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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쓰기] 둘이 아니다 /정순진

희라킴 2017. 2. 21. 19:13



둘이 아니다

                                                                                                                 

 정순진 


 내게 있어서 수필쓰기는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병원에 가서 치료할 수 있다면 그나마 가벼운 상처이다.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도 자꾸 아프고 힘들 때 나는 그 고통 속으로 깊이 침잠한다.


 사회의 온갖 곳에서 치료라는 말이 남용되어 세상이 온통 병들어 있으며, 병이란 싸워서 남김없이 몰아내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지만 사실 치료는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이나 상황도 되새기고 곱씹다 보면 그 단초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차마 남에게 내색조차 할 수 없었던 아픔도 매만지고 달래다 보면 어느새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내게 약과 글은 둘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 저절로 딱지가 앉은 상처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상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수필쓰기다. 그 고통이, 그 상처가 내게 던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곰곰 생각하고 반성하며, 끙끙 모색하는 때가 수필을 구상하는 시간이다.


 '사람'이란 '삶'이란 낱말과 '앎'이란 낱말이 합쳐서 생긴 말이니 '사람'이란 곧 '삶이 무엇인지 아는 존재'란 뜻이다. 나는 체험을 사람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는 소중한 스승의 한 분으로 여긴다. 내 체험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추구함으로써 체험하지 않은 것의 아름다움과 의미까지 상상하는 시간이 수필을 구상하는 때다. 지나간 시간도 앞으로 올 시간도 모두 지금 모두 지금, 여기로 집중하게 하는 일, 그것이 수필쓰기다. 수필로 쓰고 나면 그저 끔찍하고 징그럽기만 해 쳐다보고 싶지 않던 흉터가 내 삶을 아로새긴 아름다운 무늬로 변하기도 한다. 상처와 고통을 먹고 새롭게 태어나는 행복, 그것이 수필이다.


 내게 있어서 수필쓰기는 존재와 접속하는 일이다. 사람은 물론 사람 아닌 존재와 접속하자면 말없이 오래 지켜보고,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해가 뜨고 지는 일, 볕바른 양지와 선득한 그늘, 아침노을과 저녁노을, 바람과 구름, 천둥과 번개, 비와 안개, 눈과 서리, 달과 별, 그뿐인가. 나비와 거미, 무당벌레와 개미, 지렁이와 뱀, 사람들이 좋아하는 크고 화사한 꽃을 두고두고 바라보는 것은 물론 자세히 오래 살펴야 비로소 그 존재가 보이는 애기땅빈대, 쥐꼬리망초, 별이끼, 난쟁이바위솔, 누운주름잎, 쥐손이풀까지.


 높은 지위에 있는 번듯한 사람도 눈여겨보지만 그저 그런 사람들을 정성껏 찬찬히 읽곤 한다. 허리가 구부러진 채 새벽부터 일어나 밭에 나가는 서 씨, 비슷한 나이지만 평생을 한량으로 떠돌다 늘그막에 고향으로 돌아와 건들건들 동네 아저씨들에게 콧바람 불어놓는 이 씨,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온 동네 다 들리게 소리치며 온갖 농사일 다 해내는 김 씨 부인, 자전거를 타고 우리 동네로 매일 출근하며 동네 모든 일에 참견하는 명예 주민 민 씨……. 늘 괭이와 삽만 들고 있던 그들이 어느 날엔 사진기를 들고 있고, 눈가가 붉어진 채 먼 산을 바라보기도 하고, 또 가끔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쌈박질을 하기도 한다.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읽고, 그들이 되어보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는 일, 그들의 소리와 빛깔과 감정과 풍경을 글로 받아 적는 일, 그게 수필쓰기다. 책만 책인 줄 알았던 책상물림이 쉰을 지나 비로소 알았다. 모든 존재가 다 책이라는 것을. 사람과 사물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눈뜨고 귀를 연 다음에야 수필을 쓰게 되었고, 수필을 쓴 다음에야 연암 박지원의 일갈(一喝)이 들렸다.


 "그러므로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에게 고할 때의 심정과 버림받은 아들과 홀로된 여인의 사모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함께 글의 소리를 논할 수 없다. 글에 사상이 없다면 함께 《시경》국풍(國風)의 빛깔을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 이별한 적도 없고 그림에 고원한 맛도 없는 사람과는 문장의 감정과 풍경을 함께 논할 수 없다. 또한 촉수와 꽃술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의 글에는 문장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요, 기물의 형상을 음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글자 한 자 모르는 무식꾼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게 있어서 수필쓰기는 그 순간에 딱 맞는 영혼의 스타일을 찾는 일이다. 수필 쓰는 일이 지성과 의지만이 아니라 감성과 마음이 함께 해야 하니 영혼이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영혼의 일은 형과 태(形과 態)를 갖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으니 가장 알맞은 형과 태를 입히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일상에서도 맵시 있는 사람은 몸에 맞는 옷을 입고, 그 옷에 어울리는 화장을 하고, 차림새에 걸맞은 신을 신는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또 하는 일에 따라 모양새를 다르게 한다. 아무리 멋진 예복이라도 등산 가면서 입는다면 잘 차려입었다고 말할 수 없고, 아무리 시도 때도 없이 입는 청바지라 해도 취직을 위한 면접 자리에 입고 간다면 검소하다고 칭찬할 수가 없다. 멋쟁이는 차려입은 티를 내지 않는 법, 누가 봐도 새 옷이 분명한 옷은 자연스럽지가 않고, 위아래가 따로 도는 차림은 멋스럽지가 않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차림새도 다르고 어울리는 장신구도 다르다. 유행에 뒤질세라 좇아가는 사람, 화려한 색감을 즐기는 사람, 언제나 같은 차림을 고수하는 사람, 무채색에 단순한 형태를 좋아하는 사람. 나는 변화를 즐긴다. 맵시를 추구한다는 것은 같지만 구체적인 세목은 늘 다르다. 사람 앞에 설 일이 많은 나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차림새로 나타나는 일이 많다. 젊은 사람만 아름답다는 생각, 오래된 것은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을 깨뜨릴 차림새로 어떤 게 있을까 고민하고, 과감하게 행동에 옮긴다. 어른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순간부터 추해진다고 믿는 나는 도전적인 스타일을 좋아한다.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라고 여기는 나는 일상생활에서도 아름다움의 지평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즐긴다.


 글의 세 요소는 통일성, 긴밀성, 강조이다. 통일성이 글의 수직적 질서라면 긴밀성은 수평적 질서이다. 통일성과 긴밀성은 중요하지만 그 두 가지만 충족된 글은 멋이 없다. 통일성과 긴밀성이 잘 갖추어진 가운데 매혹적인 강조점이 있어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낱말과 낱말이 호응하지 않는 문장은 비문(非文)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가 멀다면 한 단락에 넣어서는 안 되고 단락과 단락의 사이는 문장의 사이보다 가까워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화라도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를 풍성하게 하거나 돋보이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여기까지는 필수조건이다.


 차림새에서 어디를 강조할지 가늠할 수 있어야 멋쟁이다. 모자를 쓰는 게 나은지, 무늬가 있는 게 좋은지, 장신구를 걸치는 게 어울리는지, 차림새가 성별과 나이, 용모와 풍채, 계절과 날씨,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 달라져야 하듯이 수필에서의 맵시도 편편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다양하게 차려보아도 내게 어울리지 않는 모양과 색깔이 있고,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분위기도 있다. 명랑하면서도 영롱한 기운, 듣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익살과 해학, 삶의 비의가 번뜩이는 탁월한 비유, 어디 그것뿐이랴. 모자란 것투성이인 것을. 그래도 세상 모든 옷을 다 가질 수 없고, 세상 모든 장신구를 다 갖지 못한 채 나는 오늘도 맵시를 내보려 애를 쓴다. 단점과 장점은 둘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수필을 쓰는 일이 즐거운 것은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생활에서 자꾸만 짚이는 일에 침잠했다가 건져낸 생각의 편린에 딱 맞는 옷을 입혔을 때의 기쁨. 그걸 누린다는 게 행복이다. 하지만 수필을 발표한다는 것은 자족감과는 또 다른 일이다. 소통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의 맵시를 통해 영혼의 소리와 색깔, 감정과 풍경을 알아차리는 누군가와 만날 수 있어야만 그 글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한때 문학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문학이 제일 소중한 것은 아님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더 중요하고 문학은 그렇게 하도록 하는 여러 가지 일 중의 하나임을. 내가 쓴 글이 다른 사람의 영혼과 만날 수 있는지 두고두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좋은 글을 '선명(善鳴)'으로 설명하는 율곡의 견해는 유용한 기준이 된다.


 "소리가 나는 것은 한 가지만이 아니다. 무용지성이 있고, 유용지성이 있다. 재채기를 하고, 코를 고는 것 따위는 사람의 소리 중에서도 무용한 것이다. 혀를 차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 따위는 사람의 소리 중에서 유용한 것이다. 유용한 것 중에는 또한 미성과 악성이 있다.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것은 미성이고, 싫어하는 것은 악성이다. 미성 중에는 또한 실성과 허성이 있다. 입에서 나와서 글에 정착되는 것은 실성이다. 실성 중에는 또한 정자(正者)와 사자(邪者)가 있다. 정자인 듯하면서도 사자이고, 사자인 듯하면서도 정자인 것도 있다. 사람이 낸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고, 호감을 주면서 글에 정착되고, 글에 정착되면서 정자에 합당한 것을 선명(善鳴)이라고 한다."**


 글의 가치가 그 글이 종이를 만든 나무의 생명만큼은 된다고 판단할 때 발표하자고 다짐하건만 이제껏 그 다짐이 지켜졌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그래도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은 깨달음과 실천이 둘이 아닌 글만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박지원, 김명호 편역, <글에도 소리와 빛깔이>,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베개, 2007)

**조동일, <아이>, < 한국사상사시론>(지식산업사, 1998)


*정순진/<문화예술> 평론 등단(1991), 대전대학교 문창과 교수, 《김기림 문학연구》,《한국문학과 여성주의 비평》외 다수, 수필집《롤러브레이드 타는 여자》,《행복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