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공부방

나는 왜 쓰려 하나? / 성민선

희라킴 2019. 7. 18. 17:02



나는 왜 쓰려 하나? 


                                                                                                                                                                                                                                                                    성민선


수필에 대한 이론을 들으면 들을수록 수필 쓰기가 힘들어진다. 그만 쓰고 싶은 생각도 가끔 든다. 하지만 좋은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정신이 바짝 들고 수필이란 장르가 있어서 문학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된다. 잘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시나브로 직업 수필가가 되려는가 보다.

 어느 날 수필 반 지도교수님께서 "나는 왜 쓰려하나"?라는 자문을 당신 스스로에게 던지셨다. 그리고 그 대답은 "모르겠다."로 미뤄두었다. 그 질문이 내게 꽂혔다. 나는 왜 쓰려하지?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일찍이 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자문을 해보며 이 시점에서 다시 답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는 짧은 시간 동안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마음의 잡념을 청소하러 글을 쓴다."

 "정리할 것이 많아서 하나씩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쓴다."

"떠나보낼 것은 떠나보내야 새로운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것들이었다. 번개같이 독자들이 등장했다.

 "독자를 뭐로 알고?" "독자는 청소거리나 읽는 사람인가?" "독자가 왜 내가 쓰는 글을 보아야 하는 건데?"

  독자에 생각이 미치면 홱홱 머리가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독자이기 때문에 자동으로 되는 일이다. 독자로서 내가 작가들에게 바라는 바 따로, 쓰는 사람으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바 따로, 잠시 헤매다가 결국은 독자가 판정승이다.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주제가 살아있는 글을 써서 내보이는 것이 글의 세계에서 최소한의 예의이며 그것이 독자에 대한 예의이기도 한 때문이다. 독자를 이길 작가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란 이름을 쓰는 한 작가는 독자들에게 귀속된 운명이다. 그러면 생각해 보자.

 "내가 정리하고 청소하겠다는 것이 애초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혹시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처음에 다짐했던 대로 '마음수행'을 계속하는 것이라면, 그대로 하면 될 것이지 왜 또 무엇을 자꾸 정리한다는 말인가? 또 다른 수행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수행이라면 혼자 하면 될 것이지 보이기 위한 수행을 하는 건 아닌가? 혹여 수행이 부진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건 아닌지? 만일 이런 것들이 사실이라면 이도 저도 모두 나의 욕망일 뿐이다.

나는 첫 수필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의 과분한 호응을 받았다. 비록 한정된 수의 독자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썼던 것에 독자들이 공감을 해주었다. 여러 친구, 지인들이 책을 정독하며 푹 빠졌었다 했다. 한 친구는 이사갈 때 다른 책들은 다 버리고 내 책은 가지고 갔다고 해서 고맙기까지 했다. 나는 글 쓰는 수행을 이어갈 자량資糧과 용기를 얻었다. 그러면 계속 써나가면 될 것 아닌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세상에 말하고 싶은 것은 없다. 이미 좋은 말들은 다 말해졌고 내가 해야 할 새로운 말들은 없다. 한다 해도 중언부언이거나 기술적인 절묘한 표절이거나 군더더기들일 것이다. 내가 꼭 해야 할 말은 없으며 나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과 잘 소통하며 살고 있다. 나는 글을 쓰지 않는 남편의 '쓰지 않는' 책에 대한 최고의 애독자이다. 그는 글을 쓰지 않고, 나는 그의 글을 듣는다. 그의 말을 읽는다. 내가 내놓은 글이 기껏해야 정리하고 청소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는 아무 독자에게도 자기의 말을 들어달라고 말하지 않으며 글도 쓰지 않는다. 그는 계속 읽고 사유한다. 이미 좋은 책들과 글들이 있는데 그가 보탤 것이 뭐 더 있겠냐는 저 오만하면서도 지극히 겸손한 독자, 그는 나를 질리게 한다. 고급 독자들의 세계가 다 그러하리라.

 독자로서 나는 어떠한가. 역시 문학도 공부를 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수필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한 편의 수필 속에 작가의 창의적인 '발견'이 들어있는 것을 보게 되면 마치 내가 그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신기하고 환희롭다. 글이 세상에 나오면 그것은 이미 독자들의 것이다. 소재가 무엇이든, 글의 주제에 공감하고 더 나아가 재미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글을 쓰는 이가 자기의 발견을 전할 때 독자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바랄 나위  없이 좋은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다. 매월 쏟아져 들어오는 월간지들과 문예지들의 홍수 속에서 눈길이 가는 구슬 같은 빛나는 작품들을 만날 때 나는 마치 그 작가와 함께 홍수를 피해 섬으로 피신한 것처럼 안도한다. 나는 노련한 수필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수필을 '생활 속의 문학' 혹은 '생활 속의 철학'으로 끌어올리고 그를 위해 바친 개별적인 인고의 시간과 쌓은 공功이 심대하니 그것에 감사하고 함께 기뻐한다.

 자 이제 나는 결정을 해야 한다. 무엇을 정리하고 청소하려고 하나? 나는 먼저 그 말부터 버리려고 한다. 정리할 것도 없고 청소할 것도 없다. 또 그 버린 자리에 또 뭘 채워 넣을 생각도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쓰겠다. 교수님(송하춘 교수이시다)은 문제를 제기했던 날 사실은 근사한 답을 동시에 알려주셨다. 그는 소설가지만 소설을 구상하면서 꿈 속에서 시를 쓰는 시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시란 것이 소설이나 수필 등의 글과 달라서 '자초지종'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마음[詩心]을 캐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 그것이다. 자초지종을 맞추지 않고 시를 쓰듯이, 무엇이 되었든 마음을 사로잡는 한 줄기 글줄을 잡아야겠다. 그것은 수필의 소재나 제목 혹은 주제도 될 수 있고 아름다운 문장일 수도 있으며 상징이 담긴 단어일 수도 있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대한 메모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왜 쓰느냐는 거창한 이유를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다듬고 고쳐 쓰라고 컴퓨터가 있는 것이지, 글쓰기 공장에서 나온 것과 같은 완전한 글은 없다. 컴퓨터는 글을 고치는 데 최적화되어 있고 글은 고칠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손으로 최대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메모했거나 몇 줄 적어 놓았던 글을 출발점으로 해서 그 글이 이끄는 방향으로 글 속 시간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의 길에서 한편의 글이 정리될 때까지 글을 숙성시켜 볼 일이다. 발효식품을 만들 때 자료를 다 넣고 기다릴 일 밖에 없는 것처럼, 너무 애쓰지 않으려 한다. 이제부터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글쓰기를 즐기려 한다. 애쓰지 않는 애씀의 노고를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