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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음 속 모난 부분을 어루만지는 잘 익은 서정/강인한

희라킴 2016. 3. 16. 07:07

 

                           마음 속 모난 부분을 어루만지는 잘 익은 서정

 

                                                     _《시안》계간 리뷰

 

                                                                             / 강인한(시인)

 

 

무화과를 먹는 저녁

 

/ 이성목

 

 

지난 생에 나는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는 벌을 받고 울다가 내 안으로 들어와 몸져누운 날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우두커니 서서 육신을 익혀가는 계절, 몽둥이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엉덩이에 푸른 멍이 번지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한 시절 몸을 탐하느라 나를 잊을 뻔도 했습니다. 아파하려고 꽃이 나에게 왔었다는 것, 위독은 병이 아니라 이별의 예각에 숨어 피는 꽃이라는 것조차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끝내 당신 속으로 들어간 마음이 진물처럼 흘러나와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은 스스로 지운 꽃냄새를 풍기며 선득하게 나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없다면 어느 몸이 아프다고 저렇게 큰 잎을 피워내서 뒤척일까요.

 

아무렇게나 태어난 아이들이 골목길로 꿀꺽꿀꺽 뛰어드는 환청, 꽃을 숨기느라 땅이 저물고 하늘이 붉어지는 것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적 없는 꽃냄새가 당신도 없이, 입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시집《노끈》

 

* 대상에 대한 진지한 몰입에서 우러나온 시를 읽습니다. 꽃을 피우지 않고 열매 속에 꽃이 핀다는 건 감성적인 이해이고 실은 너무 작은 꽃이 가지에 매달려 숨은 듯이 피기 때문에 꽃이 안 핀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저 무화과 열매 속에 꽃이 있다,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끝내 당신 속으로 들어간 마음」처럼 지극해서 슬프고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눈속임의 기교와 현학을 자랑하는 이들의 허랑한 자세와는 거리를 두고, 시를 대하는 겸허하고 진지한 자세, 오랜 기간 제대로 빚어져 잘 익은 서정이 읽는 이의 마음 속 모난 부분을 참으로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빈곳

 

/ 배한봉

 

 

암벽 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풀꽃도 피어 있다.

틈이 생명줄이다.

틈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른다.

틈이 생긴 구석.

사람들은 그걸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팔을 벌리는 것.

언제든 안을 준비 돼 있다고

자기 가슴 한 쪽을 비워놓은 것.

틈은 아름다운 허점.

틈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른다.

꽃이 피는 곳.

빈곳이 걸어 나온다.

상처의 자리. 상처에 살이 차 오른 자리.

헤아릴 수 없는 쓸쓸함 오래 응시하던 눈빛이 자라는 곳.

 

 

—《시안》2012년 여름호

 

 

* 우리네 현대인의 삶은 주도면밀함을 도처에서 강요받고 있습니다. 매사에 빈틈이 없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복잡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자가 잠깐 한눈을 팔면, 수술 중의 의사가 한눈을 팔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다못해 자동출입문에서 비밀번호 한 자리를 누른 손가락의 힘이 살짝 모자라도 문은 열리지 않고, 이메일 한 통 쓸 때도 마침표 대신 무심히 쉼표를 잘못 찍은 메일 주소를 컴퓨터는 전송해주지 않습니다. ‘틈은 아름다운 허점’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건 정말 꿈에 지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

 

/ 김소연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창문 바깥에서가 아니라 저 멀리 대관령에서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빨래를 널고 창문을 열어두고 바깥에 앉아 볕을 쬐고 있을 때 고양이가 다가와 내 그림자의 테두리를 몇 걸음 걸었고 저쪽에 웅크렸다

 

꿈에서 일어난 일들이 쏟아져내렸다 허벅지에 떨어진 동그란 핏방울이었고 그다음 양철 주전자였고 그다음 도살장 옆 미루나무였다

 

단식을 감행했다 내가 아니라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저 먼 제주도에서

아침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많이 아팠다 내가 아니라 저 먼 시베리아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할머니는 선지를 좋아했고 엄마는 할머니를 좋아했다 나는 심부름을 좋아했다

 

자박자박 붉은 물기를 밟으며 도살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한 발씩 한 발씩 서늘해졌다 검은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동물들은 걸려 있거나 누워 있었다 질질 끌려 우리집 앞을 지나간 건 어제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쪼그려 앉아 선지를 먹었다 아주 오래전 그 집에서가 아니라 조금 전 꿈속에서

멀리서 날아온 빈혈들이 할머니의 은수저에 얹혀 있었다 할머니의 은빛 정수리처럼 똬리를 튼 채로

 

아침은 이런 것이다

 

도착한 것들이 날갯죽지를 접을 땐 그림자가 발생한다 바로 거기에서

 

나무가 있었다면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사람이 아니라 저기 빈 자리에서 나무 한그루가

 

 

—《창작과비평》 2012년 여름호

 

 

*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여기가 아니라 먼 먼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사실은 나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그런 것’으로 인해서 알게 모르게 연루되어 내가 아픕니다. 어제 우리 집 옆을 동물들이 질질 끌려가 도살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는 선지를 좋아했고 엄마는 할머니를 좋아했으므로 나는 양은 주전자를 들고 도살장 안쪽으로 심부름을 갔습니다. 오래 전이기도 하고, 조금 전 꿈속이기도 한 일들입니다.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

 

/ 장석남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첫꽃 핀 꽃사과여

그 꽃의 중량을 가늠해 보니

처음 업어보는 처녀의 무게만 하겠네

처음 배에 올려보는 女子의 희고 미끄러운 허벅지 무게만 하겠네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꽃 떨구고 하늘로 솟을라나?

혼이 난 김에 아주 솟아갈라나?

숭굴숭굴한 자주 잎들의 무게여

나의 몸살도 저를 닮아서

문고리를 채우네

 

 

—《시와 시학》2012년 여름호

 

 

* 그 꽃의 중량은 ‘처음 배에 올려보는 女子의 희고 미끄러운 허벅지 무게’쯤 된답니다. 숭굴숭굴한 이 관능의 유혹이 몸살로 번져 끝내 ‘문고리를 채우’고 일을 벌일 모양입니다. 누구 창호지 구멍 내고 저 꽃몸살을 엿보는 이는 없을라나? 석남의 이 시로 인하여 순서 없이 피고 진 올봄의 꽃값은 충분할 듯합니다.

 

 

 

     —《시안》 2012년 가을호, 「시의 오솔길」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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