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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을 대표하는 109명의 현역 시인들이 뽑은 ‘최고의 시구’

희라킴 2016. 3. 16. 07:05

 

한국을 대표하는 109명의 현역 시인들이 뽑은 ‘최고의 시구’

 

 

강은교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苦惱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時間을 위해서
―― 김수영, 「꽃잎 2」에서

김수영, 이상한 모더니스트. 그에게 나는 참 많이 빚지고 있다.
그에게서 리듬이 왔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새벽 어떤 때, 리듬은 모든 것이니까, 형식이면서 내용이니까. 그의 시는 매끄럽지 못하나,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터억 걸리는’ 그런 리듬의 구절들이 있고, 그런 리듬들은 가끔 나를 시로 이끌곤 한다. 그 중의 하나.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꽃잎 (2)」 중에서) ‘구체 추상’의 실마리, ‘리얼 모더니즘’의 실마리, 결국 ‘상황 서정’의 실마리…… 그가 던져준 셈이다.

강 정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 김수영, 「헬리콥터」에서

자유는 대개 비상과 통한다. 그러나 자유를 꿈꾸는 마음은 늘 비상에 대한 불가능성을 인지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영원불멸하는 모순이 아니라면 나는 자유에 대해 아무 할 말도 없다. 시적 자유와 삶의 자유를 등가로 봤던 김수영에게 자유란 늘 새롭게 돌이켜야 하는 양심의 나침반이자 그 처참한 결론이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시는 언제나 미완의 결론으로 남는다. 시인에게 정작 두려운 건 자유의 결핍이 아니라 자유의 완성이었다. 자유는 관념인 동시에 행동인 모종의 음험한 도덕률이다.

자유는 구속을 전제로 했을 때만 날아오를 수 있는 불구의 정신이다. 그 불구를 불구 자체로 인식했을 때 정신은 불굴의 것이 된다. 자유는 이렇듯 정신이 노정하는 궁극의 말장난과도 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가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시인들은 ‘우매’하고 ‘어린’ 종족일 수밖에 없다. 자유라는 관념은 인간을 전혀 해방하지 않는다. 해방 다음의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 다음의 꿈이 정치적 자족과 기만뿐이듯, 시인에게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 일이라면 자유는 유보되어야 한다.

고두현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 서정주, 「자화상」에서

어디 ‘스물세 해 동안’뿐이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던 청춘 시절부터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캄캄한 절망조차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듯이……

고 영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에서

은행원을 꿈꾸던 학생이 있었다. 어려운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자 마음먹고 스스로 상고에 입학해 책만 파던 학생이었다. 학교 밖은 시끄러웠다. 시국이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학생에게 운명이 바뀔 만한 일대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형이 유인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얼떨결에 받아든 유인물에는 군부독재니, 민주화니 하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그 유인물 내용 중에 학생의 마음을 벼락처럼 휘어잡은 글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였다. 아무튼 그 다음날 스스로 문예반을 찾아갔던 학생은 이후부터 교과서 대신 시집과 『노동법 해설』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은행 근처에는 평생 가보지 못했다.

고영민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그 방을 생각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스무 살 문청시절, 우리는 문학을 한답시고 그 컴컴한 방에 모였다. 놀란 눈으로 미제침략사를 읽고 어느 날은 하얗게 최루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가두에 나갔다가 돌아와 그 방의 차가운 바닥에 눕곤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며칠을 낯선 방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당시 우리의 교과서는 '형상과 전형'이라는 루카치의 문예미학서였다. 그리고 시를 사랑하던 한 친구 녀석은 새벽, 그 방을 걸어 나와 취한 채 술을 사러 나갔다가 차에 공중으로 들려져 영영 그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의 우리들은 지금 아무도 없다. 모두 그 방안에서 전사했다. 혁명은 안되고 방만 바꿔버렸던 우리가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다.

고운기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

1978년 가을이었다. 군부독재의 단말마斷末魔가 가까이 들리던 무렵,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국어 시간이면, 작은 키에 단아한 모습, 눈빛이 맑은 선생님 한 분을 나는 기다렸다. 정희성. 그러나 그가 좀체 시국을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3학년의 한 선배가 어느 문학지에 실린 시를 보여주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였다. 처음 넉 줄을 읽었을 때 ‘물’과 ‘삽’과 ‘슬픔’이라는 세 단어가 주는 울림에 떨었던 기억이, 30년도 넘은 오늘까지 선연하다. 그보다 먼저 정희성은 “흐를 수 없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저문 강 언덕에 떠도는 혼이여”(「유전流轉」)라고 노래한 적이 있었다. 몇 년의 정치적 신난辛難을 겪으며, 정희성에게저문 강 흐르는 물은 어느새 자기화自己化되어 있었다.

고진하
물 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묵화」 전문

시인 김종삼의 「묵화墨畵」 전문이다. 언제 읽었는지 정확치 않지만, 이 시가 내게 벼락치듯 다가왔던 것 같지는 않다. 시를 읽고 나서 그냥 멍했던 것 같다. 하여간 이 시 때문에 나는 김종삼의 ‘시인학교’를 자주 드나들었다. 사물과 우주와의 교감을 이토록 짧은 시구로 표현하기가 어디 쉽던가. 진정한 교감은 신생의 통로이며, 자아 발견의 불꽃이다. 평화로운 풍경의 한 컷이지만, 삶의 비애와 슬픔과 적막이 부은 발잔등의 아픔처럼 스며 있다. 그 스밈은 치밀하여 시의 화자와 대상 사이에 ‘사이’가 없다. 그 사이 없음의 깊이와 넓이를 획득하는 일이 시의 지향이라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먼가.

권현형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김수영, 「거미」에서

“너무 시퍼래서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는 저 스무살!”(김영태) 무렵에 만난 김수영의 문장은 강렬했다. 달디달았다. 빛과 어둠을 등에 짊어지고 다녔던 시절, 시지프스처럼 세계의 무게를 등짐지고 다녔던 시절, 갓 성인식을 치룬 내게 밖은 어쩐지 의뭉스러웠다. 의심스러웠다. 김수영의 설움이 나의 설움인 듯했다. 시퍼렇게 순결한 염결성을 무기로 지니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팔십년대 중후반. 왜 노랫말이 슬프냐고, 왜 행복하지 않느냐고 개인의 자의식을 검열받던 시기였다. 그때, 건전가요가 눈발 날리는 겨울 거리의 레코드 가게에서 불안하게 흘러나왔다. 하나, 어두울수록 환하고 싱그러운 문청 시절에 받아들인 설움은 외연일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흘러 풍경이었던 설움은 육체성을 내면성을 띠기 시작한다. 시의 원천으로, 소금을 뿌린 듯 아린 자의식으로 내부에 굵은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길상호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요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 이상, 「거울」에서

악수를 모르는 세상에 서 있었다. 그 세상은 다름 아니라 내가 만든 세상이었다. 볼 수는 있지만 손끝 하나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언제나 나와 표정을 맞추면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걷고 있었다. 그 중 내가 실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의심하기 시작했다. 넌 왠지 허깨비 같아, 넌 너무 가득 차 보이니 실체가 아닐 거야,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의심해가다 보니 결국 손가락은 스스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것도 파악해내지 못하는 너도 아닐 거야. 이제는 만나는 얼굴마다 주먹질이 시작됐다. 거울 속에 갇힌 얼굴은 깨져버릴 테니까. 그렇게 깨가다 보면 결국 남는 하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주먹의 핏물 든 상처마다 박혀든 거울조각이, 조각마다 깨져 있는 얼굴이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도 실체야! 나도 실체야! 머리는 그들의 괴성으로 날마다 시끄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머리 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꼭 그 손을 잡으려 했던 것일까? 가만히 손을 거둔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마음이 참 편하다. 거울을 뒤로하고 걷는다. 가끔 돌아볼 때에도 거울 속 너는 뒷모습을 보이지 않아 좋다. 그때서야 와장창 냉담하던 거울이 깨진다.

김광규
그립다 / 말을 할까 / 하니 그리워 //
그냥 갈까 / 그래도 / 다시 더 한 번 //
―― 김소월, 「가는 길」에서

1950년 정음사에서 나온 『작고시인선』(서정주 엮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한국 시선집이다. 책이 귀하던 50년대 초반기에 일금 오백 환을 주고 샀다.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 등 한국 신시의 선구자 열 분의 대표작품들이 실려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사사한 시인이 없으므로, 이 얄팍한 책이 문학수업의 첫 번째 스승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은 사춘기 청소년의 민감한 정서에 호소하는 바 크고, 3음보 율격도 친근한 매력을 풍겨 저절로 암송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내 문학교양의 기반으로 자리잡았다고 할까. 애틋한 그리움을 이처럼 짧은 3행 시연에 담은 예를 달리 본 적이 없다. 전통적 서정시의 전범은 오늘날 흔히 잊혀지거나 무시되기 일쑤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시구를 쓰지 못한 부끄러움을 나는 항상 느끼고 있다.

김광림
온길 눈이 덮여
갈길 눈이 막아
이대로 앉은 채
돌 되고 싶어라
―― 박경수, 「눈」

해방 직후 향토(원산) 시인들이 펴낸 『응향』 시집 속에 수록된 것. 이 작자는 시인이기 전에 사학자였다. 당시의 암담한 현실과 사회상을 이렇게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집을 가장 악랄하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나선 평자는 백인준이었다. 근자에 알았지만 그는 일제 말기 윤동주 시인과 친구였다고? 60년이 넘도록 청소년기에 읽은 이 시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뿐더러 ‘돌’에 관한 ‘바위’시까지 쓰게 만들었다.

“너에게 걸터앉으면/탐나는 것 부러운 게 없어져/벼슬자리 꽃자리 내갈겨 둔 채/듬뿍 술 한 잔 들이켜고/너마냥 잠들고 싶어져” 세상사 돌아가는 꼴이 돌 되고 싶은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간혹 돌마냥 잠들고 싶은 심정임을 어쩌랴.

김규동
3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에서

경성고보 시절 영어시간에 기림 선생이 누차 당부하던 말이 생각난다. 담배 피우지 말아라. 책을 선택해서 읽어라. 새로운 문명에 접하는 생활태도를 중히 여겨라. 지금은 수학 영어 물리 화학 지리 기하, 이것을 공부 잘하고 글쓰는 일 같은 것은 기초학문을 마친 다음에 해도 충분하다. 대성하는 길이 그것이다. 이런 교훈만 하고 우리들이 만든 ‘동인지’ 따위는 봐주려 하지 않는 선생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빨리 시인이 되고 싶은데, 하지만 시인 스승은 그것을 절대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위 시구는 센티멘털·로맨티시즘의 시 풍토에서 지성을 건져올린 시작품의 한 보기다. 이미지 예술로서의 시가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즉물적 객관적 회화적 구성적인 요소가 그것들이다.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이 시가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기에 씌어진 작품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규성
이슬은 하늘에서 내려온 맨발
풀잎은 영혼의 깃털
―― 정진규, 「화和」에서

내 침실 겸 서재에는 한 편의 시가 수채화처럼 걸려 있다. 예의 ‘활달한 유연柔然’이 특징인 경산체絅山體가 빚어놓은 우주시 속의 액자시이다. 그 도입부가 위 구절인데 혼의 상징적 거처인 하늘을 육감적으로, 몸의 텃밭인 대지를 정령적精靈的으로 탈바꿈한 전경화가 행여 낯설지 않다. 화급하게 “맨발”로 달려온 “이슬”을 “깃털”처럼 부드러운 설렘으로 맞는 “풀”의 조응은 원초적이면서도 그지없이 순결한 상생의 축제로, 그 정경유착情景癒着의 절경絶景이 볼수록 황홀하고 환하다.

산문시조차도 여느 정형시보다 더 맛깔스런 리듬을 자랑하는 정진규 시인의 시는 한 마디 오해도 허락지 않을 듯 수고롭지 않게 읽히면서도, 구구절절이 감미롭고 유장한 울림으로 청자聽者의 몸 속 깊숙이 녹아 흐르는 게 압권인데 위의 천지공사天地工事는 그 중에서도 백미이다. 각별한 인연일수록 ‘객관적 시 읽기’가 예의이겠지만 그런 상식과 기우쯤 무색하게 압도하는 두 행의 벅찬 은유가 내 일상의 삭막한 직유와 동거한 지도 꽤 날수가 찬 셈이다.

김남조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 서정주, 「시론詩論」에서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시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명시, 명구절은 허다하련만 그 중에서 위의 6행시 한 편을 가려 뽑았다. 앞의 3행은 전치사인 셈이고 뒷부분 3행에 있어서도 끝줄이 나의 일상에 거의 유착되어 온다. 시인이 한 편의 새 작품을 마무리짓고 나면 흔히 존재의 공동空洞현상에 빠져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 까닭은 일상의 수심이 얕았거나 비축해 둔 곡물창고가 가난했기 때문인 듯하다.
.
나는 내 시정신의 빈혈현상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자주 있어오는 이 증상을 우려하고 겁먹어왔다. 한 편의 시를 얻었을 때 더 좋은 다음 시가 물속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풍요로움이야말로 내 평생의 황홀하고 과분한 희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시인에게 있어서도 시의 샘물이 다시금 그 전량으로 남아 부풀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바랄 것이랴.

김병호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 송기원, 「시」에서

시와 삶이 하나였던 시절, 오히려 생활이 시를 빛내 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재수 끝에 들어온 대학교에서 난생 처음 입어본 과티. 그 가슴팍에 찍혀, 시보다 먼저 옷으로 입었던 시구.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스무 살의 우리들은 시를 입고 명동과 남대문시장, 평택역을 뛰어다녔다. 가슴팍에 찍힌 화인처럼, 남몰래 어루만지거나 조용히 읊조리기만 하여도 척추가 꼿꼿해지곤 했다. 양심만으로 양심을 지킬 수 없었고, 용기만으로 승리할 수 없었던 시절의 마지막 세대였다. 심판의 날 소돔을 탈출할 때, 유황 불벼락 속에 죽어가는 이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본 채 죽어, 빛나는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시인의 삶이란 그러해야 한다고 아직 믿는다. 그리고 여전히 한 편의 시가 천만인의 가슴을 격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김상미
나도 감히 상상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김수영, 「거대한 뿌리」에서

여고 시절, 나는 차비를 아껴 민음사에서 나오는 시집들을 한 권씩 사 모으는 게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그때 산 김수영의 시집 『거대한 뿌리』를 읽었을 때, 나는 시라는 운명이 기지개를 켜며 힘차게 내게로 달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알았다. 내 길은 문학에 있으며, 언젠가는 누구의 의지도 아닌 내 의지로 그 길을 가게 되리라는 걸. 그 이후부턴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나는 내 안에서 자라나는 ‘문학’으로 인해 쉽게 기가 꺾이지 않았다. 남들이 볼 땐, 허허벌판 한복판에 혼자 꽃피우며 서 있는 이상의 「꽃나무」처럼 이상해 보였겠지만. 그 모든 세상일은 ‘나도 감히 상상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능히 견딜 만했으며, 스스로 힘이 되어 나를 지켜주었다.

김선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중학교 1학년 시절, 시골집 형의 골방에는 달랑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내 고향 강진 출신인 김영랑의 시집이었다. 달리 읽을 책이 없었거니와 당시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던 나는 수십 번이나 그 시집을 읽어서 송두리째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김영랑 시인과 그의 시집은 맨 처음 나를 시의 길로 인도한 운명적인 스승이요 텍스트가 된 셈이다. 특히 그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역설의 시구는 지금도 나를 경탄과 전율에 떨게 한다. 슬픔의 빛깔이 어쩌면 이토록 찬란할 수 있단 말인가. 애이불비의 촉기를 머금고 있는 이 시구로 인해 영랑의 시가 저급한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았듯이, 나의 시도 어두운 과거사를 잘 다스려 승화된 시세계를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구는 아직도 내겐 불상의 광배光背처럼 환하게 남아 있다.

김 언
이 무언의 말/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 김수영, 「말」에서

여름밤이었나 겨울밤이었나. 흥건히 술에 취해 소설 쓰는 형의 집에 가서 보았던 말. 한동안 얼이 빠져서 보았던 말. 나무액자에 고이 걸려 있던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말. 김수영의 말. 말에 대한 말. 말이 아닌 모든 것에 빚진 말. 빛이면서 우연이고 우연이면서 죽음을 꿰뚫는 말. 만능의 말이면서도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시인의 말이면서 범인의 말. 평범한 말이면서 죄를 짓는 말. 모두를 겨냥하면서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 말. 저 혼자서 맴돌고 저 혼자서 죽음을 목격하는 말.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려도 탄생하는 말. 아무도 목격하지 않는 밤의 말. 이 무언의 말이자 유언의 말. 시체의 말이자 정확히 생명의 말. 감각의 말이자 침묵의 말.

김언희
벗겨내주소서아버지
나를아버지
콘돔처럼아버지
아버지의좆대가리에서아버지!”
―― 김언희, 「벗겨내주소서」에서

한국현대시사 100년이거나 말거나, 가장 빛나는 표현이거나 말거나, 최근에 나로 하여금 ‘절정의 순간을 체험케’ 한 것은 위의 구절이었다. 십수 년 전의 글을 뜻밖에, 그것도 토막으로 지면에서 대면한 순간, 내장 속으로부터 차디찬 전율이 번져나왔다. 감동이 아니라 전율이, 살갗을 기는 지네 같은 전율이. 쓸 때는 무엇을 왜 쓰는지 모르고 썼던, 써 놓고서도 여직 깨닫지 못했던, 이 구절은 이상의 “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의 대구對句였으며, 김수영의 “한 가지를 안 속이려고 모든 것을 속였다.”의 대구였다. 나의 대구였으며, 나의 대꾸였던 것이다. 나의 온 몸과 마음, 온 생활을 건!

김왕노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 기형도, 「밤눈」에서

시인의 눈이 미모사보다 더 예민하고 말미잘보다 더 감각적인 촉수를 가졌음을 그리하여 내가 그보다 더한 감각체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고 내통해야 함을 일러 준다. 시인은 누구나 쉽게 간과해가는 하찮은 것에서부터 미세한 것을 영혼의 세포 하나하나로 읽어간다. 뒷전에 있거나 잊혀지거나 소외된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위대함은 완성된다. 나는 언제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을 읽어내고 노래할 수 있나. 시인이 예민한 감각의 영혼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상처를 쉽게 입고 존재가 불안하다. 하지만 예민한 감각을 가졌기에 세상의 모든 어둠을 감지하며 어둠에 대해 고발해 온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이 입증된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에서……

김이듬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오
―― 이상, 「거울」에서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중얼거리며 버티던 때였다. 나는 왼손잡이, 안경잡이에다 소위 말하는 결손가정의 병약한 소녀였다. ‘거울 속의 나는 정상/왼손잡이 아냐, 풀 같은 머리칼/거울 속에서 나는 두 개의 눈동자’. 나름 신경 쓴 몇 문장 때문에 국어선생은 화를 내셨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베끼고 난리야!’ 출석부로 머리를 탕탕 치셨다. 증거물로 내민 이상의 시집이야말로 난생 처음 보았다고 아무리 해명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나는 이름도 시도 이상한 이상이 나보다 빨리 태어나서 내가 할 말을 선수친 것에 분개했지만,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처음으로 당혹케 안절부절 못하게 한 시였으니까.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최고’는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오라! 네 천둥벼락을 내 심장에 꽂아서 제발 나를 잠잠하게 해줘.)

김정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서시」에서

단발머리 시절의 어느 여름밤, 툇마루에 누워 본 하늘의 별빛이 청명하게 가슴속을 파고든다. 바람에 스치는 별, 나의 별, 나의 존재, 불현듯,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별빛 쏟아지듯 내 몸을 덮친다. 모공마다 솜털 일제히 일어선다. ‘흔들리는 바람은 씨앗을 퍼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이후,「서시」의 날카로운 반성의 언어는 불안한 성취마다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낱낱의 길목에서 함께 서성이던 그 불안은 어느 극점에서 시를 엿보게 하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만화경을 흔들어 섞어 놓은 듯 미로를 헤매는 나의 시 쓰기. 지금도 나는 처음 감격 그대로 「서시」를 통해 끊임없이 채널링하고 있다.

김종길
이 말은 누가 난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 정지용, 「말 1」에서

지용의 「말 1」은 동시풍의 작품인데 앞에서 인용한 두 행으로 끝난다. 나는 이 두 행을 지용시 가운데서 최고의 순간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해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한국 현대시를 통틀어서도 시적으로는 최고의 시구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경우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란 지난하다. 엘리엇이 젊었을 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좋은 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올 여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 비엔나미술사박물관 소장 합스부르크 왕가 수집 작품들을 둘러보고 제일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 책을 읽는 자기의 아들을 그린 렘브란트의 그림이었을 때도 그러했다. 그 화폭에 신운神韻이 감돌듯이 지용의 그 두 행에도 신운이 감돈다고나 할까.

김종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서시」에서

중학교 까까머리 시절에 만난 시입니다. 스무여덟 살에 옥사한 그는, 시인으로서 시를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다만 유고 시집이 나오고 난 후 우리는 그를 시인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그래서 더욱 정갈하고 곡진하게 내 마음 속에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단 한 줄의 표현에 괴로워했던 철없던 시절, 나도 윤동주의 잎새처럼 괴로워했습니다 ‘한 점 부끄럼’ 없었던 까까머리의 문청 시절이 바로 나의 서시입니다.

김종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에서

캄캄하고 외로웠던 문청 시절, 부산은 어두웠다. 나는 혼자서 그 어두운 유적지에 남아 있었다. 내 호주머니 속엔 언제나 청산가리, 죽음도 무섭지 않았다. 그때 내게 투사되었던 한 줄기 불빛, 시詩였다. 칼릴 지브란은 속삭였다.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아 주지 않으리라.” 그의 음성은 나를 시에 눈뜨게 했다. 칼릴 지브란과 함께 김춘수의 시 「꽃」이 왔다. 「꽃」은 나를 적대적이었던 세상 속으로 부드럽게 연착륙시켰다. ‘세상 사는 법’과 ‘사랑하는 법’까지. 나는 당당하게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까지 부르게 되었다. 끊임없이 스스로 그 이름을 불러보고 각인시켜 보라. 어쨌든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중식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 김수영, 「거대한 뿌리」에서

한갓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1980년대 중반, 나의 습작시절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브레히트)였다. 짐승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었다. 혼의 절창絶唱들인 소월과 미당은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욕이 나왔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아도르노)는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나의 두개골을 반쪽으로 쪼갠 섬광 같은 시구가 어찌 한둘이겠는가. “날카로운 첫 키스”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화두다. 그 가운데 “미국놈 좆대강”을 들이민 이유는 내 시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외우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지는 글, 남들이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이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까지 나의 시는 모두 그 구절의 표절이자 변주이다.

김 참
내왼편가슴심장의위치를방탄금속으로엄폐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권총을발사하였다. 탄환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하였으나그의심장은바른편에있다.
―― 이상, 「오감도 시제15호烏瞰圖 詩第十五號」에서

고등학교 때 아주 두꺼운 시선집에서 이상의 시를 처음 읽었다. 그의 시는 시선집에 수록된 다른 시인들의 시와는 달리 무척이나 강렬했다. 지금까지 읽어본 수많은 국내외의 시 가운데 인상적인 작품들은 적지 않지만, 거울을 소재로 이상이 쓴 시만큼 독특한 느낌을 주는 시는 그리 많지 않다.

거울을 소재로 쓴 시도 그렇지만 나는 이상의 다른 시들도 대부분 꿈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잘 몰랐던 습작시절, 나는 간밤에 꾼 꿈을 노트에 옮겨두곤 했다. 그때 내가 옮겨둔 내 꿈들은 내 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한갓 백일몽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꾼 꿈은 내 삶의 절반이다. 내가 꾼 꿈과 내가 쓴 시는 내 삶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꿈꾸는 사람이니, 그가 꾼 꿈들은 시가 아닌가?

김행숙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김소월, 「초혼」에서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소월의 이 구절이 아직까지도 내게 그 진동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 그것은 이름이랄 수도 없는 울림이자 파동 자체로 변용되어 내게 무한한 가능성의 지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쓰기는 사라지는 중이면서 동시에 구성되는 과정인 그러한 상태를 체현하는 특이한 신체가 되는 일이다. 이제 내게 소월의 「초혼」은 절대적인 이별 앞에서 슬픔과 격정의 최대치를 실연하는 연인의 노래가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 그 너무 넓은 공간 속에서 비껴가는 것, 희박해지는 것, 조밀해지는 것, 그러한 이질적인 흐름과 리듬을 부르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하늘과 땅 사이, 그 과도한 넓이를 몸으로 품은 이상한 내부에서 그 내부를 찢으면서 폭발하는 기쁨을 나는 부르고 싶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나태주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에서

중학교 3학년 때. 열다섯 살 때. 적산가옥으로 남겨진 썰렁한 다다미방 하숙집에서 겨울을 나며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던 때. 함께 하숙하고 있던 동급생으로부터 얼핏 전해들은 한 편의 시, 그리고 그 첫 구절은 나의 어린 영혼을 흔들어주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가슴속이 쩌르르했다. 어쩌면 이리도 내 마음 그대로일까. 시란 이렇게 다른 사람 마음을 대신해서 표현해주고 또 그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주는 것인가 보구나. 막연히, 참으로 막연히 나는 이 한 편의 시를 앞에 두고 시인이 되어보고 싶었다. 만약 내가 중학교 시절 이 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면 몰라도 나는 시인이 되지 않았어도 충분히 좋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를 바꾸어 버린 한 편의 시, 그리고 한 구절. 그 사무치는 풋내기 소년의 감동 앞에 다시 한번 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희덕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에서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월리스 스티븐즈의 시 「혼돈의 감정가」에 나오는 두 개의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A.폭력적 질서는 무질서이다”와 “B.위대한 무질서는 질서이다”라는 명제가 그것이다.
김수영에게 있어서도 폭력적 질서란 낡고 고정된 질서를 의미하고, 위대한 무질서란 무한대의 운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예민한 혼돈의 감별사이자 창조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진정한 혼돈의 진원지를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는 욕망의 검은 입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이 구절은 거대한 뿌리, 또는 고요한 사랑의 발견에 도달하는 김수영의 시적 도정을 압축하고 있는 셈이다. 욕망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사랑을 발견할 수 없다는 그의 전언은 혼란도가 낮은, 그리하여 폭력적 질서에 갇혀 있는 나의 시들을 화들짝 깨우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노향림
내가 많은 돈이 되어서
선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맘놓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리니
―― 김종삼,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 씨」에서

김종삼 시인은 한 시대를 불행하게 살다 간 시인이었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으로 시달리다 끝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를 발표할 무렵도 시인은 늘 소주병을 뒷주머니에 넣고 조선일보 뒷골목 지금은 없어진 아리스 다방에 나타나곤 했다.
차를 시키진 않고 컵을 달래서 소주를 마시곤 했다. 시는 이렇게 아름답고 황홀하게 읽혀도 과음에서 오는 자신의 육신의 망가짐을 미처 알지 못했을까. 그토록 버티기 어려운 환경에서 이처럼 놀라운 시를 쓰다니, 나는 이 시를 읽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병들고 가진 것 없는 자의 시혜를 말하기 위해 불행하게 살다간 이중섭의 혼을 빌어 시인은 말하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아도 불행은 예고되듯이 시인은 끝내 술로 세상을 떠났다. 육신의 스러짐을 알고도 오히려 시로써 우리에게 시혜를 베풀고자 했을까.

마경덕
집은 벽 속의 곳간에서 제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간다 집은 저 벽을 부수고 나와야 한다
―― 손순미, 「담벼락 속에 집이 있다」에서

집은 담쟁이덩굴 속에 갇혀 있다. 고집이 센 덩굴은 스스로 손을 풀지 않는다. 덩굴은 담벼락을 옥죄며 더 깊이 뿌리를 묻는다. 나는 그때 그 담쟁이 속에 갇혀 있었다. 담쟁이는 날로 그늘을 넓히고 오래된 몸은 자주 삐걱거렸다. 낙심이란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바닥을 친 마음은 좀처럼 일어설 수 없었다. 나를 포기하고 나니 어느 날 그늘이 되어 있었다. 하릴없이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 가는 그때 이 시구詩句가 내게 왔다. 벽을 부수고 나오라고 했다. 덩굴을 걷어내는 일은 벽을 부수는 일, 생각을 깨뜨리지 않고는 나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를 붙잡고 늘어지던 덩굴손의 마디가 툭툭 끊어지고 벽 속에서 새로운 내가 태어났다. 나는 오랫동안 나에게 갇혀 있었다.

마종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
―― 이육사, 「절정」에서

뼈를 추리자니 한 뼈로 순수한(!) 저항 시인 이육사를 떠올렸는데, 예수보다 짧게 주기의 「절정」을 밝힌 그와 더불어, 썩지 않은 육질로도 발라 일컫자면 유약한 김영랑의 “찬란한 슬픔”이 김현승의 견고한 “절대고독”으로, 박노해의 유연한 “강철의 풀잎”으로 맥을 잇는 것이다.
자리끼가 얼어붙는 오막살이에서 “강철로 된 무지개”는 섬광처럼 번개치는 작렬로 미친 듯이 나를 솟구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1 때 나는 투쟁의 앞장에서 모든 부정한 봄(3·15)을 「절정」의 꽃(4·19) “무지개”로 터뜨렸던 것이다. 절대로 자랑일 수 없는 기름 뺀 당위로써.그 시대의 친일파나 다름없는 낭만적 낭인들에게 “시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 이른 유치환의 촌철살인도 자못 서릿발 같은 결기가 서린 “소리 없는 아우성”의 「깃발」로서, 그들의 핏맥은 오늘도 단단히 눈부신 다리로 질러 우리를 둥글게 감싸고 있다.

맹문재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 박노해, 「하늘」에서

나는 아직도 ‘밥줄’이라는 말에 가슴이 아리다. 밥줄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고 얼마나 세상 앞에서 허리를 굽실거렸던가. 내가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들어 있는 시들에 감동한 것도,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해진 신발 같은 인상으로 구걸하는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것도, 바닥에 드러누워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것도, 밥을 남기지 않고 악착같이 먹는 것도 밥줄 때문이다. 내가 문학의 지향점으로 삼는 근거이기도 하다. 밥줄을 쥐려고 몸부림쳤던 순간들,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밥줄의 운명에 당당히 맞서자. 밥줄을 쥐지 못한 사람들을 품자.

문인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새떼는 계절풍, 바람에게서 몸을 배웠다. 새떼는 일체다. 새떼 속의 새는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공중에 거구를 두는 일군의 세포, 세포다. 그것이 아니라면 군무는 없다. 산 너머 바다 건너 확신의 땅, 거기로 가는 길도 없다. 새떼는 바람을 입는다.어깨에 힘 빼고, 혀 꼬부리지도 않고 그저 한 마디 툭, 던진 이 말이 자주 날 들어올리곤 했다. 나는 늘 맥없이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으면서도 욕망은 왈칵, 저 새떼의 일원이었다. 그야말로 서러운, 저 ‘새떼에게로의 망명’이었다. 그렇게 곧 그 바닥을 뜨고 싶었다.
이 시를 낳게 한 80년대 상황에 관해선 나는 할 말 없다. 다만, 시인이 발견한 이 한 마디 말, 그 힘이 굉장해서 놀라웠다. 늦깎이, 내가 절망하고 분발한 첫 구절이다.

문정희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서정주,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에서

불행히도 나에게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는 없다. 나는 너무 어린 시절부터 시 애호가가 아니라 시 창조자가 되어버렸다. 눈부신 시구를 보면 감동과 전율보다는 질투에 온 입술이 파래지기 일쑤였다.
10대 때는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발레리의 시구와 함께 미당의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는 시구를 좋아했다. 그러나 후에 보니 미당에게는 황홀한 시구가 너무 많았다. “문열어라 꽃아”(「꽃밭의 독백」)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문둥이」) 등…… 나는 오늘도 기다린다. 내가 나를 전율시킬 한 줄의 시구를……

문태준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 이성복, 「아주 흐린 날의 기억」에서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이 출간된 1990년 5월에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내 기억으론 이 시집을 몇 차례 산 것 같다. 나눠준 것도 있고 분실한 것도 있는데, 내가 지금 소중하게 갖고 있는 시집은 휴가를 나왔다 화천에 있는 군부대로 복귀하면서 산 것이다. 동보서적에서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이 시집을 사서 군복 속에 감춰 넣고 부대 위병소를 통과했던 것 같다. 위병소에서 물품 검사를 했었고 또 시집 같은 것을 부대로 갖고 들어가기가 그때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시집을 또 군복 속에 감춰 넣어 주로 부대의 재래식 화장실에서 즐겨 읽었다. 검열을 피하느라 이 시집을 땅속에 몇 날을 묻어두기도 했다. 여름장마가 지나가던 때여서 나중에 땅을 열고 꺼내보니 흙물이 들었다. (사실 이 시집은 검열을 피해야 할 책은 아니었는데 나는 어쨌든 노루처럼 겁이 있었다.)
실탄사격을 하고 와서도 읽고, 행군을 마치고 와서도 읽었다. 강한 군대에 살면서 나는 여린 속잎 같은 이 시집을 꺼내 읽었다. 시 「아주 흐린 날의 기억」은 짧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이 시구를 읽으면서 나는 널 안에 매장된 나를 보았다. 막연하게 슬픔에 기대게 되었다. 군대 가서 나는 시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곳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시집을 읽다가 이 일구를 만났다.

박남철
“아, 참, 그리고 선생님, 벌써 한 두어 달 됐네요? 저, 요즘 회사 못 나가고 있습니다.” “왜에?” “저, 위암 수술했습니다.”
“요일아…… 너 지금 ‘위염’이라고 그랬니, ‘위암’이라고 그랬니?” “선생님, 저 ‘위암’ 수술했습니다.”
“……”
―― 2007년 8월 31일 저녁; 정병근 시인의 근황 때문에 해본 전화에서

흘러나온 김요일 시인의 육성시
갑자기,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내려서, 더 이상 말을 잇지도 못했었다. 어머님 타계 소식을 두어 달이나 지난 뒤에 법원에서 날아온 우편물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도 눈물은 나오지도 않았었건만……
지난 6월에 있었던 ‘시작문학상’ 뒤풀이에, 뒤늦게 참석해서는, 갑자기 뒤에서 나를 껴안고 볼을 부벼대면서, 처음으로, “사랑의 스킨십”을 다 표현해주었던 녀석이…… 고은경 시인은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지 두어 달만에 위를 들어내서 나를 절망케 해주더니, 너는 이제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니, 또 나를 절망케 해주는구나……

박제천
오오 견디련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 정지용, 「장수산」에서

한때 유엔 고지 밑에서 군생활을 하였다. 산으로 둘러싸여서 하늘이 손바닥만큼 보이는 분지였다. 어느 날 밤 동초를 서다가 정지용의 「장수산」이 떠올랐다. 그리고 누군가 내가 말해주듯 “오오 견디련다/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가 들려왔다. 그때나 이제나 시를 외지 못하는데 그냥 탄식처럼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마도 중학생 무렵에 읽었던 시, 그때는 그냥 그저 덤덤한 구절이 내 가슴 어디에 잠복되었다가 나타난 것이다. 이 시를 쓸 무렵의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했다 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40년 뒤, 또 이 구절이 떠오른다. 스무 살 무렵에는 비감하였다면, 늙마의 이제는 정신이 백골처럼 무심하여선가, 그냥 그저 무심한 내 자신에게 일러주는 말이 되었다.

박주택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백석의 시는 아련한 그리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고향 같기도 하고 꿈 속 같기도 하고 태반 같기도 한 백석 시를 읽고 있노라면 아득한 시간의 수염을 만지며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는 아내도 없고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부모며 동생들과도 떨어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을 헤매이다 가슴이 메여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괴여 오는 것을 적막하면서도 낮게 노래한다. 크고 높은 것을 생각하며 눈을 맞는 정한 갈매나무는 그러나 나의 가슴에 자라며 쌀랑쌀랑 생애의 문창을 친다.

박형준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 이성복, 「모래내·1978년」에서

내가 이성복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1982) 겨울이었다. 어느 날 인천 대한서림에서 계간 《세계의 문학》을 한 권 샀다. 페이지를 넘기다 김수영이 자기의 자화상 밑에 “시는 나의 닻(錨)이다’라고 써놓은 문장을 보고 석쇠에 올려진 생선구이처럼 온몸이 막대기로 관통당한 느낌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김수영의 자화상과 그의 단 한 문장에 이끌려 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인 이성복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는 김수영 때문에 이성복의 시에 빠졌고, 이성복이 김수영의 이름으로 상을 받은 덕분에 김수영의 시를 탐독했다. 한동안 《세계의 문학》에 실린 이성복의 대여섯 편의 시를 뜯어내 호치키스로 찍어 수업시간에도 읽고 집에 와서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위의 시구절을 통해 내 가족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박후기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박남수, 「새」에서

일곱 살, 글을 깨치면서 가장 먼저 읽은 시가 박남수의 「새」라는 작품이다. 문학청년이었던 큰형님이 솜씨 좋게 그림까지 곁들여 마루에 떡하니 걸어놓았으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냥 외워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시원찮은 발음으로 종알종알!
다시, 「새」를 생각한다. 한 덩이 납의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늘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 역할에 익숙해져 있는 나를 들여다보면, 참 우습다. 사랑이 떠나갔다. 납의 마음을 버리는 순간, 나는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로 남겨진다.

반칠환
비비새가 혼자서/앉아 있었다.
//(중략)
한참을 걸어가다/되돌아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앉아 있었다.
―― 박두진, 「돌아오는 길」에서

엄마 품에서 떨어진 꿩에병아리 같던 때였다. 귀 기울이면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던 적막한 산골이었다. 해종일 외딴집 홀로 지키다 집안에 뒹굴던 형아들 초등학교 국어책을 읽던 일곱 살 무렵이었다. “마을에서도/숲에서도/멀리 떨어진/논벌로 지나간/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던 ‘비비새’가 내 가슴으로 날아왔다. 젖은 손으로 피복이 벗겨진 전깃줄을 만진 듯하였다. 어린 속으로도 그렁그렁하여 중얼거렸다. ‘비비새도 혼자서 앉아 있구나.’ 머리 굵으며 나는 생각했다. ‘비비새가 혼자 있는 걸 아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시인이 되었다.

서규정
너는 살고
나는 죽고
이것으로 이번 생에서 우리는 비겼다
―― 최영철, 「아버지와 아들」에서

초등학교 무렵 우연히 읽은 《아리랑》이란 대중잡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구는 어린 심중에 말뜻은 몰라도 그 한 줄은 스물여덟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까지 주문처럼 따라다녔다. 현실은 늘 불안하고 불만스럽고 불순한 것처럼 느껴졌다. 시인들의 공적지평이란 생활의 역경과 고통을 주변부에 두었을 땐 중창단의 합창처럼 한번 부르고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각인인 것이다.
“너는 살고/나는 죽고//이것으로 이번 생에서 우리는 비겼다”
윌슨병 앓는 오십대 아버지가 윌슨병 앓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아들을 목졸라 죽였다는 처연한 단언이다. 위 시구가 아찔하고 아리고 섬뜩한 것은, 당뇨와 고혈압 거기다 신경계 질병을 앓는 팔십이 훌쩍 넘은 어미를 두고, 역시 수발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이 당뇨와 고혈압을 안고 있는 내가 잘못되어 먼저 떠난다면…… 가족을 베고 황산벌로 나서는 계백처럼 나는 틀림없이 분기탱천하겠지만, 하여 빛나는 시구는 아포리즘적인 사유를 내포하기도 하지만 결국 삶은 견성이고 발견인 것이다.

성찬경
백금처럼 빛나는 노년을 살자.
―― 구상, 「노경老境」에서

한국 현대시에 명시 명구도 많지만 문자 그대로 나를 벼락치듯 전율시키는 시구는 바로 이 구절이다. 이 시구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러하였지만 내가 노년이 된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다.백금은 무게가 나가는 귀금속 중의 귀금속이다. 황금보다 더 귀하다. 그러나 그 빛은 황금처럼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흰색이다. 노년의 은유로 이보다 더 들어맞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소리 높이 읊으며 아로새기는 것이다. 그렇다. 백금처럼 빛나는 노년을 살자!

손세실리아
여자는 함께 있으면 계집이 되고 헤어지면 어머니가 된다
―― 정진규, 「이별」에서

나는 아직 이보다 슬픈 시구를 본 적이 없다. 한때, 누군가의 ‘계집’이었으나 이제는 헤어져 ‘어머니’로 돌아간 ‘계집’의 비애가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시인의 별사別辭는 매정하기도 뭉클하기도 하다. ‘어머니’이기보다는 ‘계집’으로 남고 싶은 여자의 마지막 염원마저 꺾어버리는 단호한 이별통보인 까닭이다. 함께 있을 때 계집일지라도, 헤어지면 그 즉시 어머니가 되는 게 여자의 몸이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싶은 건지도 모를 일이겠다.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서로 다르다. 여하튼, 살아오면서 지금껏 ‘계집’일 뻔했던 시절 나라고 왜 없었겠는가. 이 한 줄 시구로 말미암아 ‘계집’과 ‘어머니’ 중 후자를 택했을 뿐.

손현숙
그 누구도, 하느님도 따로 한 봉지 챙겨 온전히 갖지 못한 하루가 갔다
―― 문인수, 「최첨단」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일 뿐이다. 어제의 당신이 오늘의 당신이 아니듯이,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이라는 말. 변치 않겠다는 맹세. 이런 것들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지나간다. 시간은 누구의 울 안에도 갇히는 법이 없다. 달이 해를 따라가듯 언제나 시작 안에는 끝이 존재하는 거다.
봐라! 시인은 하느님도 하루는 온전히 챙겨 갖지 못한다고 일갈한다. 그러나 그 하루는 목숨이 끝나지 않는 한은 또다시 싹트는 미물, 송곳 끝 같은 느낌으로 가고, 또 온다. 가난도, 부귀도, 사랑도. 오랜 백수白手가 빚어낸 시간의 철학! 해일이다. 지진이다. 쓰나미다.

송승환
싱그러운 거목巨木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 김종삼, 「풍경」에서

등단 전에 나에게 주어진 화두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이면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복합적 의미를 은연중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 화두가 제기된 것은 해안의 저녁 노을 때문이다. 노을은 왜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으면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안겨주는가, 라는 의문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진술과 묘사의 구분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노을의 아름다움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다시 읽은 김종삼의 시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내가 써야 할 시의 스타일과 그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송재학
새벽에 쫓아나가 빈 거리를 다 찾아도
그리운 것은 문이 되어 닫혀 있어라.
―― 고은, 「작은 노래」에서

스무 살 미만의 고 3짜리가 이 구절을 섬광으로 문득 만났다. 만상은 물질이다. 개념과 추상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만지고 구부리고 맛볼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이 된 것은 그 이후. 아마 처음 내 머리의 골통 물질에 들어왔던 희미한 자각은 범신론이거나 정령주의 주변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라고 생각한 것은 고은의 시선집 『부활』을 몇 번 거친 후였다. 범신론이나 정령주의는 신비적 세계관, 대상을 만지고 씹어먹고 뱃속에 오래 삼켰다가 다시 똥을 누려면 시적 대상은 지척지간 친밀한 물질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뻔뻔한 물질들! 비의 속에 자신을 자꾸 숨기는 시/물질은 철면피하기도 하다.

신달자
어느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 박목월, 「임」에서

천둥의 빗금이 내 가슴을 쫙 후비듯 금을 긋는 싯구는 결코 한 시인이나 한 구절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젊은날에 속절없이 시가 부풀어 올라 하루살이도 푹푹 빠지기만 했던 앳되고 물렀던 내 가슴에 쾅하고 천둥이 내려치던 시들 때문에 나는 각혈을 하지 않고서도 젊은날을 잘 보냈는지 모른다. 그 많은 시구 중에 만난 박목월의 시 「임」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혼절할 뻔하였다.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그것은 내가 무슨 백일기도 끝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선명한 이미지요, 손쉽게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무거운 의미의 밀착이었다. 언제 나는 저기에 닿을 수 있나! 그 충격은 지금도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다.

신대철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어서 너는 오너라」에서

어떤 기운이 갑자기 핏속을 흔들 때 나는 문득 시성을 느낀다. 그 시성은 물론 기발한 시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억누를 길 없는 죄악에 몸부림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에게서도 온다. 이젠 차가운 대기처럼 온몸을 스쳐가는 시 전체에 집중하지만 그 순간이 오면 끝없는 갈망과 끝없는 결핍이 하나로 뭉쳐져 나는 잠시 정신의 균형을 되찾는다. 사는 게 무엇인지, 신념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 나는 데마(디모데후서 4:10 참고)처럼 세상으로 나가 보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래 방황했다. 방황하는 곳이 그 어디든 밤마다 허공에서 푸른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길모퉁이에서 불안스레 듣던, 저 맑고 뜨겁고 목 타는 울림, “어서 너는 오너라”.

심재휘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에서

윤동주 시의 이 구절은 나에게 벼락처럼 왔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시는 평범했고 안이했다.그리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시를 쓰는 일은 시를 읽는 일과 같거나 달랐다. 가장 고통스럽게 정직할 때 최고의 절창이 나온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진짜 부끄러워할 수 있는 사소한 능력은 시 쓰기의 전부가 되었다.
“최후의 나”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언젠가부터 이 너무나 평범한 구절이 나에게 벼락이 되었고, 시를 쓸 때마다 갈수록 더 강한 벼락을 치고 한다. 잘 보면 ‘부끄러운’이라는 말에 피가 비친다.

안도현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을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30년대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사내는 백석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듯하다.

오탁번
눈보라는 꿀벌 떼처럼
닝닝거리고 설레는데,
어느 마을에서는 홍역紅疫이 척촉??처럼 난만爛漫하다
―― 정지용, 「홍역」에서

정지용이야말로 한국 현대시사의 본문本文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시답잖게 읽는 시러배들이야 알 수 없겠지만, 우리 말의 영혼에 가슴 저려본 이는 아무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내가 현대시를 전공하면서 딱 맞닥뜨린 시인이 정지용인데 그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형벌과도 같았다.
<눈보라-꿀벌떼>와 <홍역-철쭉(척촉)>으로 벼락치듯 섬광을 일으키는 언어의 막강한 힘은 쓰나미와도 같고 화산과도 같고, 내 운명의 바늘을 홱 돌려놓고는 무명無明 저편에 숨어서 ‘용용 죽겠지’ 나를 울리는 시의 여신의 잉걸불보다 뜨거운 젖꼭지와도 같다.

유안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김소월, 「초혼」에서

시인 아닌 아무것도 안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중학생 적에는, 하교길 오뉴월 땡볕을 이고 걸으면서도 구르몽의 시구였던가 “시몽, 너는 좋아하니 낙엽 밟는 소리를” 이 구절이 알사탕처럼 입안에 굴러다니곤 했는데, 대전시를 가로지르는 목척교를 건널 때는 영락없이 입 속에서 굴러다니는 구절은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흐르네”였다고 기억되는데― 그 맹목과 무지와 순백의 백지 같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해서 소월의 「초혼招魂」과 마주치게 되었던가? 분명하게 기억되진 않지만, 소월의 「산유화」에서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를 두고 계절의 순서가 바뀐 까닭을 질문했다가 문예반 선생님께 망신을 당하고, 「산」이라는 시에서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에서 “산새도”의 “도”와, 왜 하필 “오리나무”였을까를 혼자 곰곰 생각하던 때와 거의 같은 때였을라?!
소월에 미쳤던 여중학생은 「초혼」을 만나자마자 까무라칠 것만 같았지. 부르다가 죽어도 좋을 이름 하나를 갖고 싶었고, 나에게도 내 이름을 부르다 죽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소원했지.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붉은 피가 솟구치는 이 뜨거운 한 구절로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기로 혼자서 약속하고 굳게굳게 맹세했는데― 성적이 올라가자 스스로 그 맹세를 깨뜨려버렸지만.

유영금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 최승자, 「오 모든 것이 끝났으면」에서

내가 나를!!, 찔러 죽이거나 목을 매달아 죽이거나 청산가리를 먹여 죽이거나 가스를 마시게 해 죽이거나 총으로 두개골을 쏴 죽이거나 달리는 열차 바퀴에 던져 죽이거나 고층건물 위에서 떨어뜨려 죽이거나 손목의 동맥을 잘라 죽이거나 신나를 뿌려 태워 죽이거나… 그 중 빠르게 죽여 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선택 때문에 분열에 시달리던 오래 전의 내게 최승자의 시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는 내가 죽음에 성공한 것처럼 황홀했다. 실패에 짓밟혀 구차스러운 숨을 끌고 가고 있지만 벼락같이 섬뜩한 이 시구는, 눈을 떠야만 하는 매일 아침의 나를 희망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다. 누군가 나를 죽여 버리는 것이 더 빠르다.

유홍준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린다
―― 문인수,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린다」에서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고 할 무렵의 문인수는 한동안 내 텍스트였다. 글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문인수의 『뿔』이라고 하는 시집을 나는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내 안목이 그랬다. 그러니까 아직 늦깎이 시인 문인수가 뜨기(?) 전의 일이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문인수는 나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것, 묘한 정서적 일체감이었다. 하여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좌우지간 쓸데없는 말 필요 없고, 언제 시인과 매운 고추 다대기 왕창 푼 순대국밥이나 한 그릇 했으면 좋겠다.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리는 것처럼,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처럼, 겸상을 해 보았는데 문인수와 나에게 짜고 독하고 매운 것은 속이 다 시원한 것이다. 역설이다. 하여간……

이가림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정지용, 「고향」에서

지금으로부터 45~6년 전, 그러니까 내가 전주고교에 다니던 시절, 국어를 가르치시던 신석정 선생으로부터 처음으로 정지용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당시 월북시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탓에, 정○○으로 부르며 금기시했음에도, 석정 선생께서는 수업시간 중에 「유리창」,「고향」,「바다」 같은 작품을 받아쓰게 했다. 특히 「고향」에 나오는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이란 구절은 그때 이래 “바람 먹고 구름똥 싸는” 방랑아의 꿈을 늘 내 가슴에 심어주는 벅찬 출발의 신호가 되었다. 내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답시고 파리를 어슬렁거린 것도, 최소한 5년 주기로 이국땅을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도 다 이런 낭만적 역마살의 노래를 좋아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 번 고향을 떠난 자는 항상 이곳이 아닌 저 먼 미지의 나라에 마음을 빼앗기기 마련인가 보다.

이건청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의 제목이 되어 있기도 하고 곡진하기 이를 데 없는 절창,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시를 읽다가 보면 공들여 힘들게 쓴 흔적이 나타나 있는 시가 있기도 하고, 시인의 내면에서 충분히 무르익어 저절로 흘러나온 듯하면서도 치밀한 구조를 이룬 시를 만날 수도 있다. 나는 물론, 뒤의 경우의 시를 훨씬 윗질로 보는 사람이다.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자신의 심적 정황을 ‘저물녘 노을 속으로 흘러가는 강물’로 치환하면서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으로 슬픔의 깊이를 인식해내고 있으며, “첫사랑 산골물소리”가 “사랑 끝 울음”을 거쳐 “미칠 일 하나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정서의 고양 과정을 치밀하게 끌어 담고 있다. 이렇게, 격정의 정서를 모두 포용하고 있으면서도 ‘소리 죽은 가을 강’이 되어 흘러간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그런 심회의 절정에서 만나게 되는 진한 감동의 언어이다.

이근배
나는 지낸 밤 꿈속의 네 눈썹이 무거워 그걸로 여기 한 채의 절간을 지어 두고 가려 하느니
―― 서정주, 「기인 여행가」에서

영혼의 작은 숨결도 그려낼 수 있는 내 어머니의 나랏말씀은 어떻게 짚어 내야 시가 되는가?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서정주 선생을 먼저 머리에 떠올린다. 해묵은 것이려니 하고 오래 덮어두었다가도 여기저기 자주 들춰지는 미당 시에 눈이 가면 내 머릿속은 회오리바람이 분다. 첩첩한 미당 시의 산맥 어디를 기웃거려도 마치 신들린 듯이 쏟아내는 낱말 하나 시구 하나에 내가 가진 말들은 삽시간에 꼬리를 감춘다.
미당이 시 속에 감추고 있는 ‘눈썹’은 우리 시문학사의 화두가 되고 있다. 「수대동시」(1941) 「동천」(1966) 「추석」(1966) 등에 나오는 ‘눈썹’의 절정은 아무래도 이 「기인 여행가」에서 보게 된다. 미당에게 있어 ‘눈썹’은 우주만큼이나 크고 영원한 사랑의 표상이다. 꿈 속에서 만난 ‘눈썹’으로 절간을 세웠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사랑의 공양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지금 그 절간의 풍경소리가 자꾸 귀속에서 울리는 것을 듣고 있다.

이대흠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그날」에서

“내가 없었을 때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오래도록 세상은 젓갈처럼 깊어가고 나는 아무런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고, 한 나라를 이루지도 못했다. 지네인 듯 발이 많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고, 처음보다 부피만 더 커진 몸뚱이로 나는 외길에 서 있”었다. (졸시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에서 인용) 짐승들은 제 입으로 짐승이라 하지 않았고, 피 묻은 입을 다른 피로 닦았다. 미친 자들이 지배하였으므로 미치지 않는 자가 미친 것처럼 보였던 1980년대. 극약을 가지고 다녔지만, 순교할 기회조차 없었다. 미친개가 미친개를 물어 모두 미쳐갔던,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던,

이동순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백석, 「모닥불」에서

1980년대 초반, 그 엄혹하던 시절에 나는 이름이 낯선 한 시인의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 백석白石, 우리 문학사에서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특이한 존재였다. 하지만 뒤에 알고 보니 이미 1930년대의 찬란한 별이었다. 분단의 폭풍 속에서 가랑잎처럼 흩어진 그분의 작품을 하나 둘 모으고 정리하던 중 시 「모닥불」과 만나게 되었는데, 내 가슴 속은 그야말로 번개가 치는 듯 수백만 볼트에 감전이 된 듯 무서운 전율이 왔다. 모닥불 속에서 우리 민족사의 상처와 불구성을 읽어내다니…… 나는 미친 듯이 백석의 작품을 모았고, 마침내 분단 이후 최초로 한 권의 전집을 발간하였다. 이제 그분의 문학은 우리 문학사에서 당당한 위상으로 복원되었다. 백석과의 만남은 나의 감격이었고, 나의 행운이었으며, 이젠 나의 자부심으로 살아 있다.

이병률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러러진다
―― 백석, 「조당?塘에서」에서

이상하다. 아직도 따뜻한 것에 연연해함은, 밋밋하게 편편하게 살아도 살아지는 세상에 자꾸 목 뒤에 뭔가가 켕긴 것이 있는 사람처럼 따뜻한 것을 찾아 자꾸 뒤돌아보게 됨은 부끄럽기조차 하다. 그래도 이 한 줄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다 보면 나아진다. 목욕이라도 한 기분이 된다. 삶을, 인생을 저리 순연하게 ‘우러러’볼 수 있다니 백석은 참 인간으로서도 잘 살았다 싶다. 이 땅의 전부를 담고 있으며 한 생의 궁극을 집어낸 이 한없이 느리고 미쁘며 태연하고도 갸륵한 한 줄이여. 나는 이 한 줄이 참으로 애틋하고 뜨겁다.

이선영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 김수영, 「거미」에서

‘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또한 얼마나 절절하기에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그러다 ‘까맣게 몸이 타 버’린 김수영의 ‘거미’는 이후 내 뇌리에 각인된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였다. 본시 거미에 대해 생명으로서의 한치의 외경심이나 일말의 연민조차 가져본 적이 없던 나에게 김수영의 ‘거미’는 그대로 섬광 같은 시인의 실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시인의 길을 가려던 나의 실존에 대한 섬뜩한 예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성부
먼 길에 올 제
호을로 되어 외로울 제
푸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 김현승, 「푸라타나스」에서

열여섯 살의 여드름 투성이였던 소년에게 이 시구는 충격이라기보다 큰 그리움의 하나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먼 길’과 ‘외로움’의 실체가 눈에 선하게 잡혀지는 것 같았다. 집을 떠나 어디론가로 가고 싶다는 여행에의 욕망, 그 여로에서 터득하게 될 고독의 본질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는데, 세계와 삶에 대한 어떤 각성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정지된 나무가 하나의 영혼으로, 그리고 한 고독한 인간을 고독하지 않게 위무하는 손길로 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수명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 이상, 「꽃나무」에서

이것을 읽었을 때, 시가 무엇인지 알았던 것 같다. 욕망과 함께 욕망의 불가능함을 말이다. 시는 이 불가능으로 시작된다.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는 또 다른 자아일까, 타자일까. 이상은 양자가 하나가 되는 어느 지점이 시의 뇌관임을 보여준다. 시인들은 안에, 혹은 밖에 꽃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겠지만.
그곳에 “갈 수 없”다는 것, 거리감을 직관하는 것이 시이다. 그것을 채우는 것이 시이고, 또 내버려두는 것이 시이다. 나는 시의 이러한 운명을 사랑한다. 시는 “갈 수 없”음으로 도달하기 때문이다.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수익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 서정주, 「화사花蛇」에서

서정주 초기 시편의 휘황한 원초적 생명력은 나의 10대 문학소년 시절을 뜨거운 피로 세례하였다. 그 중에서도 원죄의 달콤한 유혹과 관능을 징그러운 배암으로 육화시킨 「화사花蛇」는 언제나 그 절정에서 나를 숨가쁘게 조여 왔다. 내 몸 안의 피의 유전자와 상통하는 ‘어떤 무엇’이 있었음이 틀림없었으리라. 특히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라는 구절에 이르면 나는 늘 숨막히는 희열을 전신으로 감싸 안곤 했다. 그런 내면적 뜨거움이 이후 나의 시에서 피, 절정, 죽음, 황홀, 비애 등의 언어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승하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자화상」에서

미당은 23세 되던 해 가을에 「자화상」을 썼다. 나는 바로 그 나이에 미당 선생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스승은 호되게 꾸중을 하셨다. “이건 시가 아닐세!”라고. “이런 시는 앞으로 쓰지 말게!”라고. 스승의 시 수십 편을 이마 위에 얹고 있던 나는 스승의 몰인정에 학교 앞 주점 왕개미집에서 오랜 날을 살았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전시 체제로 바뀌어 가던 1937년, 스승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간질병 환자인 양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나 역시도 1982, 83년 그 언저리에서 분신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치를 떨고 있었다. 시대가 참으로 어두웠기에, 스승의 말마따나,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을 남몰래 꿈꾸며 시를 쓰고 있었다. 스승은 말더듬이 환자였던 나의 자화상인 「화가 뭉크와 함께」를 등단작으로 뽑아주셨다. 스승의 파안대소가 미치도록 듣고 싶은 2007년 9월의 어느 아침이다.

이승훈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 이상, 「아침」에서

고교 시절 처음 이상의 시를 읽고 충격을 받는다. 세상에 이런 시가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이런 시인과 만난 것도 충격이다. 그가 노래하는 병든 내면은 당시의 나의 내면이고 그 후 나는 이상의 정신적 가족이 된다. 그는 폐결핵으로 시달리는 밤을 노래하고 이런 밤은 당시의 어둡던 가정, 나약한 감성, 우울한 사춘기의 은유가 된다.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결국 고독한 체념과 말라버린 사유와 초췌한 감성이 있을 뿐이다. 사는 건 병드는 것. 그렇게 고교 시절을 보냈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이런 밤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 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오규원, 「버스정거장에서」에서

1987년 3월 서울예대 문창과에 들어갔고, 1987년 10월 명동의 서점에서 오규원 선생님의 새 시집을 샀다. 「버스정거장에서」의 첫 구절인, 이 시구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습작을 하던 1991년, 밥그릇을 소재로 시를 쓰게 되었다. 이런 것도 시가 되나요, 하고 여쭈었다. 이 세상에 시 아닌 것은 없다. 네가 쓰는 모든 것이 시다, 오규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 순간 즉각적으로 이 시구가 다시 떠올랐고, 이 시구를 처음 보았을 때 무너져 내렸던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짐짓 태연해 보이는 이 진술은 내가 시에 대해, 삶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한 번에 무너뜨렸던 것이다(내가 안다고 믿고 있던 것들은 내가 가장 모르는 것들이었다).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시다, 언어도 삶도 벼랑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나는 언어가, 삶이 균형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이 시구를 붙잡고 날아오르며 벼랑을 만든다.

이유경
내 너를 찾아 왔다.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 서정주, 「부활」에서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은 아니지만, 최초로 나를 감동시킨 시 한 구절은 서정주의 「부활」의 도입부였다. 이 시를 처음 대한 것은 고교에 입학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한답시고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공저의 『시창작법』(1954)이란 책을 사 읽으면서였다. 미당의 <일종의 자작시 해설―「부활」에 대하여>란 글에 시 전문이 실려 있었다.
열여섯 일곱의 사춘기를 갓 지난 나의 감성에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는 황홀한 사랑의 풍경을 전개해 주던 것이었다. 슬프고 쉬운 시였기에 감동이 더했던 모양이다. 훗날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 나는 술에 취하면 노래 대신 이 시 전문을 소리쳐 외곤 했다.

이윤학
아침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씩씩하고 활기차게 ‘필승’ 또 ‘필승’/경례를 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 인사를 하십니까//
네, 저기 있는 까치를 보고 인사합니다/필승!
―― 정용주, 「필승」 전문

3,4년 전 이 시를 처음 읽게 되었다. 한 남자가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놓고 까치가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부동자세로 까치가 날아올 나무를 아니면 지붕을 또는 전봇대를 힘주어 바라보았다. 왜 반드시 이겨야 하나, 왜 반드시 이겨야 하나, 왜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되나? 씩씩하고 활기차게 ‘필승’ 또 ‘필승’을 외치지 않으면 안 되나? 왜 하필 까치에게, ‘필승’ 또 ‘필승’ 경례를 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나?
처음에는 화자 자신에게 퍼붓는 ‘냉소冷笑’로 읽히더니, 종내는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 암시暗示로 옮겨갔다. 까치를 보면 이 시가 생각나더니, 나무나 지붕이나 전봇대만 봐도 ‘필승必勝’이 들려왔다. “……오직 하나, 나는 나 자신에게 승리했을 뿐이다.” 김산 평전에서 읽은 구절과 함께.

이윤훈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이 시는 젊다.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신선한 감각이 살아나 시의 자장을 잃지 않고 있다. 이 시 속에서는 야사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아련하다. 극도로 절제된 감정과 섬세한 감각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시의 공간이 있다. 그 속에 고양이로 현현된 생생한 봄을 만난다.나른한 아침 봄볕 속 이 시를 진언처럼 읊조리면 이 시와 내 시의 한 접점에서 모를 새 한 마리 고양이로 변한 나를 발견한다

 

이재무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 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 김수영, 「강가에서」에서

지금 읽어보면 지극히 평범한 진술이다. 하지만 30년 전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물 묻은 손으로 전선을 만진 듯 전율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이 시가 김수영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보이고 있듯이(일테면 「거대한 뿌리」 「성」 같은 시편들) 시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크게 위반했기 때문이다. 시라면 응당 고상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우아해야 한다는 고루한 생각에 갇혀 있던 내게 그의 시편들 속의, 정도를 넘어선 과감한 시적 표현들(비속어, 욕설 등 일상 언어의 과감한 창조적 차용)은 당혹감을 넘어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복과 위반의 진술들은 막힌 것이 확 터지는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제도와 이념의 금기를 훌쩍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고투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의 발견과 개진에 뒤따른 기법과 표현에서의 그의 이러한 과격한 도전과 실험이 있었기에 우리 현대시는 그만큼 영토를 실질적으로 확장해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정록
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 이상국, 「어둠」 전문

가장 최근에 친 벼락이다.
봄이 되면, 나무는 깜깜한 어둠을 딛고 새싹을 밀어 올릴 것이다. 맨 처음, 씨앗 속의 어둠을 송두리째 끌어올려 초록지붕을 지었듯이, 다시 초록의 일주문 하나 세울 것이다. 발밑 어둠의 실뿌리를 더 깊게 박을 것이다. 잘려나간 그루터기의 겹눈, 칠흑 중의 칠흑은 발밑 어둠이다. 발바닥에 눈을 달고 세상을 읽자. 똥독에 빠진 쥐의 눈이 가장 반짝인다. 연필심은 종이보다 깜깜하다. 어둠의 핵에서 글이 나온다.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이 가장 어둡다. 새벽 일찍 쌀을 안치던 어두운 솥단지, 깜깜하기에 쌀보리는 더욱 희게 눈뜬다.

이진명
몸은 왜 있을까
―― 김정환, 미상

김정환 시인의 시 구절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장을 뒤졌으나 80년대에 읽으며 줄쳐 놨던 옛 시집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한테 문의하였지만 이 시구가 있는 시집과 시의 제목을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채로 이 시구를 만났을 때의 나를 불러보련다. 데뷔 이후 1992년 첫시집을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정환 시인께 부쳤다. “몸은 왜 있을까” 오직 이 한 구절을 허락도 없이 품고 있었던 오랜 빚을 갚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아아, 탄식의 수긍을 몸을 궁글리며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몸은 왜 있을까”. 모든 오욕칠정과 생로병사와 살아 있다고 들고나는 이 물질적 숨의 현재, 이런 모욕이, 이런 치욕이 어디 다시 있을 수 있을까.

그때 내 나이 삼십 중반. 무슨 제1의 대문짝이라도 되는 양 모가지 위에 얼굴을 올리고, 걸음 같지도 않는 걸음을 끌며 길거리를 헤매고 직장으로 십수 년을 흘러다녔다. 왜 이토록 피로하게 밥을 벌어야 하는지 돈을 벌어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는 채. 그런데 답이 온 것이다. 몸은 왜 있을까, 질문이며 답인 이 시구를 받아올리자, 온 세월의 체증이 슬픔도 없이 녹아내리며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두 손 받쳐 지심으로 풀어 내리는 나를 보았다. 이 지난한 밥벌이의 되풀이가 똥 닦을 두루마리 화장지(세상 어디에 똥 닦을 휴지 하나를 거저 주는 데 있으랴) 한 뭉치를 사기 위해서라고 겨우 깨닫게 되자 화장실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 그날 오후의 나머지 일을 고요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 탄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러 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에서

정지용의 시 「유리창」의 끝연 10째줄이다. 이 시의 “산ㅅ새처럼 날러 갔구나”처럼 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사라진 정황을 볼 수 있다.이 시는 정지용이 죽은 아이를 보고 지었다고 한다. 9째줄의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만 보더라도 불길한 상징이 잘 되어 있다. 정지용은 시를 지을 때 아무리 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한다.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일까.
“날러 갔구나!” 이 한 구절이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맺히게 된 것은 내가 1960년대에 《새소년》 잡지를 만들 때부터였다. 잡지 《새소년》이 잘 나갈 때 마음 속에서 부정을 타서 《새소년》이 안 팔리면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은 우려와 함께 “날러 갔구나!”와 같은 암시는 항상 내 마음을 불안케 했다. 새시대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암시해준 시구였다.

이태수
저 금박金箔 바람,
저린, 낯선, 눈부신…
―― 황동규, 「사라지는 마을」에서

우울하게 헤매면서 시에 이끌려 다니던 문학청년 시절, 유치환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그리움」)라는 ‘절규’에 빠져들곤 했다. 현실과 꿈의 동떨어짐, 방황과 갈등 때문이었다. 그 뒤 박목월의 빼어난 언어감각과 조지훈의 의젓한 지사적 풍모에 매료되고, 김춘수와 황동규를 가까이 느끼게 됐다. 스승인 김춘수의 ‘꽃’을 노래한 시편들, 서정의 옷을 입은 그 인식론(또는 존재론)의 세계는 매력적이었다.
이어 황동규의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시편들은 부러움과 극복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황동규는 여전히 저만큼 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감들이 황금빛 불을 켜고 있으며 그 금박 바람이 “저린, 낯선, 눈부신…”으로 읽는 그 황홀하고 서늘한 정신의 불빛이 전율을 안겨주고 있는 것 같다.

이하석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이 시구는 ‘한심하게 어둡고 쓸쓸했던’ 고등학생 시절에 ‘문득 내게 왔다’. 참 많이도 이 시구를 중얼중얼대며 다녔다. “시의 언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예이츠의 말마따나 이 구절은 한용운이 살았던 삶의 한복판에서 필연적인 목소리로 나타났다고 믿으면서. “그래, 재는 불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지. 그건 다시 타오를 수 있는 것. 마치 이별이 끝이 아니라 만남의 시작인 것처럼 말이다”라고 믿으면서. 이 놀라운 전환, 끊임없는 부정으로 인해 열리는 큰 긍정의 꿈의 실현의지야말로 ‘한심하게 어둡고 쓸쓸했던’ 나를 밀어올리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장석남
산山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김소월, 「산유화」에서

미인이 좋은 건 그저 좋은 것이지 까닭이 있지 않다. 늘 명확한 그 사실 앞에 엉뚱한 까닭들을 늘어놓는다. 좋은 시가 왜 좋으냐고 하면 어떠한 답이 나와도 그 시가 가지고 있는 함량에 미달인 채로 구차하다.
뼈가 굳기 전부터 이 시가 좋았다면 거짓일 공산이 크다. 확실히 이 시는 천재의 산물보다는 달관의 산물이다. 이십대 후반쯤일까 이 시가 막 쳐들어왔다. 좋은 시는 막 달려 들어오는 것이다. 저 꽃은 하나의 절간이기도 하고 백골이기도 하다. 때로는 남모르는 연애이기도 하고 도피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다. 흔히 도피를 현실 망각의 행태로 간주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다. 예술이 현실 도피라는 걸 모르는 탓이다. 도피가 아니라 초월이라고 하면 책망에서 면할까? ‘저만치’ 피어 있으니 목마름이요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늘, 궁극적으로는 저만치 혼자서 피다 지고 싶었다. 다시 구차하다!

장석원
날아간 제비와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反逆의 정신//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시를 반역한 죄로/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김수영, 「구름의 파수병」에서

여름의 산정에 삐쩍 마른 해골이 있다. 겨울 설산이 보낸 엄혹한 마른 바람이 보인다. 뽀개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온다.시가 두려워질 때마다 김수영을 읽는다. 비애의 정점에 다다른 시인을 본다. 그의 얼굴은 구름에 먹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곧 산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그는 다시 시를 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반역할 것이다.‘가장 높은 정신’(조정권)의 거처, 산정에 서 있는 반역자, 시인. 그의 정신과 구름의 방향.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디로든 가야 한다.청빈과 쓸쓸함이 노래가 되는 순간. 이 염결성이 시인을 지키는 도덕이라는 것을 안다. 사랑의 끝이 보인다. 고요하다.

장석주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 김수영, 「비」에서

이 시구가 마음에 화살처럼 꽂혔다. 시인은 제 아내에게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놀라워라, “움직이는 비애”라니! 비와 비애의 음가音價가 겹쳐지며 한 순간에 눈이 번쩍 뜨인다. 비의 운동역학에 “비애”를 슬쩍 얹는 솜씨라니 ! 비애에 비의 운동성이 합쳐짐으로써 돌연 비애의 동학動學이 발생한다. 김수영은 아무런 운동성을 갖지 않은 정적인 것에 비의 운동성, 비의 속도를 부여한다. 대상적으로 존재하던 “비”라는 사물은 돌연 경계를 넘어 “움직이는 비애”라는 현존을 품는다.
시인은 음과 양이 하나로 포개지듯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하나로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때 움직이는 “비”는 움직이지 않는 “비애”를 품고 떨어지는 그 무엇으로, “비”라는 보편다수의 존재자에서 “움직이는 비애”라는 일자, 혹은 초월자로, 그리고 세계의 중심이 사물에서 사건으로 옮겨 간다.

장인수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시라는 놈이 나에게 기습한 경로는 아주 평범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은 교과서에 시가 나오면 무조건 외우라고 하셨다. 지금도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수십 편의 시를 달달 암송하고 있는 것은 그 분 덕분이다. 달달 외우기 위해서는 밥 먹다가도, 똥 싸다가도,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면서도 혀에 가시가 돋도록 연습해야 한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를 암송하면서 “수직垂直의 파문波紋”,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라는 글귀가 서서히, 자꾸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게 시는 내게 엄습했다. 처음 읽을 때에는 싱겁거나 무덤덤했던 글귀였는데 어느 날 하루 종일 입술에 붙어서 팔딱이더니 전압이 세지면서 번개가 치고 온몸의 혈류가 범람하는 전율을 받게 된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수천만 개가 새우 떼처럼 튀었다. 그 이후 장석주의 시편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전윤호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 이건청, 「폐광촌을 지나며」에서

이 나라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나던 동네에서 자라며 광부의 아이들과 학교를 다니고 검은 산과 검은 강을 보며 자란 나였지만 나도 몰랐다. 고래를 잡으려면 동해바다로 가야 하는 줄 알면서 살았다. 내 친구가 고한초등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가끔 도박에 미친 놈들이 손을 끌고 올라가 카지노를 찾을 때도 나는 몰랐다. 그곳에 고래가 있는지, 그곳에 있는 고래를 누군가 보고 있는지. 가끔은 내가 뭔가를 놓고 사는 게 아닐까 하는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시를 읽으면 그렇다. 시인은 내 척추를 지나 심장으로 파고든다. 이젠 나도 고래를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정끝별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내 스무 살의 ‘그 어떤 포스와 비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 스무 살 무렵, 학관의 전용(!) 화장실 벽에는 “님은 갔습니다. 지가 갔습니다. 그놈은 붙잡아도 갈 놈이었습니다”가 새겨져 있었다. 읽고 또 읽었으리라. 역시 그 무렵, 일요일의 나는 교회를 들락거렸고, 일요일을 뺀 허구헌날의 오전은 시와 사회과학을 한답시고 써클룸을 들락거렸고, 나머지 허구헌날의 오후는 술집을 들락거렸다. 시에 울고 사람에 울고 신에 울고 최루탄에 울고 술에 울었다. 초월과 역사와 현실 사이를 들락거리며 징징징 울던 그 무렵,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구절은 얼마나 비장한 ‘포스’를 내뿜었던가. 얼마나 확고한 ‘비전’이었던가. 당신만 당신이 아니라 기리운 것이 다 당신이라는데……

정병근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 김수영, 「눈」에서

기침을 하자고?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시인이 폐병쟁이인 줄 알았다. 마른 얼굴에 유난히 퀭한 눈을 가진 시인의 사진을 보면서 나도 기침을 하고 싶었다. ‘기침’은 살아 있고자 하는 자유의 분명한 언표임을, ‘눈雪’과 ‘눈目’이 다르지 않음을 지나오면서 더 절절히 공감하게 되었지만. 나는 기침을 자주 했다. 새벽녘 기침소리로 할아버지는 그 높은 존재를 알렸고, 아버지는 헛기침 끝에 우리를 나무랐다. 할 말이 없을 땐 자꾸 기침이 나왔다. 침묵이 나를 가로막을수록 기침은 더 날카롭게, 더 깊이 내장되었다.
기침은, 타성과 혼곤의 등짝을 후려치는 나 스스로의 죽비이면서 부조리와 억압에 항거하는 ‘한소리’일 것이다. 보라는 듯이. 들으라는 듯이. 하여, 기침은 지금도 저 희고雪, 퀭한目 ‘눈’과 함께 여태껏 내 폐부 속에 칼날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정일근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
―― 김명인, 「동두천 2」에서

시인이 되고 국어선생이 되어 김명인 시인의 처녀시집 『동두천』을 다시 읽었다. 그 시절 나는 주당 45시간의 수업을 하는 교육노동자였고, 교실에서 교실을 떠도는 유목민이었다. 야학선생을 오래 한 나는 야학과 다른 분위기인 제도교육의 폭력에 가까운, 불합리한 제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필사를 하며 공부를 한 시집 『동두천』을 다시 읽으며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란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그때까지 나는 미래의 ‘별’인 학생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주장자처럼 나를 쳤다. 단지 분노에 차, 별을 보지 못한 나에게 별을 보게 만든 그 한 구절 덕분에 나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 연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그 연작시가 내 처녀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정재학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폐벽에 끌음이 앉는다.
―― 이상, 「아침」에서

폐병을 앓았던 시인의 재미있는 구절이다. 결국 폐결핵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잃었지만 이상에게 폐병으로 인한 고통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는 찾을 수가 없다. 과거로부터, 앞으로도 시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있겠지만 이상은 ‘시는 결국 이미지이며 유희’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듯하다. 그것이 1930년대 시인들 중 그가 고립적인, 독자적인 위치를 갖는 이유일 것이다. 삶 혹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진정성의 척도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답답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시인은 스스로 환자이자 의사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안목을 가진 시인이라면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이상은 보여주었다. ‘시에서의 진정성’과 ‘시에 대한 진정성’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 둘의 사이가 그리 먼 것은 아닐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잠입자(Stalker)>에 나오는 어느 대사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잘 요약해 주는 것 같아 말미로 대신한다.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아. 그래서 더욱 잊혀지지가 않아.”

정진규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동천冬天」 전문

1연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전문을 다 옮길 도리밖에 없다. 이미 분석이 완벽하게 끝나 있는 시랄 수 있겠으나, 오히려 오독誤讀이 내게는 정독正讀이 된 경우가 많다. 그만큼 벼락으로 다가왔다는 이야기다. 이 시도 내게는 그런 범주에 속하는 시가 아닌가 한다. 이 시의 벼락의 정체는 마지막 쉼표(,)다. 이토록 호흡(리듬)과 의미와 리듬에 모두 걸려 영향하고 있는 부호를 나는 여기서 처음 만났다. 마침표로 마감하면 이 시는 형식상의 리듬이 단절되고 산문적인 설명이 되어버린다. 꿈으로 맑게 씻는 이미지의 행위도 불가능해진다. 눈썹의 의미도 사실로 끝나고야 만다. 일거에 하나의 사물(반달)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개벽開闢이 벼락으로 왔다.

조말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 윤동주, 「길」에서

열일곱 살 때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가 도로道路로 질주疾走하’(이상)느라 막다른 골목이 좋았고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도 좋았다. 재미없는 교과서 속에서 이상은 이상해서 좋았다. 그는 열둘이라는 딱 맞춤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에게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했다. 많은 제십삼 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항상 줄을 잘 서는 학생에게 도주하기 좋은 막다른 골목은 쾌감이기에 충분했다. 윤동주는 너무 반성적이어서 거리를 두었다. 좀 쓸쓸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너무 정직했다. 그래서 얼마 전 드라마 자막에 떠오른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는 신선했다. 그것은 반성적이었으나 막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한창 길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아침에도 걸었고 저녁에도 걸었다. 그것은 막다른 길이었으나 아스라이 멀어서 내가 걸어가고 걸어오는 길이 한없이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조정권
지난 여름은
줄곧 난행亂行만 당하고
겨우 한 줄의 시를 써서 수습하고…‥
빈자貧者로다. 빈자로다. 나 이 땅의 일등 가는 빈자로다.”
―― 정진규, 「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에서

젊은 시절 내가 외우고 다닌 구절이다. 이 시의 빈취貧臭를 좋아했다. 그와 나는 한동네에서 살았다. 거나해지면 그 앞에서 나는 이 시를 낭송했다. 아름다웠던 시절이다. 한국 가톨릭의 빈승貧僧 구상도 그의 시엔 쇠락성이 있다고 말했다. 시에 매달려 있음의 세상! 우리가 추구했던 순수시의 빈취성貧臭性에는 상처받을 수 없는 순결과 도도한 처녀성이 자만심으로 살아 있었다. 누가 일등 가는 빈자라 자부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빈자로 남는다. 시인은 상처받을 뿐 훼손되지 않는다.

조창환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 이형기, 「황혼」에서

어느 위대한 영웅의 비장한 죽음과 그 자리에 흥건하게 흘러넘친 피를 연상시키는 황혼의 짙붉은 색감은 극한에 다다른 순수의 모습이다. 피와 죽음의 장면에 배음背音처럼 깔리는 절대침묵을 느끼는 순간, 나는 저 무서운 소멸과 황량한 무화無化에 대한 두려움 섞인 전율에 사로잡혔다. 일체의 잡음이 제거된 순수 그 자체인 죽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공포보다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시인의 내면에 깃든 극한적 순수지향의 의지가 빚어낸 이 장면의 미학적 전율은 내 심리의 저층에 잠들었던 원색적 비장감을 깨워 일으켰다.
이형기 시 「황혼」이 보여준 환상과 꿈의 실재화實在化에 대한 치열한 탐닉은 한때 이미지의 감각적 형상화를 추구하는 내 시의 지향점이 되기도 하였다.

조현석
귓속에/복숭아꽃 피고/노래가/마을이 되는/나라로/
갈 수 있을까/어지러움이/맑은 물/흐르고/
흐르는 물 따라/불구의 팔다리가/흐르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죽은 사람도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 잔/권하는 나라로/
아, 갈 수 있을까/언제는/몸도/마음도/안 아픈/나라로
―― 이성복, 「정든 유곽에서」에서

엄마는 늘 아팠다. 시도 때도 없이 무릎 관절이 쑤셨고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했고 당뇨에 고혈압도 있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도를 낸 아버지가 근 1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 기간 중 엄마는 몇 개월 동안 병석에 있었다. 예전에 앓았던 결핵성뇌막염이 다시 도졌다는 말을 이모에게서 들었다. 그때 나는 숱한 밤을 앉은뱅이책상에서 울다가 지쳐서 엎드려 잠들었다. 커다란 이불짐과 옷보따리를 지고 메고 판자촌이 즐비한 청계천 옆 왕십리로 이사를 했다. 그 시절 아버지 없는 집에 앓아누운 엄마를 보며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를 생각하며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 지금은 15년 전 돌아가신 엄마가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 잔 권하는 나라”를 떠올린다. 딱히 마음 한 잔이 아니더라도 찬 술 한 잔이라도 권하기를.

천양희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 김수영, 「비」에서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릴케)”는 말 앞에서 오래 마음이 들리던 시절, 움직이는 비애란 말은 “내 속엔 언제나 비명이 살고 있다(실비아 플라스)”라는 구절과 함께 내 정신을 내리치는 죽비였다.움직이는 비애가 내면을 훑고 지나갈 때 나는 시詩라는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을 수 있었다. 정신의 지문指紋 같은 이 한 구절은 내가 초극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며 시작詩作에 가해야 할 박차이다. 오늘도 시가 내게 묻는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최영철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시를 쓸 종이가 없어 날 지난 신문지 한 귀퉁이에 몇 줄을 끄적거려 그것을 천금인양 가슴 한편에 감추던 시절이 있었다. 시를 쓸 필기구가 없어 부러진 연필을 황급히 깎아 침 묻혀가며 눌러 쓰던 시절이 있었다. 멀쩡한 팔다리를 떼내어 버릴 수는 있어도 그렇게 얻은 시 몇 줄은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시절이 있었다. 호주머니에는 잘 해야 천 원 지폐 한 장이 고작이었다. 그것으로 낱담배를 사고 가락국수로 허기를 넘기고, 잔술 두어 잔이라도 마신 날은 찬바람이 씽씽 들어오는 어깨를 구부리고 두어 시간 집까지 걸어야 했다. 그리고 새롭게 뜬 아침 햇살 아래 지난밤의 모든 기대와 몽상을 찢고 불태워야 했다.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뜨거울 수 있었던 동력은 얄궂게도 그렇게 진저리를 쳤던 가난과 외로움이었다. 그다지 가난하고 외롭지 않게 된 지금, 나는 그래서 그다지 높고 뜨겁지도 않게 되었다.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그것이 두렵고 절망스럽다.

최종천
그러나 누구하나 정작 보면서도 보지 못할 아득한 헤루크레스 성좌 부근
광막한 시공 속에 이미 환원한 나를
―― 유치환, 「모년某年 모월 모일」에서

시를 읽다 보면 놀라우리만큼 닮은 구절을 만나게 된다. 청마 선생의 위 구절은 T.S. 엘리어트의 「게론쫀」의 끝에 나오는 다음 구절과 많이 닮았다. “바스러진 원자로서, 떨리우는 곰좌의 궤도 저편에 회오리치는 벨라슈 프레스카 캐멀부인은” 한창 시를 공부하던 시절 내가 좋아하는 시를 모아 놓고 보니, 박목월의 「하관」, 유치환의 「모년 모월 모일」, 정지용의 「유리창」 등으로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는 시였다. 청마 선생의 이 작품은 우리 시단에서 보기 드물게 드높고 명료한 정신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닮은 상상력과 감수성을 만날 때는 경이와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 전율은 청년으로서 느끼는 좌절과 고독을 달래 주었던 것 같다. 나는 엘리어트의 시를 좋아해서 어느날 교보로 시집을 사러 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고도 훔쳐 가지고 나오다가 교보 직원에게 들킨 적이 있다. 내 호주머니 속에 든 것을 모두 꺼내놓으라고 하여 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책을 주면서 다음에 오면 갚으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다음에 가서 책값을 갚으려고 하니 없었던 일이 되어 있었다. 탐구당 문고판 엘리어트 시집 당시 값은 2천 원이었다. 1978년의 일이었다.

최창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내 삶의 길을 크게 벗어났거나, 너무 멀리 나왔다는 생각이 들 때에 백석의 시는 엄하고도 얼마나 정감 어렸던지, 나는 그대로 꼭 따라 했던 것이다. 아궁이에서 불씨를 화로에 담아, 꼭같이 무릎을 꿇고… 시를 쓰거나보다, 시를 빚거나보다, 시를 산다는 일이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줄곧 내 우매한 정신의 불씨를 살려주는 싯구는 참으로 많으나,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고 저 백석이 다가 낀 화로의 불씨로 보태보는 것이다.

최치언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아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 이용악, 「장마 개인 날」에서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인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자꾸 꿈속에 찾아와 밥을 해주시며 ‘배고프지 않니, 배고프지 않니’ 그랬다. 그런 날이면 북쪽으로 머리를 둔 옥탑방에 누워 천장에 드리워진 두꺼운 구름장들을 보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울면 지는 거니까. 그러나 울었다.“배고프지 나의 사람아/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되뇌이며 울었다.

한명희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 김광균, 「설야」에서

김광균의 「설야」와 신경림의 「갈대」를 놓고 망설인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와 “산다는 것은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본다. 난독의 시절이자 남독의 시절이었고 사춘기로 접어들까 말까 한 시기였다. 눈 내리는 소리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들리다니! 이 구절은 야한 비디오 화면처럼 저절로 자꾸만 떠올랐고 나는 몰래 혼자 설레어하며 부끄러워했고 그러면서 몰래 이 구절을 계속 읊조렸다. 「갈대」를 읽고는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인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내 삶에 대한 비극적인 예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한편 그 괴로움을 즐겼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괴로웠던 기억보다는 설레고 부끄러웠던 기억에 한 표를 던지기로 한다. 세상에, 눈 내리는 소리가 옷 벗는 소리로 들리다니!

한미영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전문

스무 살이었다. 새내기 문학도였던 내게 정현종의 「섬」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오롯이 내 가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알베르 까뮈에 심취해 있었고 까뮈가 스무 살에 읽었다던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섬』을 읽은 것도 스무 살, 그 무렵이었다. 가슴에 섬을 품고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연애는 수없이 내 안에 떠 있던 섬으로 인해 좌초했다. 떠나간 사랑을 탓하느라 청춘을 소비했다.돌이켜보면 연애가 실패한 건 내 책임이었다. 섬은 내게 사랑의 은유와도 같았다. 왜냐하면 나의 연애는 끝없이 미끄러지는 운명을 반복하는 어떤 실현 불가능한 욕망의 치환이었으므로. 나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아직도……

함성호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에서

따는, 나는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생명의 존귀함이 아니라 나라는 우주에 갇혀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 문득 이 한귀절로 나는 나라는 닫힌 우주에서 나라는 열린 우주로 귀환했다. 귀환이라는 것은 본래 그랬다는 말이다. 불가에서는 이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고 보니 나는 참 못생긴 얼굴이었다. 폭력 앞에서 비겁하며, 이익 앞에서 이기적이고, 공동의 선 앞에서 게을렀다. 이것이 나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이후 내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이 본래의, 못생긴 내 얼굴을 보고 난 후 나는 비로소 내 시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공자는 시경 삼백 수의 뜻을 한 마디로 말했다.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이 말을 나는 시는 솔직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이 부끄러움을 통하지 않고 시는 없다.

허만하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정지용, 「백록담」에서

망설임 끝에 시인 정지용의 「백록담」의 이 구절과 「향수」의“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울음 우는 곳…” 중에서 「백록담」 쪽 구절을 고른다. 의예과 학생시절 다방에서 문리대 친구가 읽던 시집을 어깨 너머 훔쳐 읽었을 때 만난 추억의 구절이다. “꽃도/귀향 사는 곳”(「구성동九城洞」)도 좋지만, 이 구절은 「백록담」 구절에 비해서 색채감이 덜하고 앞연에 기대어 비로소 그 빛남이 더해지는 듯해서, 홀로서기로도 반짝반짝하는 인용문을 든다. 도체비꽃이 어떤 꽃인지 모르지만, 어릴 때 아버지의 고향 뒷산에서 처음 보았던 도라지꽃의 신선한 푸름보다도 더 새파란 꽃인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릴케가 그의 「두이노의 비가」에서 말한 용담꽃도 이렇게 새파랄 수 없는, 나에게는 환상의 꽃이다. 도체비꽃이란 말이 그 앞 구절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와 내통하는 것도 얄밉다.
“아름다움이란 무서움의 시작이다.”

허 연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 김종삼, 「시인학교」에서

한 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통닭 10마리를, 다른 한 손에는 김종삼의 시집을 들고 터미널에 서 있었다. 살기 싫은 휴가병이었다, 나는.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던 날 김종삼 시집 『북치는 소년』을 샀다. 덜컹대는 직행버스 안에서 시집을 읽었고, 다시 살고 싶었다. 그날 난 아주 나른한 계시를 받았다. 통닭 냄새를 맡으며 제외된 자들이 주는 눈부심을 알았다. 절창絶唱은 제외된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시를 씀으로써 세상에서 제외되고 싶었다.


허영자
서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 서정주, 「추천사?韆詞」에서

열일곱 살 때 처음 읽은 미당의 이 시구는 지금 읽어도 나의 고개를 떨구게 만든다. 아니 절벽에서 툭 떨어지듯이 나의 고개를 절망적으로 꺾어지게 한다고 함이 더 옳을 것이다. 그만큼 이 구절은 비극적인 메시지를 나에게 전하는 시구이다. 인간의 한계― 유한한 목숨과 의욕에 못 따르는 능력의 한계, 찬란한 꿈에 비한 현실의 초라함 등을 이 한 구절은 절실히 감지케 하기 때문이다. 이 시구에서 역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간절함 때문에 나는 수십 번, 수백 번 이 구절을 읊조려 왔으며, 아마 앞으로도 여러 번 같은 일을 되풀이하리라 생각한다.

허형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60년대 중반, 법대로 가기를 권하신 아버지의 명령을 배반(?)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국문과를 택하여 상경한 서울은 참으로 우울의 극치였다. 날마다 흑석동 연못시장 안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지지고 볶은 문학론만 해도 하룻밤이면 족히 서너 말은 될 성싶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정치사상사, 중소기업론, 동양철학 등 전공과 관련 없는 과목을 공부하면서도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며 시집은 닥치는 대로 사서 읽어 제쳤던 시절, 밤새 미당의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고 있던 어느 날 밤, 만해가 내게 와 나의 정수박이에 기름 한 바가지를 붓고 떠났다. 알 수 없는 시에 대한 희열을 맛본 순간이었다. 아마, 네루다의 시처럼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는 신념은 그 뒤의 일이지 싶다.

홍신선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정지용, 「백록담」에서
막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였다. 그때까지도 문청 기분을 완전히 청산 못한 나는 천둥벌거숭이로 살았다. 대학 시절의 글 친구인 박제천이나 한국시 동인인 오규원 등등 숱한 사내들과 어울려 술과 시 이야기로 시간을 죽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절제한 술과 젊음, 그리고 독서로 지새운 시절이었다. 학생들에게 어쩌다 그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지금도 거침없이 ‘화류계 뜬 시절’이라고 말한다. 화류계라니? 말 그대로 술과 책에 빠져 살던 황음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절 한편으로는 청계천 8가를 곧잘 혼자 헤매었다. 끼니도 거른 채 고서점, 헌 책방이 늘비한 그곳을 헤매며 책 구경 내지 낡은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았다. 그렇다. 헌책더미에서 마침 해방 직후 을유문화사에서 낸 『지용시선』를 찾았던 날의 그 득의양양함이라니. 지금도 그날의 째지던 기분은 마냥 생생할 밖에…… 집에 돌아와 풍문으로만 듣던 지용의 시를 나는 감격에 겨워 읽었다. 그때만 해도 정지용은 풍문 속의, 이름 석 자조차도 복자로 표기해야 했던 때가 아니던가. 작품 「백록담」을 읽어가다 4번에서 만난 이 한 구절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쓸쓸함’이, ‘홀로됨’이 말 그대로 ‘파랗게 질려야 하는’ 공포 자체라니. 그러나 정신의 도저한 경지는 이 공포를 극복한 자만의 것임을 나는 이즈음 체감으로 새삼 깨닫는다. 어즈버, 나도 이미 별수없이 늘그막에 들어선 것이다.

황병승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축축한 손길이 다가와 나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짓누르는 밤의 숲처럼. 처음 이 시를 읽어내려가던 스물일곱, 겨울, 나의 12월.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서기와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내의 고통스러운 침묵이 나의 입을 틀어막았고, 그것은 등 뒤의 짐승처럼 나를 두렵게 했었다. 그리고 다시 펼쳐든 페이지, ‘거의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던 그때의 사내는 여전히 축축한 손을 내밀어 스물일곱, 겨울, 12월 쪽으로 나를 질 질 질 끌고 간다.

황인숙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죽어서도/영혼이/없으리
―― 김종삼, 「라산스카」에서

그냥 하염없이 좋다. 김종삼 선생의 모든 시를 좋아하지만 내 머리와 혀에 그 맛이 가장 짙게 감도는 시는 이 「라산스카」다. 끝없이 울려 퍼지는 조종소리처럼 사무쳐서 온몸이 저리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를 얘기했는데, 「라산스카」는 아름답도록 슬픈 시다.

 

 

ⓒ삶의 향기가 가득한 문화저널21 & www.mhj21.com 2009.2.7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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