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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글쓰기가 두려울까? / 강원국

희라킴 2018. 10. 21. 18:12



왜 우리는 글쓰기가 두려울까? 


                                                                                                                                  강원국


 기업 CEO나 공무원 조직의 수장은 물론 대학 교수들조차 글쓰기를 힘들어한다. 다른 일은 위로 올라갈수록 잘하고 익숙한데 글쓰기는 예외다. 장관이 사장이 사무관이나 사원 대리보다 글쓰기를 더 어려워한다. 물론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유독 심하다는 것이다. 열이면 여덟아홉이 고충을 토로한다. 왜 그럴까. 우리만의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 글을 읽느라 쓸 시간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우리의 리더가 어떤 사람들인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분들이다. 글쓰기를 배우지 않았다고 어려워할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한눈 팔지마!”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다. 첫째, 관찰이다. 글은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사람이 잘 쓴다. 아니 그런 사람만이 쓸 수 있다. 대상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사건이건 말이다. 그러려면 한눈을 팔아야 한다. 내 고향 사투리로 ‘해찰’을 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보란 데만 보는 사람이 성공한다. 학교 다닐 적에는 선생님께 ‘주목’ 잘하는 학생, 사회 나와서는 목표만 보고 돌진하는 사람이 출세한다. 경주마처럼 옆을 가리고 앞만 보고 질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주의가 산만한 사람’, ‘집중력과 목표의식이 부족한 사람’이다. 계절이 바뀌면 수업시간에 창밖을 내다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분필을 던지셨다. 그런 세월을 잘 견뎌낸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리더다. 해찰하지 않았다. 선생님만 봤다.
 
“질문 없나요?”
  둘째, 질문이다. 지금도 미스터리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기자들, 학교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다는 기자들, 질문하는 것이 본업인 기자들이 질문하지 않았다. 2010년 G20 정상회의가 끝나고 오마바 미국 대통령이 개최국인 한국 기자들에게만 질문 기회를 줬다. 끝까지 질문하지 않았다. 한국말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기자 탓할 게 못된다. 삼성전자, 현대차에 가도 공무원 조직에 가도 질문하지 않는다. 학습이 잘 된 결과다. 우리 사회는 궁금해지면 위험하다. 상사의 생각에 의문을 품거나 의심하는 사람,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 뒤를 캐고 다니는 사람이 된다. 받아 적는 게 장땡이다. 밑줄 쫙쫙 긋고 번호 매기고 ‘야마’ 잘 잡고 상사 의중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시키는 것 잘하면 출세한다. 묻는 건 하수다. 의중을 파악해서, 행간을 읽어서 실행해야지. 시키지 안한 짓도 잘해야 고수다. 그래야 성공한다.

“너는 왜 그렇게 감정이 앞서?”
  셋째, 감성이다. 독자는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좋아한다. 본문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저자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서 아닐까. 니체의 글이 격동을 일으키는 것도 글에 감정이 배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감정이 앞장서야 좋은 글이 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때, 그리움이 사무칠 때, 슬픔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진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회사 문서 하나에도 이 일을 꼭 하고 싶은 열의나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나야 상사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감성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에게 “저 친구는 감정적이야.” “당신은 왜 그렇게 감정이 앞서?”라는 낙인을 찍는다. 감정을 잘 감추고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인격 수양이 잘 된 사람이다. 감정이 메마르고 냉철한 사람이 대접받는다. 그런 지성인(?)이 득세한다.

“당신 한가한가봐?”
  넷째, 재미는 글의 거의 전부다. 재미없는 글은 읽히지 않는다. 재밌는 글의 범위는 넓다. 내가 모르던 것을 알게 해주는 글은 재미있다. 새로운 관점이나 시각을 제시해주면 참 재미있는 글이라며 주변에 권한다. 통찰을 주는 글을 보면 ‘거 참 재밌네.’하며 감탄한다. 재미있는 글을 쓰면서 쓰는 사람이 재미있어야 한다. 글 쓰는 게 재미있고 사는 게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가.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보면 ‘실없다’고 한다. ‘저 친구 요즘 한가한가보다.’고 한다. 웃음, 놀이, 재미에 제값을 쳐주지 않는다. 구글 같은 기업이 놀이를 권장하고, 미국 대통령 연설팀에 조크 담당만 따로 두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들은 사람과 시간이 남아돌아서 재미와 웃음을 추구하는가. 한국 축구가 세계 4강에 다시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이 설득력 있다. 우리 국가대표는 축구를 재미로 놀이로 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애국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한계가 있다. 창의와 창조는 엄숙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근엄함은 즐겁지도 않다. 권위적일수록 재미는 없다. ‘나는 재미없는 사람’이란 게 무에 그리 자랑이라고, ‘저 친구 웃기는 녀석’이라고 비웃나.

“저 친구는 사람만 좋아”
  다섯째, 공감력이다. 우리 민족은 정(精)이 많다.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공감력을 잃기 시작했다. 과도한 경쟁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경쟁을 가장 잘하는 나라다. 경쟁심이 제일 센 국민이다. 늘 비교한다. 지고는 못산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공감능력이 없어야 출세에 유리하다. 공감력이 있을수록 경쟁에 불리하다. 그런 사람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저 친구, 사람은 참 좋은데…” 감정이입, 역지사지 능력, 즉 공감력 없이 글을 잘 쓸 수 없다. 공감력 없는 사람이 글 쓰는 것은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시인은 사물에 감정이입한다. 소설가는 작중 인물로 역지사지가 가능한 사람이다. 보고서 하나를 잘 쓰려 해도 조직 또는 상사와 교감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글쓰기는 독자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당신 왜 그렇게 까칠해?”
  여섯째, 비판력이다. 가시 없는 글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반론, 반박이 있어야 글이 박진감 있다. 싸움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치고받을수록 생산적이다. 더 나은 대안, 창의적 해법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동조하지 않으면, 묻어가지 않으면 모난 돌이 된다. 정 맞는다. “당신 왜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이야? 일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 문제의식이 있을 필요 없다. 문제를 진단만 하면 된다.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치고 출세하는 걸 별로 못 봤다. 입에 발린 소리를 잘해야 성공한다. 토론이 될 리도 만무하다. 반론을 제기하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내편 아니었구나. 내 말에 토를 달아? 남들 앞에서 망신을 줘? 알았어. 두고 보자.’ 관계가 틀어진다. 내편 아니면 적이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과 공존의 정신이 없다. 배제와 혐오, 타도의 대상이 있을 뿐이다.

“아예 소설을 써라!”
  일곱째, 상상력이다. 글은 기억과 상상력으로 쓴다. 과거는 기억이고 미래는 상상력이다. 현재는 없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글을 잘 쓸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위로 올라갈수록 상상력이 빈곤해진다. 이유는 세 가지다. 상상력은 엉뚱함과 맥락이 같다. 엉뚱하면 ‘너 지금 장난 하냐?’고 한다. 학교 다닐 적엔 선생님께 맞았다. 상상력은 또한 고정관념, 통념,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 자기 검열에 충실하고 지배적 생각에 학습이 잘 돼 있는 사람일수록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이미 있는 정답을 잘 찾을 뿐이다. 나아가 상상력은 모험이다. 실패에 관대해야 발휘될 수 있는 역량이다.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패자부활이 쉽지 않다. 실패를 적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분들은 대개 그런 사람이다. 어쩌면 상상력이 빈약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갔을 수도 있다.

“쓸 말이 없다고요?”

  끝으로 경험이다. 바야흐로 스토리텔링 시대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는 경험의 언어다. 자신이 겪은 경험을 쓰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 위에 지식이 있다. 손발 보다는 가슴으로, 가슴보다는 머리로 쓴 글을 더 쳐준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서 만난 목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집을 그릴 때 주춧돌부터 놓았다고 한다. 평생 지붕부터 그려온 선생 자신을 책망했다고 한다. 경험도 맵고 짜고 쓴 이야기가 더 재미있고 값지다. 승승장구한 이야기는 재수 없다. 솔직하기만 하면 쓸 얘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쓸 말이 없단다. 우리의 리더라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또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가 왜 없겠는가.
  비단 글쓰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리더만의 숙제도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경쟁력이었던 가치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교육에서부터 기업, 공직의 조직문화에 이르기까지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