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시

[스크랩] 2013년 신춘문예 당선시 모음

희라킴 2015. 12. 19. 12:47

2013년 신춘문예 당선시 모음

 

 

세계일보 / 히말라야시다 /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한라일보 / 적도 / 조율

 

옥탑방 평상에 앉아 수박에 칼을 찔러 넣는다

수박의 적도 부근쯤이다 지구본으로 따진다면

한 중앙에 위치한 에콰도르의 어느 도시 정도가 되겠지

이곳은 뜨거운 열대우림, 곰팡이가 타잔처럼 천장을

오르는 옥탑방, 생각한다, 왜 나에게는 선글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그런 적도가 지나가지 않는가?

눅눅한 근로계약서에 손가락을 빌려줄 때마다

낮은 태양이 양철지붕 위로 더 무겁게 녹아 내려붙는다

가로줄이 많은, 빈칸이 많은, 적도가 많은

주름진 종이 속에는 엷은 비늘이 숨어 있다

적도를 벗어난 열대어의 서글픈 눈망울이 끔뻑인다

온통 경력자들만의 구인광고 박스, 열대성 기후 속에서

적도는 옆구리 뜨거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지구의 허리춤을 적도가 점점 조이고, 조여 오면

이거 벨트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 하나?

난간에 서서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수박씨를 뱉는다

내가 맞히지 못한 뒤통수들은 달동네에 엉킨 오르막길을

왜 이렇게 가뿐히 풀어내는가? 수박씨 속에도 적도가

있다던데 그곳은 영영 바람 한 점 없단 말인가?

이천 원짜리 금간 수박에서, 무너진 신발장

경첩과 경첩 사이에서, 경력과 초보사이에서 도려낸 적도,

언제나 남은 절반은 절반을 닮아간다

바지랑대를 세워 하늘을 갈라본 적도,

구름을 베어본 적도, 적도 부근에 가본 적도 없지만

바람 잘 날만 있는 이곳은 언제나 바싹 말라가는 무풍지대,

 

 

 

전북도민 / 그 여자, 마네킹 / 강봉덕

 

때론, 패션도 종교가 된다

묵언수행 하는 그 여자

침묵으로 한 종파를 완성시킨다

그 종파의 교리는 계절을 앞질러 가는 것

한 계절 똑같은 웃음이나 빛깔

표정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계절에 이르기 전

그 여자의 설법은 고요하고 은밀하다

이 거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술에 걸리듯

그 여자의 짝퉁이 되기 시작한다

포교는 항상 중심에서 변방으로 퍼진다

짧은 치마처럼 간단명료한 표정

미끈한 팔다리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며

파격적인 노출도 교리가 된다

패션이 변할 때 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표정을 만들며 순종적으로 바뀐다

경기불황이 몰려오면

그녀는 더 화려하고 빠르게 변신한다

사라진 추종자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은

침침한 눈으로 바늘귀에 실 꿰듯 힘겨운 일이지만

손바닥 뒤집듯 가벼울 수 있다는 듯

투명한 벽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 여자, 화려한 변신을 시작한다

나를 버린 사람들이 몰려든다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 할 때까지

 

 

 

영남일보 / 말(馬) / 정와연

 

수선집 사내의 어깨에 말의 문신이 매어져 있다

길길이 날뛰던 방향 쪽으로 고삐를 묶어둔 듯

말 한 마리 매여 있다

팔뚝에 힘을 줄 때마다

아직도 말의 뒷발이 온 몸을 뛰어다닌다

고삐를 풀고 나갈 곳을 찾고 있다는 듯 연신 땀을 흘린다

저 날리는 갈기를, 콧김을, 이빨 드러내는

투레질을 굵은 팔뚝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을

저 사내 알기나 할까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절에 스스로 마구간을 짓고

지독한 결심으로 고삐를 매어두었을지도 모른다

 

말은 복종하는 발굽과 항거하는 발굽이 다르다

앞발을 굽힐 때 뒷발은 더 빡세게 버티는 법이다

 

어느 뒷골목의 시간들을 붙잡아

사내의 안쪽을 향하게 단단히 묶었으나

꿈틀거리는 역마살이란 언제까지 갇혀 있을 발굽이 아니다

비좁은 마방에서 수년 째 구두를 깁는 일이

자못 수상하기까지 하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偶然)이 있다면 그것은 다 길의 파본이다

 

발굽을 갈아 끼울 때마다 사내는

박차고 나가려는 팔뚝의 불뚝한 말을 오래 쓰다듬듯 주무른다

이제야 말 한 마리를 다룰 줄 안다는 듯

말과 주인이 따로 없다는 듯이

 

 

 

 

경향신문 / 녹번동 /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긴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더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백족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 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픞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불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경제신춘 / 벗어둔 고래 / 최영정

 

밤새 헛기침하는 저 구두

신발장에서 꺼내 한 손에 낀 채 닦아내다가

밑창에

작게 뚫린 고래의 숨구멍을 보았다

 

비가 올 때마다

얼마나 많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컴컴한 동굴 같은

저 안에서 솟구치고 솟구쳤을까

 

내 마음이 내딛는 자리마다

생겨나는 커다란 물웅덩이에

빠진다.

 

정년퇴임 후 아버지가 가지런히 벗어둔

저 구두는

숨 쉬러 물 밖으로 가끔 뜬소문처럼 올라온다는

고래들처럼

요즘엔

경조사 빼곤 좀처럼 밖을 나서는 법이 없다.

 

다시 마른

헝겊만으로 구두를 닦고 또 문지르는데도

무슨 일인지

자꾸만 눈부신 물광이

구두에서 난다.

 

 

 

조선일보 / 손톱 깎는 날 / 김재현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동아일보 / 가난한 오늘 /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전북일보 / 검은 줄 / 김정경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 장

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니

방바닥에 검은 줄 하나 그어져 있다

특수고용자로 분류된 나는

노동조합이 철야 농성 중인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문 위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들 나부끼고

제 이름 외치며 뛰쳐나온 노란 팬지꽃

화단 위에 삐뚤빼뚤 구호를 받아 적었다

나무 기둥의 몸을 열고 나온 날개미들,

좁은 방에 검은 줄 늘려가고 있다

문 걸어 잠그고

쓰다 남은 살충제 쏟아 붓는다

혼자서 살겠다고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던 자기소개서

개미들이 따라가며 밑줄을 긋는다

고쳐 쓰다만 자기소개서 위의 검은 줄이 흩어진다

 

 

 

농민신문 / 하현달 소묘 / 조선의

 

 

한 끝을 힘껏 당겨 가만히 놓으면

다른 한 끝이 길이 된다

 

활시위는 지상을 향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과녁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아직 다 그리지 못한 한쪽 눈썹

마당 모서리에 반쯤 보이는 길고양이 꼬리

뒤꼍 항아리 돌아 핀 흰 철쭉꽃이거나

추녀를 넌지시 들어 올린 풍경소리거나,

어둠이 빛을 좇아 하늘로 오르기 시작하면

비어 있는 그늘에 풀씨들이 날아들어

지상의 벼랑 위에 피는 꽃들은

극한의 향기를 오로라의 남극으로 잇는다지

지하도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전리층의 프리즘 속으로 사라지고

한 시절 끝 간 데 없이 오로라와 연결된

달빛의 통로를 빠져나오면

활시위의 과녁 위다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풍경소리가 추녀 끝 아래쯤에서 멈추기를 기다려

당신의 눈썹으로 달을 그리는 일,

 

그 끝이 다른

한 끝의 길이다

 

 

 

서울신문 / 이끼의 시간 / 김준현

 

우물 위로 귀 몇 개가 떠다닌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 느린 허공이 담겨 있다 나는

내 빈 얼굴을 바라본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닫아놓은 창이다

녹슨 현악기의 뼈를 꺾어 왔다 우물이 입을 벌리고

벽에는 수염이 거뭇하다 사춘기라면

젖은 눈으로

기타의 냄새 나는 구멍을 더듬는, 장마철이다

손가락 몇 개로 높아지는 빗소리를 누른다 저 먼 곳에서

핏줄이 서는 그의 목젖, 거친

수염을 민다

드러나는 싹이여, 자라지 마라

벌레들이 털 많은 다리로 밤에서

새벽까지 더듬어 오른다

나는 잠든 그의 뒷주머니에

시린 손을 숨긴다 부드럽고 가장 어두운

비닐봉지 안에 차가운 달걀 몇 개를 담아

바람에 밀려가는 주소를 찾는다

귀들이 다 가라앉은 물에도

소름이 돋는 중이다

 

 

 

문화일보 / 오늘의 의상 / 정지우

 

성당의 느티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끌리고 있다

팔랑거리는 양떼들을 데리고

계절 속으로 입성하려면 가벼운 체위는 가리고 고딕의 시대를 지나야 한다

 

폭염은 언덕에 한낮으로 누워 있다

 

구름의 미사포를 쓰고 그늘을 숙이던 오후는 초록의 전례를 들려주더니

밀빵을 혀에 얹고 한동안 입들이 닫혀 있을 것이다

종탑에는 귀머거리 새가

종소리를 둥지로 삼아 살고 있다

 

회색을 입고 묵상에 잠긴 성전엔 돌기둥을 돌던 저녁의 의복이 걸쳐져 있다

 

미사의 요일엔 검은 머리카락을 버리고 히브리어를 닮은 숟가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디저트가 없는

주일 맛 나는 테이블

중세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창문

귀가 잘려진 무늬에선

단풍잎 맛이 나는 오래된 말들이 달그락거린다

 

촛대처럼 나무가 자꾸 떨어뜨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읊고 가는 가을 울음소리가 스르르 바닥에 끌린다

계단이나 혹은 의자로 배치되어 있는 한 철을

나는 양치기 소년으로 지나고 있다

 

 

 

경남일보 / 수박 / 진서윤

 

수박밭에는 여물지 않은 태양들이 숨어있었다.

 

햇빛 줄기가 연결된 곳엔 푸르스름한 심장이 떠있고 폭염이 몰려들고 있었다.

양말 목 풀린 실밥처럼

몸이 헐 것 같은 날

거꾸로 자라는 덩굴의 비린 향이 꼼지락거렸다.

 

직선의 나이에 곡선의 통증이 붉다

모래밭 이랑마다 층층이 쌓이는 바람말이를 먹었다

누군가 손등으로 통통 두드려보고 갔다

그때 문득, 통증에 씨앗이 생겼다.

 

세상의 모든 음(音)은 보이지 않는 발자국처럼 익어가고 서리라는 말을 들으면 붉은 당도(糖度)가 끈적거렸다.

 

달의 필라멘트가 끊어진 밤

고양이가 지나갈 때마다 감지 등(燈)이 켜지고

닿기만 해도 탁!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만월(滿月)

수박 속에는 검은 별들이 유영하고 있을 것이다.

 

푸른 굴절무늬로 온몸을 묶어 놓은 여름, 허벅지 아래로 붉은 씨앗 한 점(點) 떨어졌다.

이후 모든 웃음을

손으로 가리는 버릇이 생겼다.

 

들판 너머 여름이 이불 홑청 끝자락처럼 가벼워졌다

마르지도 젖지도 않은 이파리를 허리에 감고

수박들이 붉은 속셈으로 익어간다.

 

 

 

불교신문 / 탑 / 최길하

 

탑은 탑보다

탐 그림자가 더 좋다

그림자도 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물고기떼 집이 돼주는 물 속 그림자가 더 좋다

물 속 그림자도

뭉게구름 몇 장 데리고 노는

늙으신 탑이 더 좋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어놓고

등불같은 까치밥 쳐다보는

우리 종손같은 탑이 더 좋다

 

 

 

경인일보 / 떠도는 지붕 / 장유정

 

바람으로 벽을 세운다.

해와 달을 훈제하는 뾰족한 꼭대기에는 바람의 뚜껑이 있다.

날씨 사이에 계절이 끼여 있는 벌판에

조립식 숨구멍을 튼다.

이것을 바람의 집이라 부르고 싶었다.

 

예각이 없는 벽,

구겨진 바람을 펴 문을 만든다.

환기창으로 들어 온 햇살은 시침만 있는 시간이 되고

불의 씨앗을 들여놓으면 집이 된다.

집에서 흔들리는 것은 연기뿐이라는 듯

발굽이 있는 흰 연기들이 꾸물꾸물 날아오른다.

 

한 그루 귀한 자작나무, 벌판의 한 가운데 서서 시계로 운영되고 있다 푸른 지붕은 바람의 소관이다. 반짝거리는 나무의 초침이 다 날아가도 재깍재깍 부속품들만 돈다. 흐린 날에는 시간도 쉰다.

 

빈집을 알리는 표시가 열려 있다

 

정착하는 곳마다 그 곳의 시간은 따로 있다

자작나무에 붙은 시간이 다 떨어지면 지붕을 걷고

게르! 하고 부를 때마다 게으른 잠이 눈에 든다.

바삭거리는 시간들이 날아간다.

집은 버리고 벽만 둘둘 말아 트럭에 싣는다.

떠도는 것은 지붕뿐이다.

 

 

 

강원일보 /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 정선희

 

눈동자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언젠가 떠나게 되어있지

눈동자는 또 다른 눈동자를 부추기지 검은 눈동자 흰 눈동자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하늘에 있는 구름이 눈동자 속으로 흘러들면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지

구름이 풀린 사람을 본 적 있니? 흰구름이

검은 구름을 침범한 걸 본 적 있니?

그는 눈동자에 발목을 잡힌 사람,

그의 눈동자는 지금 여기를 보지 않고

언제나 저 멀리 허공을 보고 있지

오래 전 김시습이 그랬고 임제와 김삿갓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세상에 없는 길을 찾고 있지

구름처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고 있지

만약 저들 중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당신도 벌써 구름이 선택한 사람,

만약 스튜어디어스나 등반가를 꿈꾼다면

당신은 벌써 구름에 중독된 사람

사람 마음이 열두 번도 더 바뀌는 것도

구름 때문이야

마음을 붙잡고 싶다면

눈동자를 매달아 두는 게 좋을 거야

쉿! 저기 저 구름

조심해!

 

 

 

경상일보 / 소금쟁이, 날아오르다 / 최정희

 

그녀가 오늘 한쪽 유방을 들어냈어 무거워진 한쪽이 사면처럼 기울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어 기울기를 가진다는 건 양팔저울 한쪽에 슬픔을 더하거나 덜어내는 것

 

가끔 또는 자주 비가 내렸어 그녀의 눈 속에 살고 있는 소금쟁이는 언제나 눈물의 표면을 단단히 움켜쥐었어 그렁그렁한 표면장력, 그 힘으로 소금쟁이는 침몰하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했어

 

오늘 그녀는 기울기를 가졌어 x축과 y축 사이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 걸음을 걸을 때마다 가슴에서 눈물이 호수처럼 출렁였어 그녀는 비로소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 남은 한쪽의 젖꼭지가 짓무를 때까지 오늘 울기로 했어

 

소금쟁이가 떠났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

 

 

 

무등일보 / 고로쇠 옆구리 / 김정애

 

 

뚫어야만 다스려지는 상처가 있다

뭉툭한 옆구리에 핏물을 가두고

거친 호흡으로 살아가던 나무가

잎사귀의 언어로 조용히 말을 걸어올 때

꿈의 밑동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 저문 울음들을 끌어안고

복수腹水를 다스리는

노모의 시간

 

살갗 밑으로 가는 뿌리가 자라나고

산을 들어 올릴 듯 무거워진 몸으로

때론,

내 것의 체취도 조금은 빼내고 살자며 옆구리를 들춘다

콸콸콸 쏟아내는 물속에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들이 우러나 있고

혈관을 따라 울려 퍼지는 피의 음악이 스며 있어

꿀떡 삼킬 순간을 놓치고 숲에 안겨본다

바람을 휘저으며 폭포를 향해 뻗어가던 기상과

쇳물을 다스리는 철의 여인 같던 고집이

명치 한복판을 뚫고 뼈의 무늬로 흐르고 있다

우글거리는 잎사귀를 향하여

응달을 다스리고 있다.

 

 

국제신문 / 섬, 이유 / 김유경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국일보 / 쏘가리, 호랑이 /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沼와 여울, 여울과 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i]'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ii]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한국경제 / 화병 / 김기주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

금이 간 화병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물을 더 부어 봐도

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

물은 천천히, 이게

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아무 일 없는 외진 방안

잠시 핀 꽃잎을 바라보느라

탁자 위에 생긴 작은 웅덩이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꽃잎보다 키를 낮출 수 없는지

뿌리를 보려하지 않았다

 

한 쪽 귀퉁이가 닳은 색 바랜 소반만이

길 잃은 물방울들을 돕고 있었다

서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물방울들에게,

가두지 않고도 높이를 갖는 법을

모나지 않게 모이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릎보다 낮은 곳

달빛 같은 동자승의 얼굴이

오래도 머물다 간다

 

 

 

영주신춘문예 / 목련꽃 지다 / 권행은

 

저 집, 독거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목련꽃 져 내리고

조문하듯 비가 지난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허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 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

 

툭, 떨어질 때

공기가 잠시 출렁했을 뿐

저 꽃은 첫 번째 고백부터

쪽방 밑에 버려진 마이너리티

 

뒤척이는 바람이

한 계절 백발이 성성하던 꽃의 외로움을 뒤집고

풍문처럼 누르스름하게

해묵은 발자국도 잠시 석양에 문지른다

 

한 때 속절없이 눈부시던 봄빛에

하얗게 저항하던 그녀의 몸짓을

그 누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붓을 들어 마지막 유서를 쓰듯

혼신으로 써내려간 꽃의 낙화를 안다면

어둑어둑 밤의 담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는

한 장 어둠이 이불인

저 독거의 노추老醜를 함부로 밟지는 못할 것이다

 

 

 

매일신문 / 쇼펜하우어 필경사 / 김지명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 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볕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저녁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 되고

낮이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부산일보 / 네팔상회 / 정와연

 

분절된 말들이 이 골목의 모국어다

춥고 높은 발음들이 산을 내려온 듯 어눌하고

까무잡잡하게 탄 말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는 골목을 만들고

늙은 소처럼 어슬렁거리는 휴일이 있다

먼 곳의 일을 동경했을까

가끔은 무명지 잘린 송금이 있었다

창문 없는 공장의 몇 달이 고지대의 공기로 가득 찬다

마음이 어둑해지면 찾는 네팔상회

기웃거리는 한국어는 이국의 말 같다

달밧과 향신료가 듬뿍 배인 커리와 아짜르

손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 왼손은 얼씬도 못하는 밥상

그러나 흐르는 물속을 따라가 보면

다가가서 슬쩍 씻겨주는 손

그쪽에는 설산을 돌아 나온 강의 기류가 있다

날개를 달고 긴 숫자들이 고산을 넘어간다

몇 개의 봉우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질긴 노동이 차가운 맨손에서 목장갑으로 낡아갔다

세상에는 분명 돌아가는 날짜가 있다는 것에 경배,

히말라야줄기를 잡아끄는 골목의 밤은

왁자지껄 하거나 까무잡잡하다

네팔 말을 몰라 그냥 네팔상회라 부르는 곳

알고 보면 그 집 주인은 네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날짜가 간절한 사람들은 함부로

부유하는 주소에서

주인으로 지내지 않는다

 

 

 

 

동양일보 / 낮잠 훔쳐보기 / 양성숙

 

달아나려는 바쁜 오후가 아기의 손에 잡혔다

오가는 발소리 배달하는 오토바이도 옴짝달싹못한다

허공을 말아 쥔 채 공기까지 부여잡고,

요람 속에 깊숙이 빠져든 아기가

놔줄 기미 보이지 않자 풀 죽은 오후가 잠잠하다

찬찬히 탐색하는 눈길을 아는지

아기입술에 꼬리가 생겼다 사라진다

살짝 벌어진 살구꽃잎에 나른한 웃음이 고여있다

 

이백팔십일간의 비밀을 가득 담고 깊게 잠든 손

내막이 궁금한 커다란 손이 얇고 투명한 손가락을 열면

움츠러들며 더 힘껏 말아 쥐는 아기의 손

나팔꽃처럼 오무라든 주먹이 숨겨 논

아기의 비밀을 가만가만 펴보니

저항 없이 하나씩 하나씩 열리는 아기의 손

돌돌말린 하얗고 긴 먼지가 살포시 누워있다

하얀 손수건이 조심조심 아기의 비밀을 캐내자

고스란히 따라 나오는

아기의 내력이 기록된 솜털뭉치들

천천히 한 올 한 올 닦아내면

다시 순서대로 접히는 미모사 같은 아기 손가락

작정하고 한 번 으깨보고 싶은 큼지막한 손이 꼬옥 감싸자

깨끗하고 까만 눈이 활짝열린다

그제야 정보가 누출된 것을 알았는지 맑게 웃는다

 

악착같이 감추지 못한 아기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공범을 밝히려 손을 뻗자

아기에게 잡혀 들통 날까 안달 난 오후가 재빠르게 달아난다

낮잠 속에서 깨어난 아기, 몸을 늘린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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