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24시 편의점 앞에서 / 김창완

희라킴 2016. 3. 20. 11:36

 





24시 편의점 앞에서

                                                    /김창완(산울림 가수)



생쥐 한 마리 얼어 죽어 있는 강가. 한겨울 북풍을 맞으며 그 강가에 서 있으면 가난했던 어릴 적이 기억난다.

미군들의 옷은 대부분 컸기 때문에 제일 작은 '스몰 사이즈'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구에 겨우 맞았는데 그게 그냥

옷 이름이 되어 미군 군복을 '스모르'라고 불렀다.

새벽 어둠을 뚫고 스모르를 입은 아버지는 어깨를 웅크린 채 일터로 가시고 사발시계가 양재기 깨지는 소리로

울려대면 아이들은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했다. 화기라고는 아궁이의 연탄 한 장이 전부. 따뜻한 물 한 바가지로

냉기만 가신 세숫물에 고양이 세수를 하고 문고리를 잡으면 손가락이 지남철처럼 문고리에 가 달라붙었다. 오지게

추운 그런 풍경도 기억 속에선 병아리처럼 따뜻하기만 하다.

요즘 그렇게 시린 겨울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 또 한 군데 있다. 새벽시간 동네 어귀를 밝히고 있는 편의점
이다.

힘겹게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형광등 불빛이 북풍처럼 차갑다. 그 안에 젊은 꿈이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청년이

있다. 재앙과도 같은 청년실업. 몇 번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신 그 청년은 시험지만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진다며 시험 공포증이 있는 것 같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에겐 시험뿐만 아니고 여러 개의 공포가

있다. 집세가 공포고, 밥값이 공포고, 청첩장이 공포고, 겨울바람과 세월조차 공포일지 모른다.

기억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감시카메라의 침묵에 비하면 냉장고 전기 소음이나 바코드 찍히는 소리, 금전출납기의
철커덕

거리는 소리는 차라리 인정스럽다. 여명이 트기 시작했으나 아직 세상은 모노톤이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색, 모노톤.

청년의 어린 시절은 알록달록한 풍선 뽑기가 미닫이문 옆에 달려 있는 문방구 근처에서 시작된다. 한 번도 큰 풍선이
뽑힌

적은 없지만 언젠간 커다란 풍선을 뽑을 수 있는 거라고 믿었다. 그 풍선을 타고 동네 언덕이나 들판, 강을 가로질러 날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억 속의 그 문방구가 아스라해지면서 청년의 풍선도, 청년의 꿈도 아스라해져 갔다.

 





아침이 시동을 걸면 점액질 유체처럼 흐르는 군상을 보면서 청년은 '생존경쟁'을 떠올릴 것이다. '생존경쟁'이라는

단어는 생존을 위해서 투쟁을 한다는 능동적인 개념이 있는 반면에 변화하는 환경 때문에 다른 것들이 도태되는

상황에서 남아 있기 위한 수단이라는 수동적인 개념도 있다. 그래도 난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젊은이여 두려워하지 말게. 자네는 이미 살아남는 쪽으로 선택받았지 않았는가? 좀 여유를 갖고 시간을 친구로

늘 곁에 두도록 하게. 시간을 앞세워 자네가 쫓아가지도 말고 시간 앞에 가면서 미래를 가불해서 쓸 필요도 없네.

인생을 전쟁 모드로만 보지 말게. 화원을 지날 땐 꽃을 보고 잎사귀 다 떨어진 겨울나무도 한번 쓰다듬어 볼 일이네.

문득 생각이 나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도 보고 찬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 아파트 경비한테 '춥진 않으시냐?'고

지나치는 말로라도 벗이 돼 볼 수도 있네. 그리고 사랑하게. 설혹 세상이 미워도 사랑하게. 알베르 카뮈가 그랬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느냐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라고….

교대할 아르바이트생이 올 때까지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물건 정리를 해야 되나? 아니면 아직도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풍선을 찾으려나? 그러진 말게. 보낼 건 보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네. 어린 시절의 풍선

뽑기로부터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게 우선 해야 할 일 아닐까? 당당히 북풍 앞에 서보는 걸세. 혹시 시간이 되면

27세 프랑스 작가 마르탱 뒤가르가 '생성'에 나오는 자기 분신에게 부여한 세 가지 열망을 생각해 보게.

'원할 것, 이룰 것, 살아나갈 것'―.

 


 

                                                                   조선일보 2008.1.12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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