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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성의 수필에 대한 해설 / 문학평론가 김종완

희라킴 2018. 5. 15. 05:22



손광성의 수필에 대한 해설   -   묘사로 구축한 미의 세계


                                                                                                                  문학평론가 김종완
 
   만약 독자가 아름다운 글을 쓰겠노라는 야망을 지닌 수필가라면 손광성의 수필을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읽고 난 다음, 누군가가 그 정상에 이미 깃발을 꽂았다는 사실이 줄 열패감에 싸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수필 아티스트, 이런 용어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손광성이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수필 아티스트라 할 만하다. 손광성의 수필은 한 편 한 편이 모두 시라고 했다던 피천득의 극찬이 그를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손광성 수필의 아름다움은 문장에서 나온다. 그러면 그의 수필이 미사여구로 가득 차 있을까? 답은 결코 아니다이다. 그는 뛰어난 관찰력으로 사물의 특징을 단번에 파악하여 적확的確한 묘사로 아름다움을 구축한다. 화가가 데생을 하듯이(그는 사실 화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어로 사물을 생생히 재생 시킨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오죽했으면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을까. 고백하건데 필자는 묘사의 어려움 때문에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 절망감! 그런데 손광성은 그 벽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어 버린다. 그 때마다 필자는 감탄하고, 감탄하면서 시기심을 느끼다가 결국 또 감탄하고 만다. 데생한 사물에 색을 입힐 때, 그 색은 손광성이 자기 몸으로 육화시킨 색이다. 고흐의 하늘이 노란색이듯, 색이 색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림일 뿐이다. 그 색이 육화 단계를 거친 다음, 인문적 차원(?)으로 해석될 때, 필자는 그 천재성에 경의를 표한다.


 배는 너무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홀쭉한 것도 아니다. 잉태한 지 네댓 달은 좋이 되어서, 눈에 거슬리지 않는 알맞추 부른 그런 여인의 배 같다.(중략)
  선은 부드럽지만 고려자기처럼 애조를 띤 것은 아니다. 이조자기처럼 튼실하다. 절재하면서도 사람의 채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그런 선이다. 가락으로 치자면 진양조는 아니고 중모리거나 중중모리쯤이나 될까? 웃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 삼화령三花嶺 협시보살 두 분 가운데서 왼쪽에 서 있는 애기보살의 웃음만큼이나 무구하다. 소박한 듯 단아하고 단아하면서도 속이 따뜻한 여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슬며시 다가가서 지그시 안아보고 싶어진다.
                                                                                                  - <돌절구> 중에서
  
  완벽하지 않은가. 미학적으로 단단한 시선이다. 그의 해석적 시선은 어느 날 수조水槽 속에 들어 있는 한 마리 도다리에게로 향한다. 도다리를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한쪽으로 몰려 있는 두 눈 때문에 그렇고, 냉소하고 있는 듯한 삐딱한 입 때문에 또 그렇다. 게다가 납작 엎드린 몸매는 무엇을 위한 겸손인지 모르겠다. 도다리를 보고 있으면 좀 답답하다. 수조 바닥에 배를 깔고 있으면서 통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사람의 시선 같은 것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표정이다.(중략)
   눈을 맞추려고 해도 시선을 주는 법이 없다. 녀석의 눈은 언제나 나의 어깨 너머로 허공을 보고 있다.

                                                                                                     -<도다리의 친절> 중에서
  
  도다리를 읽어내는 그의 시선은 폭 넓은 스팩트럼 같다. 웃음, 냉소, 체념, 무관심, 권태, 금욕, 이데올로기, 반란, 방관, 반항, 야성, 친절, 단어 하나하나만을 떼어서 본다면 이 단어들이 도무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웃음으로 시작하여 친절로 끝났지만 그 가운데 일어났던 변화는 격랑이다. 그 격랑을 승객들이 멀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파도타기를 즐기듯, 즐길 수 있도록, 끌고 가는 선장의 노련함이라니, 어찌 이것을 재주라 아니 할 것인가. 이제 손광성 문장의 특징을 찾아보자.
   첫째는 관찰력이다. 그가 화가라는 것이 관찰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달팽이의 눈을 보고 꽃의 수술같다고 본 것이라든지, 대추를 보고 잘 닦은 자마노라고 할까. 흔들리면 칠금령七金鈴처럼 좌르르 울릴 듯이라 한데서 그의 화가적인 관찰력은 탁월하게 빛난다.
   둘째는 빼어난 감수성이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시작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하늘 가득 불어오는 바람의 숨결을 느끼는 주인공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화면 가득히 담고 있다. 손광성의 수필 <제비꽃과 나플레옹>에서 우리는 함경도 들판을 뛰노는 영민한 한 어린이를 눈에 선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예민함은 어머니의 죽음마저 예감해 버린다. 어머니가 냇가로 빨래를 가실 때면 막내인 어린아이는 따라가서 혼자서 놀곤 하였다. 물놀이를 하거나, 세치내며 모래무지를 잡거나, 꽃창포 잎을 뜯어 배를 접어 띄워 보내거나, 개미들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거나. 아니면 두 다리 사이로 해서 주위 풍경을 거꾸로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미루나무들, 푸른 산 그림자, 아득히 떠가는 하얀 구름 그리고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칠월 정오의 정적....... 그 정적의 저편 언덕에서 어머니가 앉아 빨래를 하고 계셨다.(중략)
   나는 겁이 났다.(중략) 나는 엄마!”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짙게 드리워진 정적을 찢고 멀리까지 메아리쳤다. 그림 속의 어머니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이 천천히. 그리고 나를 향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의 느린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중략)
이미 그 때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나의 어머니> 중에서
  
  정적 때문이었다. 불현 듯 엄습해 온 정적의 공포. <나의 어머니>에서 어린아이가 느꼈던 이 별스런 체험은 오늘의 손광성의 감수성이 이미 그 때 어린아이의 내면에서 완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어린이는 커서 세상의 꽃마다 절절한 사연을 붙여 글을 쓰고, 세상의 소리와 냄새까지 구별해서는 거기다 갖가지 색을 입혀지면 위에 그려 놓는다. 그 감수성이 설핏 든 잠을 여윈 잠결이라 말하고 밤중에 물고기가 수면 위에 솟았다 떨어지는 소리를 투명한 소리로 듣는다.
   셋째, 비약이다. 소리에도 계절이 있다. 어떤 소리는 제철이 아니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소리들>에서 그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는 한여름의 소리로 폭죽과 폭포와 천둥소리를 꼽는다. 한여름에 폭포는 시원할 것이고, 천둥은 대부분 여름에 치니 그렇다 하자, 계절에 관계없이 터트리는 폭죽을 여름에 어울리는 소리라 한 것은 하고 끼얹는 화약 냄새만이 무기력에 빠진 우리들의 심신에 자극을 더하기 때문이라는 발상에서다. 그러다가 갑자기 뻐꾸기며 꾀꼬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라고 묻는다. 뻐꾸기와 꾀꼬리가 떠나 버린 한여름의 폭염, 문득 지겹지 않은가.
   그가 수면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 소리를 들으며,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이처럼 절실한 것을이라고 한, 문장의 맨 뒤에 붙여놓은 느낌표 같은 한마디에, 나는 억! 하는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만다. 하지만 손광성이 찾은 소리의 압권은 침묵의 소리다. 소리를 이야기하면서 침묵을 가장 높게 치는 사람이 바로 손광성이다.
 
   빈 방, 창밖엔 밤비 내리고
   어디선가 산과山果 떨어지는 소리
 
   빈산에 떨어지는 산과 한 알이 문득 온 우주를 흔든다. 존재의 뿌리까지 울리는 이 실존적 물음을, 천 년 전에는 왕유王維가 들었고 지금은 내가 듣고 있다. 이런 소리는 빈 방에서 혼자 들어야 한다. 아니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소리들> 중에서
  
  이처럼 그의 비약은 상황에 따라서 청각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점층법으로, 역전으로, 비상으로 나타난다.
   넷째, 뛰어난 해석이다. 이것은 비유라 할 수 없다. 비유란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시킬 때 사용되는데, 손광성은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 일반적으로 만들 때 사용하기 때문이다. <도다리의 친절>에서 이미 경험했듯이, 도다리의 생김새를 보면서 겸손, 금욕, 반란 등으로 해석해 내고, 장작을 패면서, 장작을 패는 것이 기실은 인생살이와 똑 같음을 알게 된다.(<장작 패기>), 지붕의 깨진 기와를 갈아 끼우면서, 그것 또한 삶의 지혜 찾기와 같음을 깨우친다. 생활이 곧 도란 말인가. <겨울 갈대밭에서>는 갈대를 얘기하고 있으나, 다 읽고 나면 갈대는 사람으로 변해 있다. <달팽이>에서 달팽이에 대한 뛰어난 관찰력에 감탄하다 보면 그 달팽이는 작가 자신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손광성 문학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의 정서의 뿌리는 잃어버린 유년의 꿈의 세계와 어려서 여읜 어머니이다. 그는 어려서 누나의 손을 잡고 월남한 실향민이다. 그의 형수와 누나는 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 그의 여인들은 모두 그를 떠났다. 어머니는, 이승의 사람이 아니고(<나의 어머니>), 누나는 시집을 가고(<누나의 붓꽃>), <돌절구>에서는 6. 25 때 헤어졌던 셋째 형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형수와는 조국의 분단으로 영영 이별을 했다. 딸들은 시집을 가고, 평생 네 번의 사랑을 했지만, 그 여인들도 사랑 고백 한번 해볼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났다.
   갑산으로 가신다고 떠난 형님은 석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폭격은 날로 심해지고, 우리는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형수님은 친정으로, 나는 아버님이 계신 둘째 형님 댁으로 가고 있었다.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밭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우리는 거기서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정자나무가 나오고 그 정자나무만 지나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리라. 뒤통수에 자꾸만 마음이 씌었다. 내가 막 정자나무 뒤로 살아지려는 순간 멀리서 형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되련님, 몸 조심하셔요....... 아버님 말씀도 잘 듣구요.......”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저녁 해를 등지고 계시리라.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울고 계실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 <돌절구>중에서
   
  슬픔의 미학. 나는 이별을 이렇게 가슴 아프게 표현한 글을 보지 못했다. 슬픔을 억제함으로써 절실한 슬픔을 자아내었다. 생략의 효과를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월남 후의 그의 생활상은 그의 작품 어디에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왜일까? 유미주의자인 그에게 고단했던 삶의 모습은 차마 언급하기 싫었을까?
   손광성의 수필을 읽으면 슬퍼진다. 모든 글쟁이의 초기 작품은 자기 고백이다. 과거의 응어리를 고백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여 자기 구원을 얻거나 최소한 자기 치료를 한다. 그러나 그는 차마 자기의 과거를 고백하지 못했다. 문학마저도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의 자존심이 거절한 것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누나를 따라 피난 온 자존심 강한 소년이 겪었을 온갖 간난艱難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었을까. 그가 입을 열어 과거를 말한다면 마음속에 곰삭이며 억눌러 왔던 한이 울음이 되어 통어通御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차마 말하지 못하리라.
   그가 살았던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들어다볼 수 있는 작품이 <달팽이>이다. <달팽이>에서 작가는 글의 마지막에 달팽이가 바로 작가 스스로임을 고백하고 있다. 새처럼 비상하려는 달팽이,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 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지만,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는 달팽이. <달팽이>에서 그 달팽이는 바로 작가였던 것이다.
   여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새처럼 보였다.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달팽이> 중에서
  
  달팽이는 뼈도 없다.” “달팽이는 날카로운 이빨도 없다.” 그도 그렇게 살았으리라. “발달한 것은 감수성뿐.” 민감하기로는 미모사보다 더하다. 사소한 자극에도 몸을 움츠리고 이마를 스치는 바람에도 고개를 숙인다. 비겁해서가 아니다. 예민해서요, 수줍어서이다. 동물이라기보다 식물에 가깝다.
                                                                             (중략)
  달팽이는 언제나 긴 목을 치켜들고 길을 떠난다. 현실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떤 비밀의 문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방황하는 영혼, 고독한 산책자.

                                                                                                           -<달팽이> 중에서
   
  그는 고독한 산책자로서 낮선 세상을 살았다. 그가 여덟 살에 처음 보았던 바다 또한 그의 문학의 영원한 고향이다. 손광성의 내면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 라고 말했던 바다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 바다는 그가 내면 깊숙이 숨겨 놓은, 지금까지 침묵하도록 강요당해 온 그의 무의식의 세계다.
   여덟 살의 사내아이였던 내 앞에 전개되어 있던 나의 최초의 바다는 몹시 성이 나 있었고, 발정기에 든 암말처럼 번들거리며 나를 향해 돌진해 오고, 또 오고 .......그러다가 호소라도 하듯 내 발 아래 허연 거품을 쏟고는 다시 물러가고 .......그리고 헛되이 거품만 남기고 아득히 수평선이 되어 돌아서 갔다. 지금도 바다는 나의 유일한 자연이고 결코 정복될 줄 모르는 나의 영원한 여성이지만, 여덟 살에 받은 감동과 경이는 이제 기억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그 후의 모든 바다는 유년기 바다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찝찔한 해초의 냄새와 함께 바다는 언제나 내가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거기 그렇게 지금도 누워서 나를 기다고 있다.

                                                                                                   -<냄새의 향수> 중에서
  
   여덟 살 때 그가 처음 본 바다는 하나의 경이였다. 그것은 잔잔하고 평온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 같은 바다가 아니었다. "몹시 성이 나 있는 포효하는 바다" 였다. 그렇다면 그런 바다의 이미지는 마땅히 남성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맹랑한 소년에게 바다는 '발정한 암말'이었다. 내가 맹랑한 소년이라 말할 때 그것은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초점화를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쓴 말이다. 구조주의자의 눈으로 보면 발정한 암말, 호소라도 하듯 등의 서술은 소년의 시선이 아닌 성숙한 제 3자의 시선인 것이다. “발정기에 든 암말처럼 번들거리며 나를 향해 돌진해 오고” “호소라도 하듯 내 발 아래 허연 거품을 쏟고,” “결코 정복될 줄 모르는 나의 영원한 여성,” “늘 함께하고 싶은 갈망의 대상.” 이런 육감적이고 패기에 찬 남성적인 문장이 손광성의 부드럽고 화려한 유미주의적인 문장 속에 숨어 있을 줄이야.
   나는 고등학생 때 미당未堂의 환갑 기념 강연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의 시 <동천冬天>을 읽으며 유미주의의 극단을 본 것 같은 충격을 받았던 나는 과연 그가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었다. 그의 시처럼 등치는 작고 선이 가는 가냘픈 여자처럼 생겼을까? 그러나 그가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무대에 나타났을 때, 그 걸음걸이의 당당함이라니.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의 미 세계가 과연 그답다라고 그를 인정했었다. 그의 여성적 유미의 세계는 타고난 천성의 자연발로가 아니라, 판소리꾼이 오랜 수련 끝에 득음하듯 그렇게 얻어낸 미의 세계라는 것이다. 나는 손광성의 바다를 보고 그의 남성성을 확인했고, 그 미의 세계가 과연 그답다라고 또 한 번 인정하고 말았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광성의 유미주의가 타고난 여성성 때문이 아니라 누구보다 강한 남성성을 산화시켜 피워낸 불꽃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남성성은 <바다><장작패기><부채의 미학>에서 잘 드러난다. 칼로 허리를 찔러도 금세 아물고 군함이 지나가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이 국경선을 긋지만 그것은 지도 위에서일 뿐이다. 무적함대를 삼키고도 트림조차 하지 않았다
                                                                                  (중략)
   바다는 기록을 비웃으며 역사를 삼킨다. 땅은 영웅들의 기념비로 더럽혀졌지만 아직 바다는 그것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중략)
  깊이도 무게도 잴 수 없는 하나의 물방울이면서 모든 물방울인 바다.

                                                                                                           -<바다> 중에서
   
   드디어 떨어지는 도끼의 무서운 파괴력. 완강하게 버티던 나무토막이 일도양단 둘로 갈라진다. 날카로운 파열음은 주변공기를 격동시키며 벼락 치듯이 하늘을 가른다. 몇 십 년 또는 몇 백 년 동안 나무속에 갇혀 있던 인고의 침묵이 드디어 경악한다. 정복자의 기쁨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통쾌하다.
   그 뒤를 따르는 송진 냄새의 저 신선함. 이 건강한 남성적 향기에는 향락적인 인상도 관능적인 자극도 없다. 그것은 살아 있는 숲의 채취요, 승자에게 바치는 축배의 향기이다.
                                                          
                                                                                                             -<장작패기> 중에서
  
   문장이 주는 박진감에 읽는 맛이 장쾌하다. 호방하고 선이 굵은 그의 이런 문장들은 하마터면 탁월한 서정성과 빼어난 묘사에 가려질 뻔하였다. 섬세하고 유미적인가 싶으면 호쾌하고 박력 있는 문체, 주제에 따라 다채롭게 변주할 줄 아는 손광성이야말로 이 시대에 흔치 않은 양수 겹장의 수필 아티스트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지 않는가.
   나는 이제 손광성의 문학 얘기를 끝내려 한다. 그는 분명 수필의 한 봉우리의 정상에 선 사람이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라는 정의는 그에게만은 맞지 않다. 그는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한마디도 고백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훌륭한 수필을 썼다. 그의 수필이 서사를 거부한 서정의 세계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구술口述의 언어로 글을 쓰지 않는다. 그는 묘사의 언어로 글을 그렸고, 그 묘사는 이미지를 창출했다. 그 이미지는 그의 삶의 배경이 되고 더 나아가 삶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삶에 빗대어 해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수필이 지향하는 높은 예술성과 지혜로운 통찰력의 한 정상에 찬란한 깃발을 꽂았다 할 것이다.
 
 
손광성
수필가, 동양화가.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와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를 졸업. 서울시립대학교 시민대학 문예창작 강사, 한국수필문학진흥 회장
불교미술대전 현대화부 우수상,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저서: <나도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 <한 송이 수련 위에 부는 바람처럼>. <작은 것들의 눈부신 이야기>.
엮은 책: <한국의 명수필>, <세계의 명수필>,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