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막걸리 약속 / 정성화

희라킴 2016. 3. 6. 14:48

 

막걸리 약

                                                                                              

 

  아버지는 술을 자주 드셨다. 집 근처의 대폿집에 계신 아버지를 모셔오는 일은 늘 나에게 맡겨졌다. 아버지는 대개 혼자였다. 대폿집 아주머니의 심드렁한 표정을 보면 아버지가 거기 얼마나 오래 계셨는지 알 수 있었다. 홀로 막걸리 주전자를 잡고 술을 따르는 아버지는 접시에 남은 깍두기 몇 조각처럼 무척 쓸쓸해 보였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 "아부지, 엄마가 이제 고마 오시랍니다"라고 말하는 게 쉽지 않아서, 나는 아버지가 나오실 때까지 대폿집 문 앞에 서 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친구의 아버지들처럼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였으면…, 저녁이면 과자 봉지를 들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대문에 들어서는 아버지였으면…' 하고 생각했다. 대폿집 유리 창문은 오랫동안 닦지 않아서 뿌옇게 흐려 있었고, 그 때문인지 내 마음은 아버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부축해서 집으로 오는 동안, 아버지의 몸이 갑자기 내 쪽으로 쏠릴 때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라도 그런 모습을 내 친구들이 볼까 봐 마음이 졸아들었다. 나는 술 마시는 아버지 때문에 슬펐고, 창피했고, 우울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왜 허구한 날 술을 드셨을까. 짐작되는 게 없는 건 아니다. 버스 운수 사업을 같이 해 보자는 친척의 제의에 홀려, 아버지는 집 한 채 값을 덜렁 주고 중고 버스를 한 대 샀다. 여덟 식구의 밥줄이 달린 그 버스는 툭하면 고장이 나서 며칠씩 공치기가 예사였고, 버스가 낡았다는 이유로 승객이 적은 외곽지 노선에 배당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 갖다 줄 수입이 별로 없었다.
  

 공납금을 제때 내지 못하고 참고서도 한 권 사 보기 힘든 집안 형편이 참으로 구차하게 생각되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다음 달에는 돈이 좀 나올 거라는 아버지의 예고가 빗나갈 때마다 아버지의 진실성도 의심스러웠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조금씩 이해되었다. 바로 걷고 싶어도 비틀댈 수밖에 없는 게 삶이고, 세상이란 강물은 막걸리 속과도 같아서 늘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아마 당신의 무능력을 괴로워하며, 끓어오르는 자책감을 식히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았을까. 아버지도 얼마나 잘살아 보고 싶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가난에 꺾이고, 공부하고 싶은 소망도 꺾이고, 마지막으로 벌인 운수사업에서마저 꺾인 아버지. 정말 아버지의 삶은 줄곧 아래로만 치닫는 '꺾은선 그래프'였다. 그 무렵에 아버지는 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왜 내 눈에는 술 마시는 아버지만 보였을까.

  당신의 병이 식도암 말기인줄 모르는 아버지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낫고 나면 시원한 막걸리부터 한 잔 해야겠다."
  "예, 그 때는 제가 꼭 사 드릴께예."
  나는 지키지 못할 줄 알면서도 아버지에게 약속을 드렸다. 아버지는 결국 나이 오십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 세상의 막걸리를 다 놔두고.

  막걸리는 대포라고도 부른다. 대포란 원래 큰 그릇을 의미하지만,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대포의 의미까지 얹혀 있을 것 같다. 저녁 거리에서 "대포 한잔 하고 가자"며 일행의 팔을 끌어당기는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부지, 이번에 나온 막걸리 맛이 참 좋던데, 대포 한잔 사 드릴까예?' 아버지께 드린 막걸리 약속을 나는 언제 지킬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