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시

[스크랩] 2012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27편 모음

희라킴 2015. 12. 19. 12:46

 

2012년 신춘문예 당선작 27편

차 례

 

1. 201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구름사촌 / 조규남

2.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월면 채굴기 / 류성훈

3.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노숙 / 이영종

4. 2012년 전북 도민일보신춘문예 당선작 / 철새를 만나다 / 홍철기

5. 2012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우리들의 인사법法 / 김경순

6. 계속 되는, 점 / 김경순

7. 빛이 수직으로 서는 이유 / 김경순

8. 2012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목련꽃 / 조영민

9.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 허영둘

10.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풍경 재봉사 / 김민철

11.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불고기, 물꼬기 / 유빈

12. 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물푸레 동면기 / 이여원

13. 2012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 조장 / 오기석

14. 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얼룩진 벽지 / 성명남

15. 201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우물이 있던 자리 / 이승혁

16.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노루귀가 피는 곳 / 최인숙

17. 201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흰꽃이 지다 / 오영애

18. 201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거미줄동네 / 박광희

19. 201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 정영희

20.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저무는, 집 / 여성민

21. 201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위풍당당 분필氏 / 정경희

22. 201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링거 속의 바다 / 김영란

23. 2012년 조선일보 [동시 당선작] 철이네 우편함 - 김영두

24. 2012년 조선일보 [시 당선작] 조련사K - 한명원

25. 2012년 조선일보 [시조 당선작] 외계인을 기다리며 / 양해열

26. 2012 경향 신춘문예 [시 부문] 최호빈-그늘들의 초상

27. 2012년<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안미옥 / 나의 고아원

 

 

1. 201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구름사촌 / 조규남

 

구름사촌 / 조규남

 

내 발도 하늘을 문질러본 기억이 있다

나무이파리처럼 시원하게 흔들리며

하늘에 발자국을 찍어본 일이 있다

바람이 건들대며 쓰다듬고 지나가면

구름도 덩달아 내 발을 슬쩍 신어보고 도망가던 자국이 자꾸 간지럽다

운동장 놀이기구에 몸을 기대고 물구나무섰을 때

아무리 참으려 해도 거꾸로 몰린 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쿵,

내려왔던 하늘이 되돌아가버리자

또 다시 땅을 딛고 온몸 받히며 살아가는 내 발

지금도 이파리가 되었던 짧은 시간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누워 뒹굴면서도 무심히 하늘을 더듬어보고 걸어 다닐 때도

발꿈치를 들어 올리며 바람 느끼고 싶어 들썩인다

대낮에도 통로가 보이지 않아 눈물을 찔끔 훔치는 일도

최초의 천둥인 듯 크릉크릉 부르짖는 버릇도

내 속에 흐르는 구름의 피가 농간을 부리기 때문

발이 간지러운 가로수가 몸을 비튼다

아무리 걸어도 굳은살 한 점 박히지 않은

부드러운 초록 발,

수많은 발바닥 활짝 펴 하늘을 닦는다

죽어서도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싶은 발

 

2.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월면 채굴기 / 류성훈

 

월면 채굴기 / 류성훈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 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3.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노숙 / 이영종

 

노숙 / 이영종

 

열차와 멧돼지가 우연히 부딪쳐 죽을 일은 흔치 않으므로

호남선 개태사역 부근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열차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나는 믿기로 했다

오늘밤 내가 떨지 않기 위해 덮을 일간지 몇 장도

실은 숲에 사는 나무를 얇게 저며 만든 것

활자처럼 빽빽하게 개체수를 늘려온 멧돼지를 탓할 수는 없다

동면에 들어간 나무뿌리를 주둥이로 캐다가

홀쭉해지는 새끼들의 아랫배를 혀로 핥다가

밤 열차를 타면 도토리 몇 자루

등에 지고 올 수 있으리라 멧돼지는 믿었던 것이다

사고가 난 지점은 옛날에 간이역이 서 있던 자리

화물칸이라도 얻어 타려고 했을까

멧돼지는 오랫동안 예민한 후각으로 역무원의 깃발 냄새를 맡아왔던 것일까

역무원의 깃발이 사라진 최초의 지점에

고속철도가 놓였을 것이고 밝은 귀 환해지도록 기적소리 들으며

멧돼지는 침목에 몸 비벼 승차 지점을 표시해 두었으리라

콧김으로 눈발 헤쳐 숲길을 철길까지 끌고 오느라

다리는 더욱 굵고 짧아졌으리라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네줄 새끼도 없고

돌아갈 숲도 없는 나는 오랜만에 새 신문지를 바꿔 덮으며

그때 그 역 근방에서 떼를 지어 서성거렸다는

멧돼지 십여 마리의 발소리를 믿기로 했다

 

4. 2012년 전북 도민일보신춘문예 당선작 / 철새를 만나다 / 홍철기

 

철새를 만나다 / 홍철기

문득

뭇별들의 제자리걸음이

그렁그렁한 눈물을 머금게 하는 밤

안개 속 방파제는

육지로 난 길 인양

어서 나아가 보라며

건너가 보라며 나를 부르는데

엉겨 붙어 나를 말리는 바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울먹일 때

빈 껍질만 남아 뒹구는 희망

피난민처럼 몰려왔다

이젠 떠나고 싶은데

갈 곳이 없는지 멍자국 같은 사연

하나 둘 모여 불을 밝히고

마을을 이루고 그래서 한세상

어우러진 잡풀처럼 흔들릴 때

알고 있었다 저마다 소금에 저린

마음 한 다발씩 묶어 쌓아두고 있음을

맨 정신에 타오르지도 못했던

마음 불쏘시개 삼아

한 잔 두 잔 마신 술에

취하기는 바다가 취하고 끝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들다 고꾸라지며

살 아 야 하 나

이어지지 못하고 부서져 되돌아가 버리는 말

담뱃재 떨듯 매일같이 칭얼대는

희망쯤이야 쉬이 떨어내면 그만이라고

말보다 먼저 떠난 파도가

다한 힘으로 와 쓰러질 때.

저기 저 봉두난발한 바닷바람

사이 위태위태하게 날아가는

철새 한 마리

5. 2012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우리들의 인사법法 / 김경순

우리들의 인사법法 / 김경순

1.

지문이 세면대 밸브에 쌓여간다

암묵적인 약속처럼

조심스럽게 잡고 올렸다 내리며 안녕,

밸브를 감싸 쥐고 그 위에 나의 지문을 포갠다, 새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머드를 화석으로 만나듯

비 젖은 발자국에 서로의 무게로 깊이를 더하듯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조우하게 되는 것일까.

만나지 않으려 이렇게 만나는 것일까.

안녕, 안녕,

헤어질 때와 같이.

2.

당신이 지나간 보도블록을 밟았을 때

내가 사려던 책을 당신이 집어 들었을 때

한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당신과 나도…

춥다는 핑계로 귀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입이 벌어져 있으면 자꾸만 우리는 말이 쏟아질 것 같아요,

아침마다 지우개로 입술을 지우던 나

당신과 나의 선들이 교차하던 순간

내가 웃었기에 당신은 울었다.

6. 계속 되는, 점 / 김경순

1.

가족이 깰까 달빛도 사뿐히 걷는 밤

어둠과 맞닿은 자리에서 더욱 짙어지는 까만 점

밤은 그녀의 등과 마주해 블랙홀이 되었다

별 부스러기 가득한 두 평 우주를 호출하는 등

2.

태양은 햇빛을 저장하기 위해

치타의 몸에 까만 점을 무수히 찍었다지

그 모습이 마치 송송 뚫린 구멍 같아,

바람이 자꾸만 손가락을 넣어 보는 탓에

치타가 뛸 때마다 쉭-쉭-

휘파람 소리 난다지

줄넘기 하듯 그 구멍을 가볍게 통과하면

치타처럼 포효하며 달려볼 수 있을까.

3.

하늘이 바리케이드를 칩니다.

앞뒤가 없는 끝이 환한 구멍

그 안에 들어서면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7. 빛이 수직으로 서는 이유 / 김경순

종종 하늘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한 치 어긋남 없이 주욱 뻗어나가는 빛

내가 쏘아올린 빛의 끝을 잡아당기고 있다

밤새 팽팽한 빛의 기둥에 제가 가진 가장 빛나는 것을 심어주던 하늘은

다음날이면 또 나를 보러 한숨에 일억 오천만 키로미터를 달려왔다

봉우리며 바위들이 위를 향해 열심히 날을 세우듯

바람이 닦고 지나간 자리를 지키는 나뭇가지처럼,

8. 2012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목련꽃 / 조영민

목련꽃 / 조영민

꽃이 문을 꽝 닫고 떠나 버린 나무 그늘 아래서

이제 보지 못할 풍경이, 빠금히 닫힌다

보고도 보지 못할 한 시절이 또 오는 것일까

닫히면서 열리는 게 너무 많을 때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다

바람이 몰려와 모서리마다 그늘의 알을 낳는다

온통 혈관이고 살인 축축한 짚벼늘이 느껴져

아주 오랫동안 지나간 것들의 무늬가 잡힐 듯한데…

꽃 진 그늘에는 누가 내 이름을 목쉬게 부르다가

지나간 것 같아

꿈이나 사경을 헤맬 때 정확히 들었을 법한 그 소리가

왜 전생처럼 떠오르는 것일까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

태양이 구슬처럼 구르는 정오. 꽃그늘에 앉으면

뒤돌아서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부르다 부르지 못하면 냄새로 바뀐다는데

뒤돌아서 자꾸만 누가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나무를 꼭 껴안아 보는데

나무에선 언젠가 맡았던 냄새가 난다

9.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 허영둘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 허영둘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10.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풍경 재봉사 / 김민철

풍경 재봉사 / 김민철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

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 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11.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불고기, 물꼬기 / 유빈

불고기, 물꼬기 / 유빈

낱말들을 고르게 쓰다듬다 놓쳐버리는 혀

빈 밥상 위 문법책은 달아나는 발음을 따라잡지 못해요

귀퉁이 까매진 책갈피 사이로

나쨩 해변의 파도가 밀려와요

불고기는 불고기, 물고기는 왜 물꼬기일까요

언제나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생님 그러나

센터 문만 나서면 불고기도 불고기,

물고기도 물고기, 책에 빨갛게 그려넣은

물결무늬 밑줄들, 어려운 차이들이

행간 사이를 꼬불꼬불 헤엄치고 있어요

발화(發話)되지 않는 더듬이

언제쯤 머리로 말하지 않아도 될까요

계약서를 다 채우려면 얼마큼 부드러워야 하나요

듣기연습을 위해 놓치지 않는 9시 뉴스데스크

화면에 떴다 사라지는 얼굴

전송되지 못한 채 들것에 실려 나가는 비명소리

면사포 속에서 하노이 강이 부풀어 올라요

방향도 통로도 모른 채 꿈에 젖은 갈매기들

셀 수 없는 물이랑을 넘을 때

순서를 따라 늘어서는 인터뷰 행렬

해본 적 없는 질문들, 나는, 너는…

기름에 잠겨 지글거리는 계란 프라이 한가운데

섬처럼 똬리 튼 노른자 한 알

하얀 거울에 노란 얼굴이 밤낮없이 비춰지고

강변의 모래알들 잊으면 될까요

맘 편히 흘러들 수 있는 틈새는 어디 있을까요

12. 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물푸레 동면기 / 이여원

물푸레 동면기 / 이여원(李如苑)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지나가는 분량이어서

몸에 들인 적 없고 팔목을 좌우로 흔들어 멀리 쫓아 보냈었다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나무의 생채기에 서표(書標)를 꽂아두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꽂아두고 말린다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

추위가 가득 엉켜 있는 물가, 작은 샛길이 마을 쪽으로 얼어 미끄럽다

빈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모두 봄이 오는 방향 쪽으로 비스듬 마중을 나가 있다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개울이 키우고 있는 것이 물푸레인지 물푸레가 키우고 있는 것이 개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뭇잎 하나 얼음 위로 소금쟁이처럼 떠 있다

13. 2012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 조장 / 오기석

조장 / 오기석

히말라야는 죽은 자의 무덤이다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그 무덤이 우뚝우뚝 선다

나는 오직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한다

치켜뜨고 고원을 배회하는 그 눈과 내 눈이 부딪칠 때

히말라야는 죽은 자가 산자를 배웅하는

묵직한 항구다

길은 벌써 하늘로 뚫어져 덩그렇게 허공에 매달렸는데

지금 막 망자의 검은 눈을 독수리가 정 조준한다

이곳의 주인은

고원을 만들었다 무너뜨리는 바람이다

그 바람을 타고 독수리는 날아들고 또 그렇게 떠난다

남은 것은 바람의 길을 따라 나는 망자의 영혼뿐이다

여기서 독수리는 발톱 따윈 쓸모없다

그저 살점을 움켜쥐고 뜯을 수 있는 부리만 튼튼하면 된다

상주도 조문객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목숨은 이미 독수리가 움켜쥐고 있다

그 다음 순서는

모두 바람의 지시에 따라 시간이 알아 할 몫이다

장례의식이 끝나고 죽어서 다시 돌아 올 그 산을 내려간다

이제 남은 것은 망자의 시신과 천장사* 뿐이다

천장사가 도끼로 시신을 난도질한다

그러곤 하늘을 빙빙 도는 독수리에게 살점을 던진다

덥숙덥숙 받아먹는 독수리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

*히말라야 고원지대 장례에서 시체의 사지를 분해하여 새에게 던져주는 사람.

14. 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얼룩진 벽지 / 성명남

얼룩진 벽지 / 성명남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짐승의 매화무늬가 보인 건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지직거리는 TV속 동물의 왕국에선

재규어가 강물 속에 꼬리를 담그고

살랑살랑 흔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노인은 자신의 퇴화된 꼬리를 자꾸 만져보다

돌아누우며 TV를 꺼버렸다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짐승의 영역은 확대 되어갔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 채취만으로

목덜미를 물린 듯 노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짐승이 다 자랐을 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노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15. 201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우물이 있던 자리 / 이승혁

우물이 있던 자리 / 이승혁

잠 못 이루는 잔별들이 풍덩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밤

할미의 쇠잔한 잔기침을 받아내는 밤안개가

처마 끝에서 너울지며 유영하고 있었지

빨랫줄에 걸린 물때의 온기가 자정을 적실 때면

어린 나의 입 속으로 곶감 같은 어미의 숨결이 아득하게 쏟아졌었지

위태로운 유년을 닮은 초승달이

내 여린 이마를 가만히 보듬고 가곤 했지

바다의 능선을 타고 돌아오던 메아리가

어린 치어들을 깨워놓고 산 그림자 속으로 흘러가던 날

두레박을 혼자 끌어올리자 변성기의 새벽들이 사춘기처럼 찾아왔지

할머니, 내 울대의 잔별들이 사라졌는지

우물에선 맑은 목소리가 올라오지 않아요

누군가 머릿속에 방생한 악몽들만 짜디짠 입가를 헤엄치고 있어요

줄이 끊어진 두레박은 우물 속 깊이 가라앉았고

전설들 두레박을 기울여야 또다른 힘을 얻던 유년의 꿈들도

더는 담겨지지 않아요

얘야, 네 어미의 바다는 새벽시장 마른 비늘의 궤짝들 틈이란다

횟속 깊이 박힌 몇 개의 미늘과 목젖을 열 때마다

아아.. 말이 되지 못하는 실어증의 힘으로만 너를 낳았단다

그렇게 할머니의 유언이 몇 줌 두레박 속의 전설로 담겨지는 사이

어머니의 바다 더 깊은 궤짝들 틈으로 실종되었고

지금은 어떠한 우물거림으로도 씹히지 않는 먼먼 날들의 그 바다

저물녘

늦가을의 핸들을 구부리며 깃드는 *신문리 451번지의 안마당 고요가

방금 전 그 파도에게라도 들켰는지

아주 오랜 옛날의 漁信처럼 기억의 지느러미 하나로 획 사라지고

있었다

* 강화읍의 마을주소

16.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노루귀가 피는 곳 / 최인숙

노루귀가 피는 곳 / 최인숙

그래그래 여기야 여기

신기해하고 신통해하는 것은 뜸이다

안으로 스미는 연기의 수백 개 얼굴이

아픈 곳을 알아서 나긋나긋 더듬는다

그러고 보면 뜸은 어머니의 손을 숨기고 있다

뜸과 이웃인 침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침의 얼굴과 대적한 적 많아

보는 순간 심장부터 놀라 돌아서곤 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뜸이 다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머니도 부엌에서 또 뜸을 뜨고 계셨다

아침저녁 굴뚝으로 하늘 한켠을

할머니 무덤 여기저기에

노루귀가 피었다

겨울과 봄 사이

가려워 진물 흐르는 대지에

아니 너와 나의 그곳에

누가 아련히 뜸을 뜨고 계시다

어느 세상의 기혈이 뚫렸나 하루도 환하다

17. 201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흰꽃이 지다 / 오영애

흰꽃이 지다 / 오영애

흰꽃이 진다 한꺼번에 진다 비를 맞으며 서서 수십 톤씩 진다 무더기무더기

진다 바야흐로 진다 가슴이 하나 진다 통곡하듯 진다 둥둥 떠서 진다 꽃상여

로 진다 절뚝절뚝 진다 맨땅위에 진다 색 없이 진다 화 없이 진다 자식 없이

진다 원수 없이 진다 수의(壽衣) 없이 진다 실로 꽃 곁에 가까이 울며 서 있

장바구니 든 나도 진다

18. 201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거미줄동네 / 박광희

거미줄동네 / 박광희

뿌리 같은, 오래된 골목이 줄에 걸려 바동거린다

나지막한 지붕들이 이마를 맞댄 좁다른 풍경

TV 안테나선, 전깃줄, 빨랫줄들이 하늘을 묶은

제각각의 각도를 가진 도형들로 골목은 늘 무겁다

낡은 시간을 매단 전봇대, 습한 담벼락에 숨어있던

표적들이 나타날 때마다 한 뼘씩 몸집이 커지는

외등들, 거미는 가만히 자신의 넓적다리를 숨긴 채

낮고 좁은 골목길을 얼기설기 엮어 낚아챈다

돌돌 말아 고치로 엮어내는 솜씨는 놀랍다

어쩌면, 이 골목 사람들은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 줄의 포박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지도 모른다

부글부글, 그깟 몸부림 쯤

진작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 그만인 것을

바람의 입질에 걸려든 젖은 골목들의 눈 속

허공이 공허할 수 없는 건 저 줄들이 만드는 유혹 탓

코르셋처럼 집들이 꽉 끼인 것은 줄의 팽팽한 긴장 탓

낡은 모서리처럼 표지가 뜯겨져 나가

내력조차 희미해진 이곳 사람들, 뻐꾸기시계처럼

때가 되면 문을 열고 뛰쳐나가 울음 울면 그뿐

참붕어 같은 골목은 언제 줄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나지막한 허공을 저인망 줄들이 집들을 묶고 있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다 젖은 도형들이

허우적거린다, 골목이 환하게 열린다

일제히 미끼를 무는 붕어들의 입질

흰 와이셔츠 폐타이어, 화분, 방수천막지를 물어뜯는다

장마전선의 북상에 바삐 방적돌기를 부풀리는 거미

걸려든 집집의 내력들이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다

동맥경화증에 걸린 골목, 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내게 주어진 소중한 길 이제 놓지 않을 것

19. 201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 정영희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 정영희

아무르 강 소인이 찍힌 항공우편이 도착했다

우표 네 귀마다 고드름이 박혀있는 흑갈색 편지에는

온난화 현상도 이곳에선 세계대백과사전에서나 읽어보는 호사라며

한낮에도 발가락을 날개 안쪽 깊이 파묻고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순천만에서 담근 농게 장을 벽돌 빵에 치즈대신

발라먹고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며

새끼들로 인한 궁기窮氣때문에 늦은 저녁까지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품을 팔고 돌아온다는 행간에는 한숨이 진하게 배어났다

철새라고 부르는 비아냥 때문에 눈자위 진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대목에서는 먹빛 하늘을 갈기처럼 찢고 싶었다

허기로 눈밭에 시리도록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이젠 지쳐

순천만의 텃새로 귀화를 결심하고 있다는 추신에 이르러서는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갯가 짱뚱어의 눈알이 봉분처럼 튀어나온 이유를 알겠다

망둥어는 왜가리 공습을 기어코 막겠다며 전망대까지 벌써 올라와 있었고

칠게들은 뻘 구멍 속에 흑두루미의 식량을 비축하느라

열 발톱이 문드러질 정도였다

흑두루미의 귀환 아닌 귀화를 위해 탄탄한 움집이라도 예비해야 한다며

풍속을 온몸으로 가늠하고 있는 갈대의 심지도 깊었다

너울은 먼 바다에서 싱싱한 먹잇감을 데리고 오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지그재그로 물길을 오르내렸다

냉기가 옷깃을 쓸며가자 사람들이 탐조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깃털 스쳐가듯 달이 구름을 밀어 올리자

쿠르르, 쿠르르, 카아오, 카아오!

회색 부리를 비틀며 북쪽 하늘에 까만 점들이 펄럭거렸다

이백 스물여덟마리 대가족의 귀환 아닌, 귀화였다

20.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저무는, 집 / 여성민

저무는, 집 / 여성민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21. 201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위풍당당 분필氏 / 정경희

위풍당당 분필氏 / 정경희

강의실에 상주하는 분필씨는요

평소엔 친절함 속에 뿔을 감추고 있지만

앉기 거부하거나 행동지침을 어기면

밑줄 좍좍 그어가며 날 길들이려 하죠

동강동강 제 몸 관절 부러뜨리며

어김없이 날카로운 뿔을 꺼내 위협해 와요

나는 뿔이 무서워 의자에 몸 구겨 넣고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되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분필씨 생각대로 답하고

분필씨 습관대로 따라 행동하죠

가끔 경직되고 고루한 생각에

내 뿔 꺼내 맞서볼까 생각도 하지만요

그의 뿔은 워낙 완고해

내 같은 여린 뿔로는 감히 어림 없다나요?

그래서 나만의 대항 법을 터득했는데요

강의 내용 자장가 삼아

잠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 있거나

창 밖 딴 세상 꿈꾸면서 그 뿔 숫제 무시해보죠

그러다가 뿔을 타고 밖으로 나가

강 건너고 구름 따라 달리기도 하고

발걸음 멈추고 비행기 접어 날리기도 해요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뿔을 먼저 달아준 건 나인지도 모르겠어요

지적이고 당당한 그 뿔이 멋스러워

스스로 닮아가려 애쓰는 건지도

쉿, 분필씨 다시 뿔을 꺼내고 있어요 세상이 갑자기 긴장하네요

22. 201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링거 속의 바다 / 김영란

링거 속의 바다 / 김영란

온 몸이 글썽거린다 아득한 바다냄새

어쩌면 이 신열은 오래 전의 길 하나 열어줄지도 몰라

세상은 바다가 낳은 미지근한 비망록일거라고

아니, 그 비망록이 낙서들의 끝에 부려놓은 삽화일거라고

네가 나른한 힘을 얘기했던 곳으로

지금 나는 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너의 힘을 빌려 나에게 이르지 못할 때마다

변명처럼 꺼내든 바다가 아닌

방금 전 내 몸의 한 모퉁이로 들어오던

링거액 같은 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잠깐의 외출로

조회할 수 있는 너를 믿지 않지

너의 웃음이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조난의 느낌 하나만으로

바람을 이끌고 오고 폭풍을 이끌고 와

끝내 범선 같은 고백을 숨겼던 것처럼

나 지금도 먼 옛날의 너를 믿지 않아

기억이란 몇 방울의 망각으로 걸어나갔던

오랜 신열의 발자국들

어디선가 때 이른 저뭄이 다가와

내 옆구리를 툭 친 것도

네가 나로부터 멀어지던 형식이었음을 기억하는 한 순간

내 통증의 한 쪽에서 고개를 드는 현실 하나

나는 잠시 링거액 건너편에 기대어 놓았던 목발을 챙겨

너의 바다가 보일 것 같은 창가로 절룩절룩 걸음을 옮긴다

23. 2012년 조선일보 [동시 당선작] 철이네 우편함 - 김영두

철이네 우편함 - 김영두

철이네 우편함은 강 이 편에 있습니다.

집배원 아저씨가 강 건너 오시는 게 미안해

이 편 강가 숲 속 소나무에 우편함을

달아 놓았답니다.

며칠에 한번씩 배를 타고 건너와

편지를 찾아가는 철이 아빠.

우편함 속에 할미새 부부가

보금자리를 만들기 시작하더니

알록달록 귀여운 새알을

낳았답니다.

철이 아빠는

옆 소나무에 바구니를 하나 달아놓고

글을 써 붙였습니다.

"집배원 아저씨, 편지는 여기에 넣어주셔요."

"우편함에는 산새가 새끼를 치고 있어요."

호기심에 살금 살금 다가가

우편함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솜털 보송한 새끼들이 어미가 온 줄 알고

노란 입을 짝짝 벌립니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얼른 뒷걸음쳐 도망쳤습니다.

어린 것들이 다 자라 날개가 돋치면

철이 아빠의 고마움을 부리에 물고

저 파란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습니다.

24. 2012년 조선일보 [시 당선작] 조련사K - 한명원

조련사K /한명원

그는 입안에 송곳니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어 혼자 있을 때 네 발로 걸어도 보았다. 야생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조련은 가늘고 긴 권력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손으로 옮겨갈 때 가벼워진다. 눈치를 보는 것들의 눈빛은 언제나 심장을 겨냥하는 법. 다만 두려운 것은 손에 들려 있는 권력일 뿐이니까.

조련사 k. 그는 아침마다 동물원을 한 바퀴씩 도는 순방이 있다. 금빛 은행잎이 k의 머리 위로 왕관처럼 씌워진다. 철조망에 갇힌 초원이 펼쳐져 있다. k는 손을 흔들거나 휘파람을 분다. 잠자던 맹수가 눈을 뜨더니 달려온다. 무릎을 꿇는다.

k는 맹수의 꼬리를 목에 두르고 맹수코트를 걸치고 곤봉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k의 얼굴에 구레나룻이 생기고 몸에 털이 자라고 손톱은 길어졌다. 모든 모의謀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다. 말 안 듣는 맹수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맹수보다 더 맹수처럼 사나워져갔다.

얼마 전 야생의 모의謀議가 철조망을 빠져나갔다. 그 후 k의 통장으로 감봉된 월급이 들어왔다. k는 자기 목을 조르는 조련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에 털이 빠지고 손톱이 빠졌다.

조련으로 청춘을 보낸 k는 결국, 야생을 놓치고 말았다.

새로운 조련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맹수들과 더 빨리 친해졌다. 동경하던 야생은 저 쪽에서 어슬렁거렸다. 이빨 빠진 맹수 한 마리가 다른 맹수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렸고 금빛 왕관은 가을 저 쪽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얼마간 퇴직금의 조련을 받는 힘없는 맹수가 되어 있었다.

25. 2012년 조선일보 [시조 당선작] 외계인을 기다리며 / 양해열

외계인을 기다리며 /양해열

끽해야 20광년 저기 저, 천칭자리한 방울 글썽이며 저 별이 나를 보네공평한 저울에 앉은글리제 581g*!

낮에 본 영화처럼 비행접시 잡아타고마땅한 저곳으로 나는 꼭 날아가리숨 쉬는 별빛에 홀려길을 잃고 헤매리

녹색 피 심장이 부푼 꿈속의 ET 만나새큼한 나무 그늘에서 달큼한 잠을 자고정의의 아스트라에아,손을 잡고 깨어나리

비정규직 딱지 떼고 휘파람 불어보리낮꿈의 전송속도로 밧줄 늘어뜨리고떠돌이지구별 사람들하나둘씩 부르리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또 다른지구’가 골디락스존 (GoldilocksZone)에서 최근에 발견되었다.

26. 2012 경향 신춘문예]시 부문/ 최호빈-그늘들의 초상

그늘들의 초상 / 최호빈

외팔이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는 하얀 레코드 판 위로 한 아이가 돌면

걸음마다 붉은 장미가 피어난다 오선지에 적힌 외팔이의 과거를

한 페이지씩 뒤로 넘기면 검게 변해버리는 장미, 같은 자리를

다시 지날 때 멈추는 음악, 검은 장미의 정원 줄이 끊어진 듯 문은 닫히고

검은레코드판 위로 한 줌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는 잿빛 음악이

무책임한 허공을 읽는다

*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십시오.

안내 방송이 끝나기 전 먼저 도착한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

태어나자마자 걸친 인간의 가죽이 낱설어서 울면,

목에서 흘러나오는 짐승의 잡음을 따라 다른 영아들도 울었다.

우는 자에게 위안은 더 우는 자를 보는 것 전생과 후생 사이를

감지하는 나의 두개골은 밀봉되기를 거부했고 뒤늦게 나타난 간호사가

기껏 흘린 피를 지워주었다. 차지해야 할 자리를 잡지 못한

오감의 무중력 속 나는 갈라진 틈의 눈으로 울다가 낯선 요람에서

잠을 깨기도 했다.

*

울음마저 피곤하게 느낄 때 내게 열리는 것

보일 듯 말 듯 소중해지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움직인다

기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책상과 옷장과 침대가 말없이 싸운다

젖은 옷을 입은 채 나를 말리기 위해

회의적인 귀를 바닥에 대면

잠든 나에게 속삭이는 누가 있다

집으로 돌아기진 못한 소식들이

무언가에 부딪혀 움푹해진 순간으로 흘러든다

예전의 마른 상태로 돌아가는 소매

팔보다 긴 그림자를 흔드는 소매

나조차 없는 느낌의 문 속엔 아무도 없는데

속삭임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내 귓속엔 하루를 순환하는 입이 살고 있다

27. 2012년<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안미옥 / 나의 고아원

나의 고아원 (외 1편) / 안 미 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식탁에서

내게는 얼마간의 압정이 필요하다. 벽지는 항상 흘러내리고 싶어 하고점성이 다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냉장고를 믿어서는 안 된다. 문을 닫는 손으로.열리는 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옆집은 멀어질 수 없어서 옆집이 되었다. 벽을 밀고 들어가는 소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게다리가 네 개여서 쉽게 흔들리는 식탁 위에서. 팔꿈치를 들고 밥을 먹는 얼굴들. 툭. 툭. 바둑을 놓듯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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