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공부방

좌표(0.0)에서 / 정성화

희라킴 2019. 3. 25. 18:06



좌표(0.0)에서 


                                                                                                                             정성화


새로운 글을 구상하고 있을 때 나의 문학적 좌표는 늘 (0.0)이다. 동서남북도 알 수 없는 허허벌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성실하게 글을 써온 것은 아니지만, 수필을 붙들고 지내온 세월이 적지 않은데 왜 이럴까. 글쓰기를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라고 한 이도 있다. 그렇다면 얼마쯤의 설렘이 있어야하는데 나에겐 그런 여유가 없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 있을 때가 아니라 지정된 날짜까지 글을 써서 보내야 할 때, 책상에 앉기 때문이 아닐까. 어디 송금을 해야 하는데 통장의 잔액이 부족할 때와 비슷한 심정이다. 힘들면 도망가고 싶고 그만 두고 싶어진다. 그런데도 왜 나는 여전히 수필 판에 머물러 있는 걸까. 할머니들에게 들은 속담이 생각난다. '간다 간다 하더니 애 셋을 낳더라.'

'호모 로쿠엔스', 단어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하고 싶은 말들을 누군가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그렇다면 말하듯이 자연스러운 글쓰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내게 요원한 일이다. 글이란 일상적인 수다가 아니고 문학이기 때문이다. 특정 분야에서 달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적어도 일만 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는 '1만 시간의 법칙', 이 법칙도 글쓰기에는 통하지 않는다. 글은 숙련된 기술에서 오는 게 아니라 직관과 감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즐거운 삶을 위한 에너지는 세 가지 경우에 가장 많이 온다는 기사를 보았다. 자율의 상태일 때, 스스로 유능하다고 느낄 때, 그리고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을 때라고 한다. 힘들어 하면서도 글쓰기를 놓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하면 즐거울 수 있을까. 글쓰기를 '좋아하는 놀이'로 받아들이면서, 한 달에 몇 편 정도의 글을 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실천해간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다. 이따금 마음 맞는 문우들과 어울려 글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글쓰기에서 오는 좌절감이나 무력감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다면 한결 나아지지 않을까.

 글 한 편을 완성한 뒤에 오는 느낌은 늘 근사했다. 옷이나 가방을 샀을 때의 기쁨보다 더 오래 갔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소재로 글을 써줄까 생각하며 글을 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다른 날에 비해 글쓰기가 순조롭다. 때로는 나와 글 사이에 다른 기운이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외출을 자제하기도 한다.

 내가 지향하는 수필은 '회화적인' 수필이다. 읽는 동안 어떤 정경이 그대로 떠오르는 수필, 섬세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지닌 수필을 갈망한다. 슬픔이란 말을 쓰지 않고도 무엇이 나를 슬프게 하는지 글로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고, 독자의 오감을 간질이는 수필이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수필이 더러 있다. 그 작품을 떠올릴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영상이 내 머릿속에 펼쳐진다. 이렇듯 좋은 작품이 주는 감동과 여운은 세월을 이긴다. 그 수필들은 대개 독특한 문체와 참신한 구성, 그리고 어휘를 끌어다 쓰는 감각이 탁월했다.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자신만의 수필 세계가 있는 수필을 만나고 싶다.

 글쓰기는 나만의 방식으로 운영해가는 '일인 가게'다. 손님이 뜸한 날은 글을 구상할 시간이 많아서, 자유로워서 좋다. 손님이 붐비는 날은 그동안 쓴 글을 평가받거나 조언을 들을 기회다. 그러니 옆집의 옷가게나 화장품가게와 경쟁할 필요가 없다. 가게 문에 기대어 "여기 한번 들러보세요"라고 소리칠 필요도 없다. 가게마다 단골손님은 따로 있는 법이니까.

 자신의 글에 대한 평판을 너무 의식하는 것은 글쓰기에 독이 된다. 그러나 객관적인 비평과 지적은 흔쾌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글에 절대적 확신을 가진 채 어떤 조언도 거부하는 사람을 본다. '우물 안의 개구리'로 끝날 사람이다. 글에 대한 칭찬이 쏟아져 내릴 때가 더 위험하다. 사실 그 칭찬도 '어제 내린 눈'이 된다. 다른 이의 호평과 찬사는 대소쿠리에 한꺼번에 담아 선반에 올려두어야 한다. 그러다가 '글기운'이 많이 떨어졌다 싶을 때 한 번씩 내려 봐야 한다.

 성형외과를 소개할 때 나오는 사진 'before'와 'after',  수술을 받으면 이렇게 달라진다는 걸 사진 두 장이 말해준다. 나에게도 차이 나는 'after'가 있다. 부탁을 한 것도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수필은 나의 정신을 수술해주었다. 언제부턴가 내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하지 않게 되었고, 비틀거렸던 내가 바로 걷게 되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내가 글과 더불어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작년 연말에 어느 종합 문예지에 실린 수필 비평을 읽으며 얼굴이 몹시 화끈거렸다. 일 년 동안 그 계간지에 발표된 수필 중에서 단 네 편만 뽑아 평을 써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평자는 지난 여름호에서 가장 잘 된 작품은 자신의 수필이었다며 그 작품이 왜 잘 되었는지 긴 설명을 늘어 놓고 있었다. 다른 장르의 작가들이 그 비평을 읽으며 뭐라고 수근거렸을까. 자신의 작품이 아무리 만족스럽더라도 '상도덕' 이란게 있지 않을까. 인용되었음을 명기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수필 속에 시 한 구절을 슬쩍 끼워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수필의 위상은 일차적으로 수필가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의 순기능은 인생을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게 만듦으로서 인생의 참값을 다시 매기게 하는 것이다. 문학 중에서 수필이 맡은 영역이라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수필은 인간의 근원에 닿아있는 문학이고, 수필의 가치는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수필을 쓸 때는 자신을 위해서나 독자를 위해서나 약을 짓는 마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