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보리누름 / 김성한

희라킴 2016. 9. 18. 20:15



보리누름

                                                                                               

                                                                                                         김성한


  보리 알갱이가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서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만 보리는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자존심이 센 녀석인가. 꼭지가 덜떨어진 녀석인가. 샘바리 봄바람이 쏴~ 보리밭을 훑고 지나간다.

 

  초등학교 시절, 산 뻐꾸기가 몹시 울어대던 어느 봄날이다. 그날따라 학교가 늦게 파했다. 학교 교문을 나서니 산 그리메가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다. 검정 책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조붓한 사랫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뒤로 거무스름한 그림자도 함께 따라왔다. 쪼르륵, 딸랑거리는 빈 도시락 소리에 맞춰 뱃속은 연방 칭얼거렸다. 꽁보리밥 몇 덩어리로 점심 때운 지가 네댓 시간이 지났으니 울만도 하리라.

 

  들녘에는 보릿대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보리밭 사이로 종달새가 총알처럼 솟아올랐다. 보리밭 한가운데에는 두어 사람 몸뚱이 넓이만큼 보리가 쓰러져 있었다. 빡빡머리 광수가 키득키득 웃으며 걸어간다. 그렇다면 우리 꼬맹이들 사이에 떠도는 그 소문이 참말이었던가? 보름달이 환하게 얼굴을 내밀던 날 밤, 맨 뒷집에 사는 광식이 형과 아래뜸 순희 누나가 보리밭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소문이. 그때 순희 누나 옷에 지푸라기가 잔뜩 묻어 있는 걸 몰래 봤다는 입쌀개 끝님이 얘기가키득거리며 앞서가던 광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주위를 한 바퀴 휙 돌아본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저녁 무렵이라 들녘에는 사람이 없었다. 해거름이면 늘 손에 장죽을 쥔 채 어슬렁어슬렁 밭둑길을 돌아다니던 코끝이 빨간 일명, ‘빨갱이 할배도 보이지 않았다.

 

  광수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우리 보리 끄시럼해 먹을까?” 뱃가죽은 이미 등에 닿아 있었다. ‘보리 끄시럼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살금살금 보리밭으로 기어 들어갔다. 고개를 쭉 빼 들고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사람은커녕 그 흔한 까마귀조차 보이지 않았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보릿대를 댕강댕강 뽑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다. 땀까지 줄줄 흘렀다. 한 십여 분 지났을까, 보릿대가 얼추 서너 춤이나 되었다. 밭둑 너머 개골창으로 내려가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다행히 거뭇거뭇한 연기가 저녁 어스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달아오르는 모닥불에 보릿대를 집어넣었다. 타닥타닥 보릿대 타는 이분음표 소리에 맞춰 보리 알갱이가 노릇노릇 익어 갔다. 불에 익은 보리를 손바닥으로 비비고 후후 불으니 말랑말랑한 알갱이가 한 손 가득했다. 보리 알갱이를 입에 털어 넣었다. 고소한 맛이 입에 착 달라붙었다. 네댓 주먹을 정신없이 먹었다.

  “야 부엌 강생이(강아지의 경상도 방언).”

  “……

  내 얼굴을 쳐다보던 광수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렇게 놀려대는 광수 입가와 코밑은 거뭇거뭇 검댕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농촌에 가도 보리 보기가 쉽지 않다. 젊은 사람은 도회지로 떠나버리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농촌을 지키고 있다. 그나마 홀로 어르신이 많다. 그러다보니 벼를 벤 자리에 보리를 심는 이모작을 할 만큼 억척스럽게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

 

 밭둑 너머 버덩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었다. 다가가서 한 잎을 따먹어본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이연실의 찔레꽃에서)

 

  갑자기 목울대가 뜨거워 온다. 보리누름이면 어머니는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물을 캐러 다녔다. 지난해 거두어들인 양식은 바닥나 버렸고, 보리 수확 때까지는 한참이나 기다려야 하니 끼닛거리 마련하느라 산이나 들녘으로 쏘다녔다. 오 남매나 되는 조롱박 같은 어린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던 어머니 얼굴에는 늘 부황(浮黃)이 나 있었다. 생전에 쌀밥 한 그릇 마음 편히 드시지 못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40년 전에 영면하셨다. 무엇이 그리도 급하셨는지.

 

  보리밭 이랑으로 들어선다. 보리 알갱이를 손으로 만져본다. 보리가 말을 걸어온다. ‘이제 그만 그 일은 잊으라고.’ 나도 모르게 멍하니 하늘을 쳐다본다. 보리밭 위 맑은 뭉게구름도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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