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덧없음에 대항하는 덧없는 부적 / 최민자

희라킴 2017. 2. 15. 11:41





덧없음에 대항하는 덧없는 부적


                                                                                                                                       최민자


 전업주부도 전업 작가도 아닌 채, 수필 언저리를 서성거린 세월이 어느 새 십 년이다. 백수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이 과로사라는 우스갯말처럼, 생색 없는 치다꺼리로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상의 한 귀퉁이에 내 몫의 삶을 따로 챙겨 넣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투리 시간이 더러 나긴 하지만 강력한 자장으로 유혹하는 도시살이의 원심력과, 때 없이 울려대는 전화벨소리를 외면하는 일도 곤혹스럽다. 모처럼 여가를 장만해 집을 떠나 보기도 한다. 냄새와 색깔이 비슷한 무리 사이에 나를 끼워 넣고 물들기를 기다려보기도 한다. 그렇다해서 마음 속 공허가 다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숙제를 미루어두고 놀러 나온 아이처럼, 세례를 받고도 예배를 멀리하는 냉담자처럼, 가슴 속 어디쯤이 무지근하게 켕겨온다. 왜일까. 왜 나는 초조와 번잡 속에 허위단심 허둥거리며 살아가는 걸까

 

 마음자락 한 끄트머리를 수필이라는 고삐에 매어 두고 난 뒤부터 머리 속이 더 복잡해졌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단순함의 즐거움과 느리게 사는 여유로움을 잃어버렸다. 책을 읽어도 영양가를 먼저 따지게 되고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도 순간에의 몰입보다 인상적인 기억 하나를 건져 올리려 애쓴다. 너그럽게 이해하기보다는 분석하고 해부하는 버릇도 생겨났다. 철지난 옷과 양말짝들이 서랍마다 뒤죽박죽 섞여 넘쳐도, 글 한 줄 쓰지 않고 모니터 앞에 앉아 이런저런 검색창을 뒤지기도 한다. 대낮의 저잣거리를 지치도록 쏘다니다가 야심한 밤에야 책상 앞에 앉는 바람에 대하소설 쓰느냐는 핀잔도 듣는다. 시간이 간다고 누에처럼 줄줄이 비단실을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맴을 돌다가 애꿎은 냉장고 문만 열었다 닫았다 한다

 

 천재란 노력할 수 있는 능력 자체라고 말한 사람이 베토벤이었던가? 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끼 없이는, 신의 가호 없이는, 자신도 남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예술이요 문학일 터이다. 젊음의 푸르른 모퉁이를 무기력하게 돌아나와 때늦은 열정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매달려있는 나는 벼려지지 않은 통찰력과 무딘 감수성이 슬프고 부끄럽다. ‘직관이란 기억이 떨어져버린 열쇠를 집어내는 것이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말대로, 인식과 경험 이전의 선험적 영성만이 감동과 에스프리를 창출할 수 있으리라는 추측도 자주 나를 우울하게 한다. 그래, 이쯤해서 손을 털고 빠져 나가자. 흐르기를 포기한 물처럼 느긋하고 평화롭게 일렁거리며 살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무엇이 아쉬운지 선뜻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질끈 눈을 감고 돌아 나왔다가는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말 것 같은 불온한 예감이 핑계처럼 나를 주춤거리게 한다. 돈도 아니 되고 명예도 아니 되는 문단의 불가촉천민 자리가 무에 그리 탐나고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아 망설이고 또 머뭇거리는가. 왜 쓰는가. 왜 나는 쓰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자 해서, 허명이라도 얻고자 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내가 추는 시간의 춤이어서, 허무에 대항하는 내 삶의 양식이어서다. 쓴다는 것은 시간과 짝을 지어 떠내려가는 것들,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건져올리는 행위이다. 음습하고 눅눅하게 시들어가는 영혼을 몸 밖으로 불러내어 위무하고 소통시키는 일이다. 꽃 진 자리마다 열매를 매다는 푸나무만도 못한 인간의 영혼, 그 쓸쓸함을 편드는 일이다.


 어린 날 나는 빨래하는 엄마 곁에 쪼그리고 앉아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피라미와 송사리 떼들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작은 몸통과 날렵한 꼬리지느러미를 쉬지 않고 흔들어대던 은빛 물고기들은 투명한 햇살이 비껴드는 강바닥 모래 위에 제 몸보다 커다란 그림자를 얼비치며 춤을 추듯 어른거리곤 했다. 춤은 그들에게 생명의 약동, 살아있음의 언어였다. 살아있는 것들은 다 그렇게 혼신을 다해 몸 안의 기를 몸 밖으로 투사해 낸다.


 방망이 소리가 잦아들고 앉아 있기가 무료해지면 물속에 손을 넣고 물살을 천천히 갈퀴질하며 놀기도 했다. 손가락 사이로 만만찮은 물의 저항이 느껴졌다. 송사리 떼들이 잽싸게 여울목 쪽으로 도망쳤다. 왜 이놈들은 물을 따라 내려가지 않는 것일까. 흐르는 물살 따라 떠내려가면 힘이 훨씬 덜 들텐데, 왜 구태여 상류 쪽으로 고개를 디밀고 춤추는 것일까.


 죽은 물고기만이 물과 함께 떠내려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하긴 물고기들이 다 물살을 따라 바다로 바다로 떠내려갔다가는 세상의 강물마다 물고기의 씨가 진즉 말라붙고 말았을 것이다. 거슬러 오르기. 그것이 한갓 부질없는 반항의 몸짓일 뿐이어도, 살아 있는 것들은 거슬러 오른다. 봄풀은 중력을 거슬러 허공에 꽃대를 밀어 올리고, 바람은 수면을 거슬러 바다 위에 파도를 일으켜 세운다. 신세대는 구세대를 거스르고 진보는 보수를 거스르고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거스른다. 살기를 포기한 물고기만이 허옇게 배를 뒤집고 물살 위로 편안하게 떠내려간다 


 흐름에 대한 저항. 막무가내로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기슭의 풀뿌리라도 붙잡아보려는 안간힘, 그것이 내 수필쓰기이다. 머물지 못하는 순간에 대하여, 살아있음의 덧없음과 허망함에 대하여, 나는 지금 어설프기 짝이 없는 언어라는 지렛대를 붙들고 언감생심 맞짱을 뜨고 있는 것이다. 덧없음에 대항하는 덧없는 시도. 무모한 도전이다. 백전백패다.


 굴러떨어질 줄 알면서도 연거퍼 바윗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패배를 예견하면서도 맞서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생명 있는 것들의 소명일 터이다. 내게 있어서 수필은 아득한 허적의 꼭대기를 향해 끝없이 밀어 올려야 할, 그러나 끝내 다시 굴러떨어지고야 말, 무거운 바윗돌일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또다시 아래로 떨어져내릴지라도, 아직은 투항하지 않으려 한다. 알베르 카뮈가 시시프스를 산꼭대기가 아닌 산기슭에 남겨두기로 하였으므로. 시시한 내 변방의 언어가 떨림도 울림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세상과 나를 소통시키는 자기 구제의 방편조차 되지 못한다 하여도, 아직은 무릎 꿇지 않으려 한다. 수필이야말로 내 삶의 날숨, 내 영혼의 봉창일 터이므로. 끈질기게 따라붙는 정체 모를 허무를 분연히 물리쳐 줄 부적일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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