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향기나던 나의 골목길 / 강은교

희라킴 2017. 2. 26. 11:18



향기나던 나의 골목길


                                                                                                                  강은교


 골목이 몸져누웠다. 별들의 소리가 들리는, 곧 사라질 운명의 골목의 입술은 창백하다. 포클레인의 악다구니 하는 소리에 질려버린 눈은 넓은 길옆에서 아예 빛을 잃었다. 골목에선 더는 따스한 햇살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골목의 머리칼은 짧게 잘렸으며 골목의 눈썹은 모나리자처럼 밀려버렸다. 골목에 모이던 사람도 더는 모이지 않는다. 아이들도 이미 골목에서 놀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앞 골목길에는 모래더미가 쌓여 있었는데 앞에서 소꿉장난을 하던 생각이 난다. 신랑 신부 놀이였다. 한 남자동무가 나의 신랑이 되었다. 왜냐하면 남자동무는 늘 단정히 넥타이까지 맨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으므로 신랑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느 집 담 밖으로 늘어진 꽃가지에서 떨어진 꽃잎을 주워 김치를 담그고 남자동무는 출근하는 시늉을 하면서 골목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뒤에 대고 “안녕히 다녀오세요오”하고 색시처럼 일부러 콧소리도 섞어 배웅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나의 신랑’과 최근에 다시 만났다. 반백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시절의 골목길을 이야기했다. 골목은 아득한 배경이 되어 있었다. 삶의 배경.

 그 삶의 배경 끝에서 한 여선생님의 얼굴이 일어서 왔다. 아주 작은 몸매에 입술을 꼭 다문 모습이다. 나의 초등학교 선생님, 그녀는 나의 우상이었다. 그녀는 아침마다 동화 한 구절씩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꼭 일기를 쓰게 했었다. 그 일기를 모아 학급문집을 만들기도 했었다.

 그분이 읽어주던 아침나절의 동화 한 구절, 동화의 세세한 내용은 지금 다 잊어버렸지만 동화책의 알록달록하던 겉장, 그리고 매일의 날씨를 기입하고 수박 한 덩이를 사온 심부름이야기에서부터 아버지에게 야단맞은 이야기까지, 쓸 것도 못되는 그날의 자잘한 이야기를 썼던, 넓은 칸이 푸른색으로 쳐 있던 일기장이 선연히 떠오른다. 그 일기장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나도 기록할 것이 있으며, 그런 것을 써둘 수 있을 뿐 아니라 써두어야 한다는 희망과 의무를 배웠었고, 그 동화 한 구절에서 나도 그런 걸 쓰고 싶다는 욕망을 얻었었다.

 그 삶의 배경 끝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도 일어서 왔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거기 대문 앞에 늘 서 계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뒤에는 늘 하늘이 있었다. ‘허공’이라는 강한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늘 흐린 하늘. 아버지의 골목 끝의 그 모습은 엉뚱하게도 내가 시인이 되고 난 뒤 내 시 속에 살게 되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이라는 시에선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올 때는 인적 그친/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라고, ‘사랑법’이라는 시에선 그 마지막 구절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그대 등 뒤에 있다’라고 하면서.

 그 삶의 배경 끝에서 저물녘, 천천히 동네 산책을 하곤 했던 나와 동생의 모습도 일어서 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것은 그냥 산책만은 아니었다. 나에겐 하나여행이었다. 열심히 나의 삶의 곳곳을 ‘들여다보는’ 행위. 이층집도, 단층집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견고한 담도, 골목길에 면한 가난한 단칸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집도―그런 집 속에선 으레 저녁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이 보이곤 했다.

 가족이 있는 골목은 긍정이다. 가족은 끝없이 팽창한다. 아버지는 또 아버지를 낳고 그 아버지는 또 그 아버지를 낳으며…. 그러므로 골목은 중심의 발산이다. 끊임없는 상승이다. 상승의 확산이다. 역사이며 희망이다. 꽃가지가 담 너머로 늘어진 골목에서 모든 길은 출발한다. 모든 길이 출발하는 골목에선 향기가 난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개의 의자 / 최장순  (0) 2017.02.26
당김 줄 / 배단영  (0) 2017.02.26
초록 보리밭 / 유혜자  (0) 2017.02.25
다방 / 김정화  (0) 2017.02.24
여름 엽서 / 반숙자  (0) 2017.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