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세 개의 의자 / 최장순

희라킴 2017. 2. 26. 20:30



세 개의 의자

 

                                                                                                                                         최 장 순

                                                                                                            

 두 줄을 꽉 움켜쥐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순간, 그네는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섰다. 두 발 사이 나를 앉힌 고모가 줄을 어깨보다 넓게 벌릴 때면 그네는 점점 더 공중으로 올라갔다. 하늘이 흔들리고 단오 무렵의 마을이 흔들렸다. 그네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였다.

 

 직립보행의 두 다리는 쉬 피로를 느낀다. 척추에 힘이 쏠릴수록 무게는 하체로 내려가고, 눈은 앉아 쉴 곳을 찾는다. 숨차게 달려오거나 꼬박 걸어온 발품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깔고 앉는 것이 편하고, 무엇엔가 기대는 것이 더 안락하다는 걸 깨달은 인간은, 차츰 의자의 형태를 생각했을 것이다. 두 발보다는 세 발이, 세 발보다는 네 발 의자가 훨씬 안정감이 있다는 것도. 높낮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어떤 재료가 좋은지, 어떤 용도로 쓰일지 등에 따라 다양하게 진화되었을 의자. 인체공학에 맞춘 가구를 넘어 과학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눕는다는 말처럼 안락한 말은 없다. 그러나 앉는다는 말은 등을 기댄다는 행위를 포함하기에 더욱 편한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불안한 의자도 있다. 과거 독재국가에서 의자는 고문기구로도 쓰였다. 잠을 재우지 않고 딱딱한 의자에 앉혀 놓음으로써 끔찍한 괴로움을 제공했던 것이다.

 

 의자는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배후가 되기도 한다. 미끈한 다리를 꼬고 앉은 뇌쇄적인 샤론스톤은 섹시함을 부각시킨다. 그녀가 침대 위에 반라로 누워있다고 가정해본다고 해도 그리 고혹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침대도 의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자의 목적이나 분위기와는 다르다. 다시 일어나 활동하기 위한 중간 쉼터, 그 작은 공간에서조차 인간은 자유자재로 포즈를 짓는다.

 

 같은 의자만으로 구성된 사무실. 신분의 차별화가 해소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제 영역을 구분 지으려하고, 제 것을 치장하거나 신분상승을 꿈꾸는 인간의 성향은 그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좀 더 안락하고 좀 더 높은 자리를 선망하는 것이 아닌가.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은, 신주쿠 빌딩숲 뒷골목에서 밤부터 새벽까지의 일상을 보여준다. 작고 소박한 가게의 주 고객은 게이바 사장, 스트리퍼, 야쿠자, 무명가수 등이다. 그들은 자신이 주문한 음식을 먹으며 첫사랑의 추억이라든가 일상의 애환이라든가 그날의 에피소드를 섞는다. 음식에 곁들인 특별한 사연들이 그들을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엮는다. 등받이 없는 그 의자가 정겨운 것은 같은 모양과 같은 크기에 앉은 쓸쓸한 마음들이 서로 얽히면서 훈훈해지기 때문이다. 그 의자엔 서열이나 직급이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의 편의를 위한 가구가 그렇듯 의자는 늘 묵묵하다. 체중이 실려도 불평이나 불만을 쏟아내지 않는 의자에게 직급이나 직함을 붙이는 것은 인간이다. 무심한 듯 귀만 열어 놓는 심야식당의 마스터 ‘아베야로’에게서 나는 또 다른 의자를 본다. 언제든 찾아가고 싶은 의자, 이야기를 들어주며 고개만 끄덕여도 좋은 편안한 의자다.

 

 세 개의 의자를 거실에 앉혀두었다. ‘소로우’처럼 그들에게 나는 제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주었다. ‘고독’과 ‘우정’과 ‘사교’다. 가족들과 같이 있어도 혼자인 듯 느껴질 때 나는 고독에 등을 기댄 채 귀만 열어둔다. 친구와의 통화를 끝내고, 그의 고민을 떠올리며 우정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걱정마. 잘 될 테니까.” 그러면 우정은 고개를 끄덕이듯 ‘삐그덕’ 반응을 보인다. 모두 외출을 나간 오후, 홀로 적적함을 죽이다가 사교에게 수작을 건넨다. 그러면 사교는 내게 넌지시 손을 내민다. 어느 때는 누가 고독이고 누가 우정이고 누가 사교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그런들 어떤가. 그 셋의 이름은 모두 같은 장소에 모여 있지 않은가. 마치 일상의 들숨 날숨이 함께 섞여 있듯. 고독은 스마트폰의 전원을 끄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홀로 혀를 끌끌 찰 것이다. 우정은, 너무 낡았다고 자신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사교는, 언제든 이런 날이 지속되기를 갈망하지 않을까.

 

 가만 생각해보면, 나를 받아준 최초의 의자는 무릎이었다. 그 건강한 무릎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은 영영 내 곁을 떠났다. 등받이가 있는 푸근한 의자. 이제 나는 누구의 의자가 되어 고단한 이들을 받아줄 수 있을까.



- <한국작가 2017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