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전령 '손'
장영희
며칠 전 동생이 혼자 외출할 일이 있어 내가 초등학교 2학년짜리 조카 건우를 데리고 학교에 간 일이 있었다. 건우를 연구실에 남겨두고 잠깐 회의에 다녀오니 건우는 심심했던지 노란색 포스트잇에 그림을 그려서 책꽂이 한 면에 가득 붙여놓고 있었다. 포트스잇마다 나를 그려 놓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모두가 실제의 내가 아니라 상상 속의 나, 즉 목발을 짚지 않은 나를 그린 것이었다. 각 그림에는 ‘치마 입은 둘째 이모’ ‘머리 긴 둘째 이모’ ‘꽃다발 든 둘째 이모’라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
건우와 내가 함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그림이었다. 사실 그것은 조금 슬픈 그림이었다. 건우는 나와 함께 걸을 때마다 손을 잡고 싶어 하지만 내가 목발을 잡아야 하니 손을 잡지 못하는데다가 혹시 내가 걸려 넘어질까 봐 옆에서 가까이 걷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건우는 늘 내 뒤를 바짝 따라오면서 좀 어색하게 느꼈던 모양이다.
일생 동안 목발을 짚고 다녔으니 이젠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가끔 불편을 느끼는 것은 목발 자체가 아니라 걸으면서 양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가방을 들고 다니지 못할뿐더러 우산을 쓸 수도 없고, 아무리 손을 잡고 싶어도 어린 조카의 손을 잡고 걸을 수가 없다.
그것 운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리를 쓰지 못하니 왼손은 핸들을, 오른손은 핸드 컨트롤을 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운행 중에 휴대폰을 쓸 수 없는 것은 물론 라디오를 켜거나 창문을 내리거나 몸 어디가 가려워도 긁을 수가 없다. 누가 길을 양보해 주면 나도 남들처럼 손을 들어 고맙다는 표시를 하고 싶지만 그것도 못한다.
몸 가려운 것은 좀 참으면 되고, 라디오를 못 켠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남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을 나는 못하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 작가 셔우드 앤더슨(Sherwood Anderson 1876-19410의 대표작 “와이즈버그, 오하이오”는 스물 세 개의 단편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 첫 번째 이야기 제목이 “손 The Hand"다. 일명 괴상한 사람들로 불리기도 하는 이 작품은 오하이오 주의 가상 마을인 와인즈버그에 거주하는 독특한 성격을 갖거나 이상한 상황에 처한 괴상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손'의 주인공 윙 비들바움은 20년 전 와인버거로 흘러들어오기 전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사랑했고 학생들도 그를 따랐다. ‘소년들이 마음에 꿈을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에서 학생들의 어깨를 어루만지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만 한 학생이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을 꿈속에서 상상하고 현실로 착각하여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결국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쫓겨난다. 이후 그는 ”그 손을 내밀지 말라!“는 동네사람들의 외침을 악몽처럼 기억하며 손을 의식적으로 가리고 다닌다. 그러나 와인즈버거에서 그의 손은 다른 사람의 몇 배나 빨리 딸기를 딸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몸에서 가장 우수한 부분”이라고 인정을 받고 주민들은 그의 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손이 마음을 표현하는 역할이 아니라 로봇과 같이 탁월한 기계로서의 역할을 할 때 각광을 받는다는 아이러니는 ‘과상한 사람들’이 처해 있는 딜레마와 연결된다. 서문에서 앤더슨은 말한다. “누구가 진리를 취하고 그것을 자신의 진리라고 부르면서 그것에 의지하여 인생을 살아가려 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괴상해진다’ ” 결국 앤더슨이 말하는 ‘괴상한’ 사람들은 오해와 불신,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 부족으로 서로 벽을 쌓고 사는 외롭고 고립된 ‘보통’ 사람들이다.
바야흐로 손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목숨이라도 아낌없이 내주겠다는 듯 유권자들의 손을 꼭 잡는 손, 함께 죽을 각오라도 되어 있다는 듯 서로 꼭 잡고 함께 높이 쳐든 손, 손, 손들......, 어느 학생이 준 CD에서 나훈아의 노래 ‘잡초’가 흘러나온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손이라도 있으면 님 부를 텐데....”
맞다. 임이 그리우면 부르는 손, 건우가 잡고 싶어 하는 손은 약속이고, 마음의 전령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약속을 남발한다. 나중에 어쩌려고 마구 마음을 남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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