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김영옥
피아노를 친다.
소나티네, 모차르트의<론도 라장조>.
1악장의 첫 도입 부분이 아주 쉽고 편안하다. 첫 마디만 가지고서는 초등학생도 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뒤 이어 나타나는 음표를 읽어보면 이 곡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놀라지는 않는다. 1악장 빠른 박자의 경우 오른손과 왼손을 잘 연결하기만 하면 다음의 4분 음표는 여유 있게 칠 수 있으므로 그 후부터는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
남편은 월요일 아침이면 서울에 갔다가 금요일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학생이었다. 집 주변에는 무덤만 보이고 거의 이웃도 없는 시골이었다. 하루 하루 손가락을 꼽으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것이 나의 신혼시절이었다.
남편이 돌아오는 금요일 밤, 마중 나간 내 눈에 승객이 거의 없는 버스 한 대가 나타나고 출입구에 서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나를 발견한 남편은 반가운 표시로 손을 쳐든다. 남편과 함께 집으로 오는 동안 우리 부부는 하찮은 것까지 모두 물으며 답한다. 5분이면 집에 도착할 것을 이야기 하다가 30분도 더 걸리곤 하였다.
다음날 아침 정성을 다하여 밥상을 차렸다. 문제는 계란 후라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여기에 소금 말고 조선간장을 치시던데 “ 남편의 이 한마디 말에 나는 발끈하였다. ”계란 후라이에 장 친다는 소리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처음 들었소.“ 내 나이 24세였다.
모짜르트<론도라장조>의 시작만큼 아주 쉽고 문제없을 것 같았던 나의 신혼 초의 처음 삐그덕거림이었다. 하지만 오른손과 왼손의 연결부분을 주의해서 잘 이어주면 그 뒤에 나타나는 악보는 수월하게 연주할 수 있는 1악장처럼 우리의 결혼생활도 그렇게 흘러갔다.
<모짜르트 론도 라장조>의 2악장은 평범하면서도 서정적이다. 들어가는 첫 부분부터 간절하고 아름다워서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그렇다고 감정에 치우쳐서 대충 넘기면 안 된다. 2악장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 음 한 음 짚어가듯 정확하게 연주해야 할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으신 친정엄마는 천으로 된 기저귀를 만들어 오셨다. 삶아 빤, 햇빛에 잘 말려진 기저귀는 백옥 같이 희었다.
하지만 열 달 만에 태어난 둘째 아가는 석 달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눈만 감으면 마당 빨래 줄 가득 하얀 기저귀가 펄럭였다. 바람이 부는 대로 훅 치솟았다가 길게 다시 내려오곤 하였다. 놀라 눈을 번쩍 뜨면 희디 흰 기저귀가 내 머리맡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아랫배 근처에서부터 양쪽으로 살이 쭈욱 찢어지면서 위로 올라오는 느낌,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가슴이 아프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큰 아이가 있지 않느냐.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내가 나한테 말했다. “느긋하게 살아 부러라” 고, 하시던 시어머니의 말씀도 새겨 들었다.
모차르트의<론도 라장조>마지막 3악장이다. 세 악장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내가 지금 치고 있는 게 맞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손가락에 힘이 빠진다. 그만 피아노 뚜껑을 닫고 싶다. 난해한 스타카토 때문이다. 하지만 집중해서 천천히 차분하게 연습하면 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스타카토는 1,2악장에도 있었지만 무난하게 넘어가지 않았는가.
지난 몇 년 동안 일기도 거의 적지 않았다. 이따금씩 수첩을 꺼내 메모하던 습관도 그만 두었다. 어려웠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막막했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글이 쓰고 싶었다.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모차르트의<론도 라장조>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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