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공부방

더 아름다워지는 꽃 / 서숙

희라킴 2018. 3. 16. 17:49


더 아름다워지는 꽃 


                                                                                                                          서숙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 순간 꽃은 파르르 더 아름다워진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살풋, 사랑은 한 겹 더 깊어진다. 생각이나 느낌은 말로 되어 나올 때 비로소 온전함의 광휘를 입는다. 그런데 어느 때는 생각보다 말이 앞장을 서서, 말이 먼저 나오고 생각이 그 뒤를 따라오기도 한다. 이때의 말은 어떤 선험적 예지력을 지닌다.
 
 언어의 파장과 울림에 의한 의미의 확장. 그것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터가 곧 문학이 아니겠는가. 귓가에 떠돌고 입 안에 맴도는 편린들에 항상 흡족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말이 있어 참 다행이다. 역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러면 별이 아름답다’, 그러한 감수성으로써 그득함에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인가. 나의 별은 반짝이는 존재 너머 행성, 항성, 광속, 우주, 그 궁금증에 나를 닿게 하려고 애쓴다. 별이 단지 아름답게 반짝이는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나의 고민이다. 그렇게 수필 하는 나의 마음은 시인의 서정만으로는 부족하여 거기에 무엇을 더 얹으려 한다. 관조자의 심미와 탐구자의 분석을 어떻게 조화롭게 유지할 것인가, 높은 지성과 깊은 정서를 희망하지만 그 진폭은 한없이 아득하다. 그래도 세상은 때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볼 가치가 있다. 눈물 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아련히 아름답긴 하지만.
 
 예술의 길이란 것이 결국은 확대되는, 또는 응축되는 자아 가운데 생각이든 감정이든 느낌이든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의 격정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표현의 막막함 때문에 사진작가는 화가를 화가는 작가를 작가는 음악가를 음악가는 무용가를부러워한다. 무한 가능에 무한 도전이다. 그 많은 자기 승화의 도구들 중에 문학이, 수필이 오롯하다.
 
 이렇게 언어가 우리에게 주는 능력 속에서, 고양된 영감과 출렁이는 느낌이 표출되는 것(dance out)과 철리에 경도된 사념이 표출되는 것(think out) 사이, 즉 정서와 사유 사이, 격정과 사상 사이, 충동과 반성 사이, 그리하여 감성과 이성 사이에 놓이는 것이 수필 아닐까.
 
 그런데 아직도 나의 시선은 창공을 가르는 새의 몸짓에게보다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류의 글귀에 더 많이 머물러 있다. ‘를 의식하고 를 주지하려는 존재의 부대낌인 관념의 보푸라기를 잔뜩 묻힌 채, 난해시로부터 서정시로의 중간 지점에 나의 시심은 놓여 있다. 건조한 이성 우위에 감성의 물기가 점차 스며드는 모양새다. 추상의 환으로부터 구체적 감촉까지의 그만큼의 정신적 거리 이동은 일종의 역주행이랄 수 있는데, 들이대는 잣대에 따라 성장, 체념, 후퇴, 포기 같은 단어들로 환치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수필을 만난 후 내게 온 변화다.
 
 주변에서 글을 써 보라는 권유가 있을 때마다, 나는 농 반 진 반으로 나무와 풀 이름을 몰라서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글을 쓰게 되었다. 동경하던 세계였으니까. 그런데 더듬거리며 글을 쓰다 보니 내가 모르는 것은 나무 이름 풀 이름만이 아니었다. 그렇건만 할 말은 더 많아졌다. 모르는 게 많으면 할 말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새로운 발견이다.
 
 이왕 내친걸음이라 모르던 것을 알아 가기 위해 꽃도 보고 나무도 보며 천천히 걷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곱고 청아한 새소리도 들린다. 모습은 감춘 채 소리만 들려주는 새들로부터 나름의 지혜를 배우는 중이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주는 대로 받고 다가오는 대로 느껴라. 새의 음색으로 미루어 생김새는 이러이러하겠거니 섣부르게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지 마라. 모르면서 알아 가는 것, 지금까지는 암중모색의 묘미가 쏠쏠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다지 신통할 리가 없는 졸속의 학습 과정에서 목숨까지야 걸었겠는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니 딱 그만큼밖에는 건져 올리지 못하는 소출을 섭섭해 하면 안 된다.
 
 스스로가 약간은 뻔뻔하고 약간은 딱하다. 그래도 나의 알아 가려는 정성과 납득하려는 노력 그리고 어설픈 성과가 꽤 많이 기특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희망이다. 모르는 것이 많을수록 희망은 더 커지는 법이다.
 
 재능과 노력. 좋기로야 뛰어난 재능에 피나는 노력이라. 그런데 어쨌든 노력 이전에 재능이다. 특별한 경험이 어우러진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나의 글쓰기는 타고난 재능으로 술술 써 내려가는 신명에 의한 것은 아니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천형을 짊어진 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내 인생의 서사 구조는 평범과 단순, 그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곰곰이 그러모은 생각의 갈피를 소중하게 펼칠 수 있는 장이 덥석 반가워,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가는 마음 자세를 가져 보는 것이다. 결 고운 비단을 장만하여 수틀 가득 다양한 문양으로 채워 보겠다고, 그러면서 나름의 분위기를 지녀 조화를 이뤄 보겠다고 공을 들인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시절이 비껴 간 복고풍의 패턴이 맘에 걸린다.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염려스럽게 보듬는다.
 
 어쩌면 내가 아끼는 것은 다 이런 식이다. 오방색 명주실 올올의 동양 자수가 화려한 검은 공단이건 오묘한 쟈가드 문양의 다마스카스 실크건 이도저도 모두 유행 지난 천 조각이다. 아름다우나 구태의연하고 소중하나 거추장스럽다. 그래도 치렁치렁한 고풍의 옷 기슭을 길게 끌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길 때, 사그락사그락 비단 자락 스치는 소리가 감미롭다. 이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을 더러 만나 둥근 이마를 맞대고 따스한 가슴을 나누며 고전적 아름다움을 위한 송가를 즐긴다. 수필과의 만남이 소중한 만큼, 아니 그 이상, 수필을 통한 만남을 생각한다. 귀한 인연, 이만큼의 선물이라니.
 
 자존과 시심과 꿈과 자유 등의 단어들을 곁에 두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분명 즐길 만한 행운이다. 나아가 습작을 넘어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을 품지만 끝내 바람에 머무른다 해도 그로써 족하다. 고독 속의 충만함, 세상을 향한 착한 호기심, 아름다움 속에 깃드는 슬픔, 그 가운데 정화되어 가는 나의 사랑. 이렇게 고요한 기쁨을 안겨 주는 수필 정경 속을 느릿느릿 소요한다. 그러다가 어쩌면 나는 고색창연한 중세의 성채를 조용히 걸어 나와, 몇 세기의 전설을 품고, 티타늄의 세련된 광택이 멋진 마천루로 단숨에 건너갈 수 있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