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데우스를 생각하며
정성화
누군가 발로 사과 궤짝을 뻐개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내가 누워 있는 방의 창문이 청과시장 쪽으로 나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궤짝을 쪼개었을 한 남자가 웅크린 채 불을 지피고 있었다. 불이 쉽게 붙지 않는지 땅바닥에다 거의 얼굴을 맞댄 채 불의 밑둥을 향해 후후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모닥불을 어서 피우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불을 쬐려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새벽이다. 다른 상인들이 오기 전에 어서 시장바닥을 뜨끈하게 태워놓으려는 그의 마음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이내 불길이 살아났다. 어긋하게 쌓아 놓은 사과 궤짝 조각들이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를 내며 타기 시작했고, 불꽃은 어느새 잘 익은 사과 빛으로 빨갛게 익어 갔다. 그래서인지 시장 안의 풍경은 더 이상 을씨년스럽지도 남루해 보이지도 않았다. 정녕 프로메데우스가 인간에게 전하고 싶었던 불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제껏 나는 누군가를 위해 매운 연기를 마셔 가며 정성껏 불을 피워 본 적이 별로 없다. 그저 피워 놓은 불을 향해 손바닥을 벌린 채 다가갔을 뿐이다. 또 어떤 의미 있는 불을 지피기 위해 내자신을 불쏘시개나 장작개비로 내놓은 적도 없다. 게다가 체온보다 더 낮은 불씨를 지닌 채 살다 보니 곧잘 삶의 불씨를 꺼트리기도 한다. 다른 이에게 삶의 불씨를 나눠 주는 사람, 다른 이의 삶을 덥혀 주기 위해 기꺼이 불쏘시개가 되는 사람들을 보면, 언제나 가슴이 뜨거워진다. 간경화로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를 위해 대학 등록금을 수술비로 내놓고 간 이식을 한 어느 고등학생, 정신박약아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결혼을 반납한 어느 여성, 또 재임 기간 중에 혹시 있었을지도 모를 오판을 속죄하는 뜻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어느 퇴직 판사 등.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또 한편으로는 속이 은근히 불편해지기도 한다. 내 마음 속에 묻혀 있던 불씨 하나가 자꾸만 재를 헤치며 밖으로 나오려고 들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로메데우스가 우리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간 불씨인데, 점화를 기다려 온 그 불씨를 내가 일부러 모른척하기 때문에 속이 부대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성가시거나 골치 아픈 일은 피해 가려고 애를 쓰면서, 또 모든 일에 있어 방관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을 ‘모라토리엄 인간’ 이라고 부른다. ‘모라토리엄’ 은 금융 용어로서 지불 유예를 의미하는데, 사회인으로서 누리고 싶은 권리는 악착같이 찾아내어 누리면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에 대한 지불은 자꾸만 유예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런 사람에 속한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불행을 모른 척하며 지나친 적이 많은 나는, 어쩌면 비연소 물질로만 이루어진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주방 한 편에 둔 숯을 보며 나무의 ‘소신공양’ 을 생각한다. 다시 제 몸을 빨갛게 달굴 준비를 하고 있는 ‘얼굴 없는’ 숯을 본다. 저를 태워 얻을 열기만으로 만족하기에, 숯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연탄의 소신공양과 부모의 소신공양도 그와 비슷하리라. 웃불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밑불이 되며, 푸석푸석해진 제 몸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줄 알면서도 한결같이 웃불을 이고 앉아 있는 것이다. 덜 탄 장작이 더 많이 탄 장작을 지그시 누르고 올라설 때 불꽃이 더 크고 밝아지는 것처럼. 부모가 자신을 아낌없이 태우기 때문에 자식은 더 밝은 불꽃을 얻는다고 하겠다.
글쓰는 이에게 있어 소신공양이란 무엇일까. 죽을힘을 다해 글을 쓰는 것, 목숨이 열 개라면 열 개 다 걸어 놓고 글쓰기에 매달리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전한 죄로 코카사스 산정의 바위에 묶인 채 삼만 년 동안이나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혀야 했던 프로메테우스. 그의 불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누구라도 글을 쓸 때는 언어의 원시적 생명력에 불을 댕기는 간곡한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도자기를 가리켜 불의 예술이라고 한다. 도자기의 색을 결정하는 것이 불의 온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빛깔도 어쩌면 그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잉걸불에 의해 정해지는 게 아닌지. 나는 차마 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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