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무명초 / 원정미

희라킴 2016. 9. 12. 14:40




무명
                                                                              

                                                                                                                                  원정미   



 잡초는  이름이 없다.  아무도 그를 불러 주지 않아서 이름이 없다. 부모를 잃기 전의 아이처럼 그에게도 이름이 있었을까? 있었다 해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름은 남들이 불러 줄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니까.

 그러나 자기 삶의 가치는 남이 이름을 기억해 주고 자기 존재를 인정해 줄 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의 가치는 장바닥 생선처럼 찾아 주는 고객이 없으면 썩어 없어져도 되는  물건이 아니라 자기 가치는 자기 스스로 결정한다. 잡초 같은 인생이라도 마찬가지다. 

 잡초 하나가 내 집 베란다에서 살기 시작했다. 빈 화분도 많았는데 그는 비닐봉지 속에서 살았다. 잡초라서 내가 처음부터  여기에 심고 천대한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가 처음부터 청승맞게 거기서 살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는 비닐봉지 속에서 연두색 가녀린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고 자라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이름 있는 식물이 될 듯이 씩씩하게 자랐다. 어느 가난한 엄마가 울면서 버리고 간 개구멍받이 신세 같지만 잘 자랐다.

 나는 이것이 자라면 무엇이 될 것인지 알 수 없어서 호기심으로 기대를 걸고 다른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비닐봉지 속에도 물을 주었다. 그럴 때면  <부활>의 주인공 카츄샤에게 가끔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주던 주인 여자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된 기분이 되기도 했다. 돼지우리 같은 데서 노예의 자식으로서 여섯 번째로 태어난 카츄샤는  그대로 놔두었다면  언니들처럼 굶어 죽었을 것이다. 나는 비닐봉지 속의 어린 싹을 빈 화분으로 옮겨 주고도 싶었지만  행여 뿌리라도 다칠까봐 그대로 그 속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느 해 봄날 산에 갔다가 흙을 조금 담아 왔다. 겨울에 꽁꽁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풀어진 흙이 하도 보드랍고 기름져 보여서 집에 있는 고무나무에 올려주려고 한 움큼을 비닐봉지에 담아 왔다가 그대로 며칠 동안 방치해 두었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에 이 어린 생명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 너 누구니? 어디서 왔니? 엄마 아빠는 누구지?”

 이렇게 장난삼아 말을 걸어 보기도 했는데 여름이 되면서 볼품없이 키만 길쭉한 꺽다리가 되더니 잎이 마르고 배배 꼬이다가 그대로 누워 버렸다. 가을도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베란다에서 장맛비를 너무 맞다가 뜨거운 폭염에 데어 죽은 것일까?

 그는 이곳에서 자랄 때부터 원초적 본능으로 자기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하늘은 푸르고 햇볕은  따스하고 거울처럼 맑은 냇물이 흐르고  우거진 나무숲에서 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들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곳. 가끔 나비와 벌들이 찾아오고 하늘소,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다람쥐들이 노는 곳---.

 그곳이 제 고향인데 나 때문에 도시의 베란다에서 비닐봉지나 뒤집어쓰고 사는 실향민이 된 셈이다. 그는 잡초로 살다 갔다.  아파트로 옮겨진 후에도 그냥 내팽개쳐져 있는 빈 화분에서 한번 살아 보지도  못하고 비닐하우스의 가난한 신분으로 살다 갔다. 아무 이름도 남기지 못했고 남길 이름도 없이 잡초로 살다 갔다.

 그런데 메말라 버린 풀잎 하나를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살다간 잡초에게 삶의 가치를 묻는다면 얼마라고 대답할까? 잡초의 삶은 정말 하찮은 것이라고 단정해도 될까?

 그에게도 슬퍼하는 가슴이 있다면 그렇게 일찍 죽은 것은 가엾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가 이름 없는 잡초로 살다 갔다는 것만으로 그의 삶의 무게도 소수점 이하라고  폄하 (貶下)할 수는 없을것 같다.

 그는 이름도 없었고 다른 화초들과 달리 나로부터 인정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남이 제 이름을 불러주면 그때 비로소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반대로 안 불러주면 인정을 못받고 그냥 하찮은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들의 자의적 판단이고 오만일 뿐이다. 자기 기준으로 남을 잴수도 없고 남의 기준으로 자기를 잴 필요도 없다. 남을 슬프게 하지 않는 한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할 권리를 지니는 것이니까.

 내 집에서 살다간 잡초는 이름도 없었지만 볼품도 없이 아주 가난했다. 그리고 그가 비닐 봉지속에서 살다 갔듯이 비닐 하우스나 판잣집에서 살다 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바른 신념에 따르며 가난하게 살다 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삶의 가치를 누구라도 자기의 세속적 가치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큰 나무통 하나를 집으로 삽고 살던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알렉산더 대왕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듯이..

 카츄샤는 짓밟히는 잡초였다.  그녀는 주인 여자의 조카인 네프류도프에게 겁탈당한 후 버림받았고 임신한 후 그집에서 내쫒기고 창녀가 되었다. 또 억울한 살인 누명으로 시베리아로 유형의 길을 떠나며 끊임없이 짓밟혔다. 그렇지만 귀족 신분이 된 네프류토프의 구명 운동을 단호히 거절한다.

 “당신의 그 안경, 기름진 상판때기 모두 보기 싫으니 어서 떠나요!”

 그녀는 네프류도프가 진정으로 참회하고 또 사랑하며 청혼하지만 이것마저 거부해 버리고 사상범 죄수와 결혼하며 고난의 길을 계속한다. 공작과의 결혼은 신데렐라의 꿈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호강을 거부하고  그대로 잡초 속에 묻혀서 자기처럼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려는 카츄샤가 멋있어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자신의 삶의 의미나 존재 가치는 남이 이름을 불러주고 정가표를 붙이기 전에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 인생은 장바닥의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가치가 오르내리는 물건이 아닐 것이다. 인생은 파는 물건이 아니며 남이 불러 준다고 잡초가 장미가 되고 불러주지 않는다고 장미가 잡초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비닐봉지 속에서 시들어 버린 잡초를 주차장 옆에 있는 뜰에다 묻으며 잠시 숙연해졌다. 그가  그냥 이름없이 흙으로 돌아가듯이 나도 장차 그렇게 한줌 흙으로 돌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래도 잡초와는 좀 달라지기 위해서는 죽어도 썩지 않을 무엇인가를 죽는 날까지 계속 찾아나가야겠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물 / 최장순  (0) 2016.09.13
여승女僧 / 안병태  (0) 2016.09.13
소년병 / 목성균  (0) 2016.09.11
구경꾼으로 살아가기 / 최민자  (0) 2016.09.07
복사꽃 피는 마을/ 손광성  (0) 2016.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