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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독자가 원하는 수필 / 김우종

희라킴 2018. 6. 15. 05:02

 


젊은 독자가 원하는 수필


                                                                                                                               김우종



 한국의 수필은 다음 두 가지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상상력의 공급부족으로 인한 미적감동의 결핍현상이고, 또 하나는 지나친 소재주의로 인한 품위의 격하현상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 수필가의 자질의 문제이기보다는 수필자체가 지니고 있는 본래적 특성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특성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 봐도 될 것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는 어려워도 수필가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좋은 수필가가 되는 것은 좋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보다 어렵다.
 수필이 문학으로서 시나 소설만큼 매력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처럼 쉽게 쓰인 수필이 많기 때문이다. 즉, 문학적 감동을 줄 만한 요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필은 왜 쉽게 써질 수 있고 아울러 문학적 감동을 덜 주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일까? 그리고 그 문제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

1. 허구와 사실의 차이 


 수필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산문이지만 소설에 비해서 수필이 쉽게 쓰일 수 있는 문학인 이유는 허구가 아니라는데 있다.
 소설이 지닌 허구성은 주제형성을 위한 가장 편리한 수단이다. 소설은 필요에 따라서 인물은 등장시키고 사건을 엮어나가는 것이다.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소설가는 탱크와 폭격기를 얼마든지 마음대로 출동시키며, 여기서 국방예산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필요하면 전 인류를 학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필은 허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주제에 필요한 이야기를 마음대로 꾸며낼 수가 없다. 즉, 소설은 상상의 세계에서 무한하게 소재를 끌어올 수 있지만, 수필가는 그것이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제 형성 자체가 근원적으로 어려운 문학이다.

2. 붓 나가는 대로 쓴다는 수필작법의 오진 


 외국의 경우도 비슷하지만 한국의 수필가들은 이 같은 어려움이 지닌 수필문학의 문제성에 대하여 심각한 근심을 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냥 신변적 소재를 남들보다 좀더 나은 글재주로 엮는 것쯤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이 같은 원인은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 이라는 엉뚱한 수필작법에도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필이라는 한자어부터가 그렇게 되어 있다. 붓 나가는 대로 쓴다는 것도 해석 나름이지만, 바로 그 해석 나름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해석 나름'이라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정확한 표현은 단 한 가지의 해석뿐이지 열 가지 스무 가지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애매모호한 표현을 수필작법으로 배우며 자라는 이상 거기서 좋은 수필이 나올 까닭이 없다. 이제 한국의 수필가들은 붓 나가는 대로 써지는 수필이 아니라 분명하게 좋은 작법을 의식하고 그것을 창출해내고 실현해 나가는 수필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지나친 소재주의와 수필의 품위문제 


 한국의 수필에서 자주 나타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지나친 소재주의다. 즉, 지나치게 재미있는 소재에 집착하려는 것이다. 물론 재미있는 소재를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재미있는 소재에만 집착하면 수필이 지닌 품위를 잃기 쉽다. 어떤 이는 희귀한 사건의 화젯거리를 찾고, 어떤 이는 대학생들의 은어나 특정 계층의 속어 비어 등을 소개하는 정도로 수필을 만든다. 한국의 TV 개그 프로를 보는 정도의 재미일 뿐 가슴속에 파고드는 문학적 감동이 없는 것이다. 소설에 비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기 어려운 수필의 단점을 그 같은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오직 수필의 타락일 뿐이다. 수필은 결코 소설가들이 만들어 내는 온갖 이야기의 재미와 경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야말로 수필감이 되겠네요."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은 한다. 재미있는 경험담이 곧 좋은 수필의 소재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그 같은 소재의 흥미로 인해서 젊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삼류 소설가로 전업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수필은 현실 자체로서의 우리들 삶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나 또는 우리를
관찰자로 한 남의 이야기다. 이 같은 실제성과 나 또는 우리라는 관찰자의 제한성으로 인해서 수필의 소재는 본질적으로 소설만큼 흥미로울 수는 없다. 특히 나의 신변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대다수의 수필의 경우는 그 소재가 평범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소재는 때때로 움직이지도 않는 정물이다. 돌, 나무, 차 한 잔, 풀잎, 찬 이슬이 맺힌 낙엽 등 모두 정물이다. 그리고 이것을 관찰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수필들. 수필문학의 장점은 오히려 여기서 찾아야 된다. 돌 한 개 나뭇잎 하나로는 소설가들이 아무 짓도 못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주옥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수필가다. 그리고 만일 이런 수필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안 읽힌다고 해서 그 수필의 본질과 특성을 배반해가며 대중독자의 비위를 맞출 만큼 천박해질 필요는 없진 않은가.

4. 수필도 상상력의 문학 


 문학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가 지닌 미적 감동의 근원은 상상력에서 생기는 것이다. 매 맞아 죽은 춘향을 부활시킨 허구성은 소설가의 상상의 세계이며 월명사가 낙엽을 보고 망매와의 이별을 나타낸 이미지는 시인이 지닌 상상의 세계다. 그리고 허구의 세계도 결국은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낙엽이 이별이나 죽음의 이미지가 될 수 있듯이 허구의 세계는 다른 어떤 현실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이미지다.
 이 같은 이미지의 세계가 곧 예술의 본질임을 가스똥 바슐라르도 말한 바 있다. 그는 '미적 감동이란 상상력의 견지에서 본다면 이미지가 상상력을 촉발시킴으로써 상상력이 그의 온 힘으로 그 이미지를 원형의 이미지로 밀고 갈 때, 즉 이미지가 상상력의 전적인 움직임 속에서 원형의 이미지로 동적인 변화를 수행할 때 우리가 느끼는 정신적 효과'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술의 본질인 미는 이미지에 의해서 우리가 상상력을 유발하고 느끼는 혼의 울림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상력을 유발하는 장치로서의 이미지가 곧 문학적 감동의 핵심이라면 수필은 어떤 방법으로 이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재미있는 신변적 경험담을 훌륭한 문체로 엮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의 재미는 소설이 더 잘 꾸며낼 수 있고 또 훌륭한 문체는 소설가도 가질 수 있다. 결국 수필가의 과제는 이미지의 창출에 있다.
 그런 방법의 예를 피천득의 수필 <시골 한약방>에서 보자. 여기에는 한의사와 '나'가 나온다. 값비싼 약재를 사두지 못한 탓으로 좋은 약을 지어 줄 수 없는 시골 한약방의 명의는 책들을 분실해서 좋은 논문을 못 쓰는 명교수 피천득에 해당된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상상력을 통해서 불쌍한 한약방이 누구 얘기를 빗댄 것인지 짐작하게 된다.

5.수필의 주제와 상상력 


 수필이 지녀야 할 주제의 문제에 있어서 꼭 심오하거나 심각하거나 오묘한 것이라야 훌륭한 주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소중하다는 주제를 전하기 위해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등을 많은 지식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다만 그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동을 주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 장치가 곧 상상의 세계다.
 앞에서 말한 바 피천득의 시골 한약방의 경우에서 보더라도 작자인 영문학 교수가 책들을 분실해서 좋은 논문을 쓰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감동을 줄 만한 인생의 발견도 아니고 매우 희귀한 경험담도 아니다. 특히 전쟁 중에 오랫동안 집을 비워 두었던 경우에 그런 도난사고 정도가 있었고 그 때문에 논문을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은 별로 동정 받을 만한 특수한 사건도 아니다. 그렇지만 독자가 그 속에서 전쟁의 아픔을 느끼고 한 지식인의 슬픔을 깊이 느끼게 되는 까닭은 시골 한약방이라는 엉뚱한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학에서는 훌륭한 주제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주제도 그 기법에 의해서 훌륭한 주제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미지의 창출은 그런 의미에서도 수필문학의 성공을 위해 꼭 갖춰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