는 어두운 동네 어귀로 들어선다. 휘리리링 쏴아아, 바람과 비가 함께 몰아친다. 펄럭 우산이 날리고 잠시 휘청대던 여자는 우산을 나지막하게 고쳐 잡는다. 다행이다. 무엇이라도 꼭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있어서…. 여자의 우산은 어둠과 빗발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그녀가 집까지… 바람에 후달리지 말고 잘 가야 할 텐데, 마음이 젖지 말고 잘 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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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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