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공무원 문예대전 금상(국무총리상)]
봉노
안희옥
마당엔 어느새 눈발이 성글고 있었다. 뒤란 대숲엔 멧새떼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윙윙 감나무가 울었다. 일찍 저녁밥상을 물린 우리 자매는 쉬 잠이 오지 않아 살금살금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당신을 찾아온 손녀들을 함박웃음으로 반겼다. 봉노엔 벌써 밤과 고구마가 맛깔스럽게 익어 가고 있었다. 광에서 가져 온 홍시도 녹아서 말랑말랑한 채 오지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숯불을 담아 놓는 그릇인 화로의 옛말이 봉노다. 할머니는 화로라는 말 대신 봉노라는 말을 썼다. 추운 겨울 날, 화력이 오래 간다는 참나무 장작을 태워서 남은 숯불을 봉노에 담았다. 그 위에 재로 덮어 오랫동안 불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했다. 재와 재 사이로 빼꼼하게 보이는 불꽃들이 눈을 덮어쓴 산수유 열매처럼 붉었다. 외풍이 심한 방안에 난방효과도 높이고 손녀들에게 주전부리를 챙겨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할머니 괴춤에는 옛날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화로 가에는 곶감을 등에 업은 호랑이가 달려오기도 했고 은혜 갚은 까치가 앉았다가기도 했다.
봉노는 인두를 달구어 옷의 솔기나 저고리 곡선이며 천의 구김살을 눌러 반듯하게 펴 주었다. 때론 바느질이나 길쌈을 배우러 온 동네 아낙들을 위해 따뜻한 찻물을 끓여내기도 했다. 봉노를 가운데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친정어머니가 딸을 가르치는 것처럼 따스함이 넘치는 풍경이었다. 부삽으로 불씨를 다독이는 할머니 얼굴에 엷은 홍조가 피어나는 것도 보기 좋았다.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를 요양병원에 보내고 난 뒤였다. 시골집 정리를 위해 창고 문을 열자 손 때 묻은 살림살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벽면 한쪽엔 각종 농기구와 곡식을 담은 크고 작은 자루들이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철 지난 옷과 이불을 넣은 상자며 부엌용품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묵은 세간들은 켜켜이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뿌연 먼지 알갱이가 비듬처럼 떨어져 내렸다. 삐죽이 열린 문으로 들어온 빛이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물체를 비추었다. 놋쇠봉노였다.
바깥쪽의 둥글넓적한 전이 오목하게 파여진 안쪽을 살포시 품고 있어 그 모습이 단아하다. 원통형의 내부가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는 모양으로 전의 끝부분이 살짝 밖으로 휘어져 있어 품새 또한 오달지다. 몸통을 받치고 있는 튼실한 세 개의 다리에는 높은 굽이 붙어 있고 다리의 윗부분은 약간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 부삽과 부젓가락, 삼발이까지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할머니가 저 세상으로 떠난 지 벌써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오랜 세월 창고 속에서 숨죽인 채 잠자고 있었던 거였다. 살아생전 늘 곁에 두고 애착을 보였던 물건이라 마음 한켠이 아릿거려 왔다.
타다 남은 숯덩이들까지 그대로 담겨 있는 봉노는 군데군데 거무칙칙한 얼룩들로 볼품이 없었다. 사랑채 아궁이에 찌꺼기들을 쏟아 붓고는 수돗가에서 수세미로 빡빡 문질렀다. 시커먼 물때가 쏙 빠지고 나니 말끔해 졌다. 손이라도 내밀면 금방이라도 얼음장 같은 몸이 데워질 듯 따뜻함이 느껴진다.
할머니는 열여섯에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다. 몸집이 작고 가냘팠지만 종가의 종부답게 지혜롭고 강단이 있는 분이었다. 아침이면 동백기름으로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빗어 올려 정갈하게 쪽진 머리를 하곤 하루를 시작했다. 예의범절, 음식, 바느질, 길쌈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고 층층시하의 웃어른들까지 지극정성으로 잘 보살펴서 친척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할머니의 삶은 행복한 나날이었다. 자식들은 총명하고 건강했으며 지아비는 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가정은 큰 걱정거리 없이 화목했다.
식어가는 봉노처럼 그러나 할머니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집안 곳곳 문틈 사이로 소소리바람이 시나브로 새어들기 시작했다.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를 것 같던 불꽃은 차가운 겨울바람에 휘청거리더니 끝내 힘을 잃고 꺼져버렸다. 곱게 커가던 맏딸이 어느 날 원인모를 고열에 시달리더니 갑작스런 죽음으로 할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종손인 할아버지마저 역병으로 시난고난하더니 유명을 달리했다. 할머니의 애달픈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버린 가솔들은 빠져나올 방향을 찾지 못해 허둥거렸다. 엄마만 바라보고 있는 올망졸망한 자식들과 종부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슬퍼도 울지 못했다. 꺾인 노고초처럼 마냥 슬픔에 빠져 지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종가의 맏며느리답게 걸쌈스럽게 일어났다. 살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두 손을 걷어붙였다.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동네 혼수를 도맡아 살림을 불려 나갔다. 밤새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새 아침이 희붐하게 밝았다. 화로는 기나긴 겨울 밤 홀로 길쌈을 하는 당신의 유일한 반려(伴侶)였고 삶의 버팀목이었다.
할머니는 늘 조용했지만 집안이나 동네에 없어선 안 될 분이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찾아와 의논을 하고 해결책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한번은 동네에 밀주를 단속하는 순사들이 왔다. 힘든 농사일이 주업이었던 당시는 집집마다 집에서 몰래 술을 담가 먹곤 했다. 모두들 쉬쉬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할머니가 집으로 순사들을 불러 들였다. 살림솜씨 좋기로 근방에 소문난 터였다. 맛깔난 음식들과 조근조근한 말솜씨에 감동한 밀주반원들이 그날 한집도 단속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한미한 집안의 종부로 시집와서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지혜롭게 이겨낸 할머니는 봉노였다. 행복하고 즐거울 땐 따뜻한 불씨로 가족 간 화목한 정(情)을 더해 주었고 외롭고 힘들 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동지섣달 긴긴 밤, 어린 우리를 앉혀두고 길쌈을 하며 부르던 노랫가락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강남달 강수자는, 글씨 좋아 소문나고, 강남달 강처사는, 인물 좋아 소문나고, 얼굴이나 보나 세나, 연지분에 빠진 듯이 ……”
잘 닦여진 봉노를 만져 본다. 아직도 은은한 온기가 전해진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면 토닥거리며 가만히 안아주던 품이 그립다. 놋쇠봉노 위로 할머니 얼굴이 잉걸불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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