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2019 호미문학대전 흑구문학상 대상] 발톱 / 조미정

희라킴 2019. 10. 11. 19:29

[2019 호미문학대전 흑구문학상 대상] 



발톱 


                                                                                                                                          조미정


 발톱이 못생겼다. 세월에 풍화되어 바위만 남은 봉우리가 발가락 끝마다 하나씩 뭉텅 솟았다. 크기마저 제각각인 오합지졸이다. 발이 몸의 뿌리이고 발가락이 지렛대라면 발톱의 역할은 무엇일까.

 무생물 닮은 발톱이다. 발의 한 부분이면서도 변변한 뼛조각 하나 나누어 갖지 못했다. 오로지 죽은 세포로만 툽툽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둥글넓적하니 인상 좋아 보이지만 사자처럼 포효하거나 독수리처럼 낚아채는 맛은 없다. 말발굽처럼 두툼하기만 해도 좋으련만 피부의 혈색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발톱은 멀겋다 못해 파리하다.

 케라틴이라는 성분이 조갑근에서 처음 만들어질 때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하다. 표피 밖으로 돋아나오면 갑각류의 껍데기처럼 단단해진다. 몸의 가장 낮은 곳에 발을 구겨 넣고 바닥과 맞붙어 싸우려면 작은 갑옷이라도 두를 수밖에 없었나 보다. 음지에서도 아등바등 최선을 다하는 발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남편에 대한 일이 또각또각 튀어 오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이 끌렸다. 특출해 보여서라기보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눈빛이 털털한 성품과 맞물려 사내답기도 하고 소년 같기도 했다. 가진 재산은 없어도 두둑한 배짱 하나만으로 차근차근 삶의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몸 위에 융기한 산맥처럼 믿음직스럽고 우뚝해 보였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묵정밭을 옥토로 일구어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였다. 하나 둘 아이들이 태어나고 살림살이도 쑥쑥 늘어갔다. 머지않아 삶의 터줏대감이 되겠다 싶던 어느 날이었다. 금융위기라는 느닷없는 삶의 타격에 발톱은 무참히 등을 찧고 시꺼멓게 멍들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생존경쟁에서 도태된 남편은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물에 빠진 개미처럼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때로는 공사판에서 무거운 벽돌을 지고 날랐고, 적성에 맞지도 않는 외판원이 되어 골목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어떨 때는 후배가 운영하는 공장에 기거하며 기계 부품을 찍어내는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기도 했다.

 하루는 객지에 혼자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있다 싶어 바리바리 보따리를 싸서 찾아갔다. 염려 마시라, 당신 건강만 잘 챙겨라 노래를 부르더니 남편의 거처는 뜻밖에도 불빛이라곤 없는 산 속이었다.

자재 창고 곁에 투박하게 딸린 방이었다. 참나무로 만들었다고는 하나 내무반 같은 구조의 단체실에 기거하는 사람이라곤 남편 하나뿐이었다. 세간 살이 하나 없는 방에 덩그런 이불 한 채만이 음습한 동굴을 만들고서 여기에도 누군가 깃들어있음을 외쳐대고 있었다.

 천정에는 빗물이 샜다. 내 앞섬에도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얼룩덜룩 무늬를 그렸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요즘 무슨 일을 하냐고 누군가 물으면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 무렵의 남편은 숨기고 싶은 발톱을 닮아 있었다.

 식구들 입에 풀칠하랴, 산더미 같은 빚을 갚으랴, 남편은 나날이 푸석하게 변색되어 갔다. 남들보다 곱절 힘든 시간을 견디면서도 고생이라 생각지 않았던 것은 바닥을 박차고 나가야하는 발톱의 의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힘내세요!’ 연필로 꾹꾹 눌러쓴 쪽지 한 장에 힘을 얻은 남편은 전에 없이 결연한 눈빛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곤 했다. 하지만 번번이 밀려오는 삶의 파도 앞에서 버젓이 다시 일어서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언제쯤 멍든 발톱은 온전한 삶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을까. 걱정보다 실망이 앞서 어느 순간부터는 한숨이 먼저 나왔다. 체념이라는 각질은 자라나오는 대로 단박에 잘라내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참고만 있자니 내 속은 썩을 대로 썩어서 말이 아니었다. 두둔할수록 내향성발톱처럼 아픔만 파고든다 싶어 어떨 때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확 뽑아버리고도 싶었다.

 걸을 때 몸무게의 세 배, 뛸 때는 일곱 배를 견뎌내는 발. 지구를 세 바퀴 이상 걸을 수도 있는 발이 무너져 내리자 발톱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휘몰아친 태풍에 뿌리째 뽑혀나가고 말았다.

 거래처 사람을 만났다가 빈손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던 길이었다. 차창 밖에는 빗줄기가 세차게 뿌려대고 가로수가 미친 듯 춤추고 있었다. 험악한 날씨에 밤길 운전한다고 나도 잠을 뒤척이던 그 시각, 빗길에 미끄러진 차가 전봇대를 들이박고 논두렁으로 굴렀다. 형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남편의 마음이었으리라.

 발톱은 통증을 모를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생으로 찢겨진 발톱은 건드릴 때마다 눈앞이 아득해진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은 잠시뿐이었다. 그 흔한 배웅도 없이 혼자 쓸쓸히 대문을 나서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그동안 발톱은 은근히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졌는데도 자주 매만지던 손톱이나 머리카락과는 대우부터 달랐다. 어쩌다가 페디큐어로 덧칠하는 것이 전부였을까. 습하고 꽉 막힌 신발 속에서 지그시 머리가 눌리거나 휘어져도 못 본 척할 때가 더 많았다. 손톱보다 더디게 자라는 것도 본래의 느긋한 성품이라며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발톱이 없으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래 걸으면 머리털을 깎인 삼손처럼 무력해진다. 신발 안을 들여다보면 통통 부은 발가락이 빨간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다. 바닥이 주는 충격을 고스란히 껴안은 탓이었다. 땅을 박차고 나아가고자 할 때도 도무지 힘을 받지 못해 비틀거린다. 막상 발톱이 빠지고 나니 그 소중함을 알겠다.

 몸의 말단에 등을 붙인 발톱은 몸의 골무요, 생의 최전방에 선 전사였다. 발톱이 있어 해체 직전의 한 가정이 온전할 수 있었고 나아가 식구들도 마음 편히 온전한 직립을 할 수 있었다. 몸이 앞으로 나아갈 때도 발톱이 제일 먼저 앞장선다. 그 작은 몸으로 바닥을 움켜잡아야만 걸음도 힘차게 한 발자국 내디딜 수 있기 때문이다. 발톱은 잘라 내고 또 잘라 내도 잡초처럼 끊임없이 다시 민숭민숭한 머리를 내민다. 그 끈질김을 삶의 바닥을 마주할 때마다 매번 솟아나는 용기 혹은 범접할 수 없는 용맹함이라고 칭한들 누가 감히 반박할 수 있을까.

발톱이 열 개인 이유는 여럿의 힘을 합쳐야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도 서로 어깨를 맞대고 어우렁더우렁 함께 해야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다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듯하다.

 오늘도 삶의 가풀막을 바삐 오르내렸을 남편의 발톱을 들여다본다. 고된 인생수업을 하느라 빠지고 자라기를 반복한 그 오랜 인고의 시간들을 자꾸만 쓸어주고 어루만져주고 싶다. 손으로 꾹꾹 눌러 지압을 해준다. 발톱이 뿌리 내리지 않은 곳은 없는지 온몸의 뼈마디까지 다 시원해진다며 내 쪽으로 돌아눕는 남편이 초승달처럼 흐흐 웃고 있다.

 발톱은 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