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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종권이 모은 시작법 초안

희라킴 2016. 3. 16. 07:01

 

[김종권이 모은 시작법 초안]

1. 시는 언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2. 상상에 의한 의미의 확장조차도 기반이 "사실적 관찰"에서 출발되어진 것이 아니면 안 된다.

3. 시는 생략함으로써 유혹한다. 시는 정보의 과소공급을 통해서 오히려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언술 형식이다.

4. 시는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좁게는 작품 차원에서, 넓게는 역사의 큰 문맥에서 전체성을 지향하고 완결성을 향해 나아간다.

5. 시가 보편을 추구하면 일반적으로 추상이란 곳에 떨어진다. 추상은 시의 지옥이다. 간혹 시가 어떤 보편을 확고히 성취했다 하더라도, 구체성과 특수성의 힘이 실리지 않으면, 무기력한 추상을 벗어날 힘은 아무 데도 없다.

6. 이미지 표현은 어떤 방법이든 구체적이어야 한다. 시의 한 방법으로서의 "애매성"은 몽롱하거나 모호한 표현을 말함이 아니고, 상상에 의한 의미 확장이 구체적으로 가능한 길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7. 살아있는 시를 위해서 쓰는 시어는 추상적인 언어 보다는 "구체적인 언어"를 써야 하며, 보편적인 언어 보다는 "특수한 언어"를 찾아서 써야 한다.

8. 추상적인 구호는 시인의 구체적인 언술적 주장 없이, 더 이상의 선택이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절대 절명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

9. 자체적인 큰 고민 없이 어떤 객관적이거나 추상적인 "느낌"만으로 시를 채우면, 그 시는 이미 자체적인 진정성 결여라는 무겁고 큰 난제를 지고 시의 바다에 뛰어든 것에 다름 아니다.

10. 문학은 일차적으로 창조적 배반과 전복이라는 조금 큰 에너지를 요구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라도 그 노래가 이미 불린 노래의 변조에 지나지 않는다면, 문학의 의미는 스스로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11. 좋은 시인은 그의 내면적 상처를 반성,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이미지를 부여하여 감싸 안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부분 시인들은 자기의 감성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벗지 못하며, 끝내 과다노출 증세나 폐쇄공황 증세를 유발한다.

12. 어두운 시대를 돌파해 나가는 시의 무기들 중에 최고봉은, 아무래도 상징이다. 소수인의 독점물일지라도 일정한 긴장과 자기 통제 아래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문학은, 암울한 시대 상황과 싸우는 최선의 부드러운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징은 절제되어야 하며, 일종의 통제가 가능한 몇몇 상황하에서만 그 기능이 최고로 발휘된다고 볼 수 있다.

13. 시의 언어는 생리적으로 체험이나 사물의 구체를 겨냥한다. 그러므로 시인이 그것의 획득을 위하여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어떠한 시간과 공간에 담보 잡히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시중잡배의 말로도 투자없이 이윤을 바라는 일은 사기의 일종일 뿐이다.

14. 담고자 하는 내용에 압도되어 언어의 힘이 과소평가되다 보면, 일종의 "스토리 텔러"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짜임새도 있으며 건강한 주제 의식도 살아 있는데, 전체적으로 문장이 건조하고 뻣뻣하며 말과 말 사이에 탄력이 붙지 않는 경우는, 필경 선취된 관념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5. 모름지기 시의 힘이란, 그 핵이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낌"에서 발휘되어 나온다.

16. 장중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장중하기 힘든 법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시는 내면적으로는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외면적으로는 이슬처럼 맑은 울림이 있어야 한다. 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 소리"이어야 한다. 한없이 길고 긴 공명의 여운을 지닌 소리여야 한다.

17. 시적인 언어는 시적 자아의 삶에 기호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사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공적언술로 이전되어 있어야 시적인 언어가 된다.

18. 문학은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그 상처와 관련된 제반 여타를 치유한다. 이것이 어려운 것은 사적 차원이 아니라 공적인 언술이어야 하기 때문이지만, 이것의 극복 없이 그 상처에 대한 접근조차도 어려운 것이니,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19. 습작 시절 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얘기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얘기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20.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실험" "해체" 따위의 꼬리표를 달고 나타나는 형식 파괴의 작업이 얼마만큼 독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보다는, 그 작업이 얼마만큼 작가의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혹시 겉멋 부림은 아닌가라는 의문이다. 그리고 다음엔 그 작품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삶이 우리의 현실 속의 삶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21. "낯설게 하기"라는 문학적 기법은 이상의 이유들로 해서 문학사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이끎으로서 인간과 세계와의 발전적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다.

22. 시인은 그 무엇을 "최초로 보고 최초로 생각한 사람"이 아니다. 다들 언뜻 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시각과 생각 사이에 존재하는 느낌을 최초로 발견하여 시적 언술로 이끌어낸 사람이다.

23. 시인이 치러내야 할 작업 내용은 막연하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어떤 생각 속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 이전의 어떤 일반적인 감정일 뿐이다. 다시금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지형 속에서 그 한 단면의 구체적인 드라마와 연결시킨 후, 이쪽저쪽으로 뻗어나가는 난삽한 긴 이야기의 잔가지를 치고, 그것을 한 단편으로 정확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작업이, 시인이 해야 할 작업 내용인 것이다.

24. 초보 시인들에게 진짜 필요한 우선작업은, 가장 빨리 쉽게 떠오른 생각이나 문장 혹은 언어들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하는 일이며, 그리고 그것들을 우선 뇌리에서 과감하게 지워 버리는 훈련을 하는 작업이다. 그들은 백지 위를 너무 쉽게 달려감으로써 너무 쉽게 감정을 촉발시켜 고양시키지만, 시인의 작업지역은 백지 위가 아니다. 끝 모를 심연과 고산준봉의 난제가 즐비하게 요철로 얽힌 이 세상이다.

25.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 작품은 필경 삶을 어떤 수준에서 "새롭게 해주는" 품격을 지향해야 하며, 모든 문체와 기법은 이를 위해 은밀히 봉사를 해야 한다.

26. 시를 짓는 사람은 언제나 "개념과 감각의 상투형을 파괴"하려고 대담하게 모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27. 시란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하지 않는 데에서, 즉 "말과 침묵 사이"에서 균형 잡힌 어떤 탱탱한 긴장을 받기 때문이다.

28. "일상에 대한 탐구"는, 그러나 일상의 표피적 묘사와 도식적인 소품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는 "우리 시대의 위기 구조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언제나 동반되거나 때로는 "일상에서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시인에 의해서 발견되고 노래됨으로써 그 시의 일상에 대한 탐구가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29. 시가 의미를 가지는 또 하나의 가치는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반성적 사유"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30. 좋은 시인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표현할 때조차도 심미적 거리를 유지하며, 대상의 존재 의의를 보다 명징하게 간파하여 절제된 묘사에 이르도록 한다.

31. 시인은 언어에 도취되기 위하여 시를 쓰지 않고, 그 언어에 도취된 안일을 깨우기 위해 시를 쓴다. 그래서 시는 타락한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그 타락한 세계를 지탱하는 관념에 머무는 언어와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32. 문제는 경험을 어떻게 사실에 부합되게 재현하는가가 아니라, 진실로 그 경험이 정확하게 무엇에 대한 시적 해명이며, 그 경험의 세계를 존재의 밝음 속으로 이끌어 와, 어떻게 마모되지 않는 생명력을 부여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33. 풍자는 독자의 의식을 충격하며, 그 이데올로기적 미망을 깨고 현실에 대한 재인식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청자(聽者) 중심적인 문학적 계몽주의의 변종이다.

34. 끊임없이 경계에 위치하며 그 경계를 지워 나가는 작업이야말로, 시를 "도취적이며 일시적인 내면적 담론"에 머물지 않게 함으로써 그 시들이 끊임없이 살아 꿈틀거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35. 모든 시적 언어는 논리적 언어로 요약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시적 언어가 된다.

36. 시라는 장르가 초월의 형식이라는 미학적 명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초월은 대지의 삶에 대한 관심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의 구조라던가 지리학 등에 대한 관심을 절연한 초월은, 결국 소박한 낭만주의의 단편적인 충동을 넘어서지 못한다.

37. 시는 부정을 목표로 하는 부정이 아니라,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건강한 힘"을 자신의 원천 에너지로 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인의 태도에 있어 부정적 사유의 힘은, 쉬지 않는 운동 에너지와 그에 따른 자기 갱신에 의해서 유지된다.

38. 시에 있어서 미적 구조의 진정한 성취는, 시적 언어의 육화(肉化)를 얻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시 언어의 현실감의 증대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태도가 "직설적이고 과잉된 수식어를 통해 개진"된다면, 그 정서적 역동성이 약화되는 건 뻔하다.

39. 시에서 삶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궁극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어휘를 통해서가 아니라 시 언어의 형태적, 통사적 구조를 통해서이다. "준엄한 정의"를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정서적인 충격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인 것이다.

40. 경험 그 자체는 시가 아니며 종교적, 철학적 통찰 역시 그 자체로는 시가 아니다. 시의 의미의 층위들은 그러한 세계관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물리적인 만남을 계기로 서로 상충하며 여기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반응에 따른 침전물로 나타나야 한다. 시인은 흩어진 경험의 조각 가운데 선택적으로, 어떤 것을 독특하고 중요한 것으로 부각시켜야 한다. 그리고 경험은 정밀하게 관찰되고 현재화되어야 한다. 시는 일상적인 경험의 번역이 아니라, 경험의 결과가 주는 의미를 새로이 실현하는 움직이는 생명력, 그 자체이다. 시인은 그렇게 "경험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경험의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이다.

41. 시의 "어조"는 작품의 외적인 경험이나 현실의 맥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시의 어조는 시인의 세계관에 부과되는 장식물이 아니라, 앞서 말한 물리화학적 난제들을 실천하기 위해 세계와 교접하는 방식,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2. 서사와 서정의 개념은 헤겔이 정의한 대로, 자기 노출의 주관성의 표현이 서정으로 드러나는 것이요, 세상의 객관성을 움켜잡으려는 충동에서 서사가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43. 시인들이여 좀더 복잡해지기를, 시인들이여 인간은 물론 이 세계가 얼마나 다층적이고 잡스러운 것인가를 새삼 인식하기를, 시인들이여 그 유행 휘하에서 과감히 벗어나기를, 시인들이여 노래하는 대상이 추상적 존재가 되거나 그 자신의 도그마가 되지 않기를…….

44. 친숙함은 인식의 장애가 될 뿐, 아무 것도 도모하지 않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낯설게 바라보는 시각적 측면은 문학적 소양과도 매우 긴밀하며, 그것을 마치 공기와도 같이 흡입되는 후에라야, 시는 알게 모르게 자신의 에너지를 발휘할 힘을 비밀리에 갖출 것이다.

45. 통속적으로 만인이 보고 읽기 "쉬운 시"란 것을 지시적이고 관습적인 전달성의 그것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곤란한 얘기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쉬운 시란 것조차도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표현의 묘"를 지니지 않는 한, 우리에게 다가온 "감동"은 별로 의미 없는 것들일 것이다.

46. 시의 공화국 안에서 시보다 고착화된 진실을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은 다 가짜다. 철학적 언사의 표현방식을 존중하는 자들, 제도권과의 유희를 벌이는 자들, 시 속에 종교적 발언을 흩뿌리는 자들, 시가 궁극적으로 말해야 할 무엇이 있다고 믿는 자들, 무엇 무엇이 시적 전통이라고 외치는 자들은, 모두 죽음을 지키는 묘지기들이다. 시 공화국은 오직 "구체적 외부"만을 대상으로 가질 뿐이다.

47. 언제부터인가 감각적인 낱말의 무분별한 나열이 시의 재치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재치가 일방적으로 해롭다는 뜻이 아니라, 깊이 있는 통찰력과 분명한 관점으로 탄탄한 구조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언어감각은, 일회용 패션으로 끝날 우려가 매우 깊다는 것이다.

48. 대상을 옳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투적인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상투적 선입관은 언제나 어제 본 그대로, 더구나 자신이 안주하는 환경에 길들은 타인이 승인하는 그대로만 보기 때문에, 다수의 동의를 얻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날카롭고 창조적인 눈을 봉쇄하고 사물을 고정되고 획일화된 무덤 속에 가두게 된다. 그러니 수시로 변하는 대상을 옳게 표현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49. 노자는 말했다. 사람들은 진흙을 빚어 꽃항아리를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쓰이는 부분은 꽃항아리 속의 비어있는 부분이다. ― 정작 중요한 것은 비어있는 부분일 터인데 능청이 지나쳐 여행담이 너무 수다스럽거나 여행자가 얻은 각종 지식과 풍물들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아 무거워 지는 대목들은 최근 우리 문학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취약점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비어있는 부분이 핵심이라지만 항아리의 모양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야 상품(上品)으로 쳐주는 것이 세상의 물리이다.

50. 시는 우선 詩가 되어야 한다.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이므로 호악(好惡)의 판단 정도가 있을 뿐 우열(優劣)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시가(詩歌) 언어(言語)의 규율을 무시하고 목청만 잔뜩 높이게 되면 그것은 한 때 대학가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어 듣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는 결코 관념의 놀이터이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혹세무민의 연금술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는 없다.

 

 

출처 : 마음의 행간 | 글쓴이 : 민영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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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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