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제비가 왔다 / 김희자

희라킴 2019. 10. 31. 19:08



제비가 왔다 


                                                                                                                                 김희자


 밖이 요란하다. 녀석이 또 왔는가 보다. 마당에 고양이가 나타나자 불안한 제비가 목청을 높인다. 보호 본능을 발휘한 제비 떼가 낮게 날며 고양이를 경계한다. 새끼를 보호하려고 경계하자 고양이도 담 아래 숨어서 호시탐탐 어린 제비를 노린다. 이럴 땐 누구 편에 서야 할까? 먹이사슬에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매번 고양이를 쫓아낸다. 이제 막 날개에 힘이 생겨 비행 연습을 하는 새끼제비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연록이 다투어 눈을 뜨던 사월,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 제비가 온 걸 알았다. 공중이 하도 소란하여 시선을 두니 제비 몇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서 지절대고 있었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제비를 만나니 나도 몰래 환호성이 터졌다. 옛 동요처럼 푸른 바다 건너서 봄이, 봄이 왔다. 제비 앞장세우고 온 봄은 천지를 꽃물로 들이더니 수채화 같은 풍경을 그렸다. 빨랫줄에 나란히 앉은 제비 가족이 반가웠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자 뒷집 엄마와 마루에 앉았던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을 엿들었다. “요즘은 제비도 게을러 헌 집에서 새끼를 키워요!" 새집을 짓지 않고 헌 집에서 새끼를 키운다며 쯧쯧 혀를 찼다. 책상 앞에 앉았던 나는 문틈으로 새어드는 말을 듣고 씩 웃었다. 어머니는 제비가 게을러졌다고 하셨지만 내가 봐선 그렇지 않았다. 늦은 밤까지 빨랫줄에 앉아 지저귀던 제비는 첫새벽에 깨어나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 공중을 날던 제비가 아랫집 뒤란 처마 아래로 드는 걸 목격했다. 처마 아래엔 제비 둥지가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제비는 새집을 짓지 않고 헌 집에 드나들었다. 옛집을 한동안 맴돌더니 흙과 지푸라기로 둥지를 단장했다. 어떤 날은 자기 몸집의 몇 배나 되는 지푸라기를 물고 와 둥지로 들었다. 안전하고 포근한 보금자리를 꾸미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벌건 대낮에 짝짓기를 하려는지 전선 위나 빨랫줄에 앉아서 애정행각을 벌였다. 알을 낳아 품으려고 감나무 아래서 사랑을 나누었다. 마루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는 제비가 빨랫줄에만 앉으면 나를 불렀다.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면 제비는 재빠르게 날아갔다. 제비가 날렵하게 나는 것은 하늘을 나는 어떤 벌레보다 빨라야 먹잇감을 얻기 때문이다.

 왁자한 도심과는 달리 고향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공기가 좋아 자연이 살아 숨 쉰다. 요즘 나는 ‘지지배배, 지지배배…’지절대는 소리 때문에 잠을 깬다. 수다쟁이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뜨면 새벽이다. 새벽녘 지절대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고향 집에 머물고 있음을 실감한다. 생명의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는 제비는 그야말로 부지런하다.

 부지런도 하지만 재빠르기 때문에 우체국을 상징한다. 반가운 소식을 재빠르게 전달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일제 식민지 시절 날쌔게 만주까지 달려가는 급행 기차 이름이 제비였고 수년 전 영화화된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이야기에도 제비가 등장했다. 영화 제목은 청연靑燕, 파란 제비였다. 제비는 고속열차처럼 빠르고 비행기처럼 날쌔게 움직이는 것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비 속도를 배워 비행기를 만들고 항해술을 배워 나침반과 레이더를 만들었다.

 내 유년 시절에 봄이 옴은 곧 제비가 온다는 의미였다. 해마다 춘삼월이 되면 봄을 업고 제비가 왔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강남으로 갔다가 3월 3일 삼짇날에 돌아왔다. 수가 겹치는 날에 갔다가 돌아오는 새라고 해서 길조로 여겼다. 제비가 왔다는 건 한마디로 희망이었다. 돌아온 제비는 처마 밑에 둥지를 틀었다. 사람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른 새는 높은 나뭇가지 위나 깊은 풀숲에 둥지를 틀거나 알을 낳는데 유독 제비만이 사람과 가까웠다.

 집에 제비가 둥지를 트는 것은 좋은 일이 생길 전조라 믿었고 새끼를 많이 치면 풍년이 든다고 여겼다. 또한, 제비를 다치게 하면 벌을 받는다고 하여 조심시켰다. 어디 그뿐인가. 행운을 물고 오는 영물이라며 신주 모시듯 했다. 그만큼 제비는 사람과 친밀했다. 제비에 대한 믿음과 사랑 덕에 흥부전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나 요즘 제비는 귀찮아하는 사람들의 낌새를 알아채고 피하는 모습이다.

 바지런한 제비가 새끼를 기를 땐 하루에 삼백 번이나 먹이를 물어다 나른다. 어미 제비가 먹잇감을 물고 둥지로 돌아오면 새끼들은 저마다 노란 주둥이를 쩍쩍 벌리고 먼저 달라고 아우성친다. 영리한 어미 제비는 먹이를 준 녀석과 주지 않은 녀석을 신통방통하게 구별한다. 주둥이를 제일 크게 벌린 새끼에게 먹이를 물린다. 배가 가장 고픈 새끼가 입을 가장 크게 벌리는 까닭이다. 이처럼 제비가 알을 낳아 새끼를 치는 모습은 사랑 그 자체이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 나 역시 고향을 떠났다가 옛집으로 돌아왔다. 옛 둥지에 돌아와 제비처럼 꿈을 꾼다. 천혜의 자연과 선조들의 지혜가 깃든 고향에서 작품을 하나둘 낳아 기르고 있다. 작품 한 편, 한 편을 인물 좋게 키워 더 넓은 세상으로 내보낼 요량이다. 먼 길 갔다 돌아온 제비처럼 나도 청운의 꿈을 펴기 위해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는다.

 고양이를 경계하는 제비를 지켜보다 오늘도 난 약자 편에 서고 말았다. 하지만 고양이가 매번 새끼제비를 노리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제비 부부는 둥지 가까이에 얼씬 못 하게 위협한다. 제비집을 살며시 엿보니 비행 연습을 하던 새끼제비 다섯 마리가 모두 들어 비좁다. 비행이 서툰 새끼들이 웅크리고 앉아 먹잇감을 물고 올 어미를 기다리고 있다. 여름 동안 날개에 힘을 돋워 남쪽 나라까지 가기 위한 비행을 꿈꾼다.

 천상을 그리워하는 것은 모두 날개가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다. 인간이 하늘로 오르고 싶다는 희원希願은 꿈에 불과하다. 기대하며 바라는 게 멀면 멀수록 그것은 얼마나 애달픈 일인가. 나는 새처럼 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날개가 없다 하여 어찌 비상을 꿈꾸지 않으랴. 새는 하늘이 있어 날개를 퍼덕이고 꽃은 바람이 있어 향기를 날린다. 진정한 작가는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 눈을 크게 뜨고 세상 보는 생각의 날개를 달아야 한다.

 나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비상하지 못했다. 물이 뒤돌아보지 않고 흘러가듯 나는 한시도 뒤돌아보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생각의 날개가 더는 녹슬지 않게 이제는 새끼제비처럼 비행 연습을 하려 한다. 침묵하며 지낸 세월을 저버리고 자유를 향한 날갯짓을 하기 위해 잠자리 날개 같은 비단옷을 입는다.

 이제 남은 일은 침묵하던 언어를 토하는 것. 내 몸은 지상에 있지만, 영혼은 우주를 유영하기 위해 비상을 꿈꾼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여행하기 위해 비행 연습을 하는 저 청연처럼.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머니의 숟가락 / 이은정  (0) 2019.11.09
걸(乞) / 박경주  (0) 2019.11.03
풍로초 2 / 정성화  (0) 2019.10.28
무심의 의자 / 최민자  (0) 2019.10.28
계절풍 / 김경순  (0) 2019.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