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언壓言
김 정 화
1. 그냥 좋더라
그냥 좋았다, 그때는.
방앗간 긴 줄 속에 서서 온종일 가래떡을 기다리고, 삼등품 밀가루의 붉은 면발이 지나가던 천장 아래로 이삭 국수를 집어 들던 시절이 있었다. 읍내 술도가에서 받아오던 양은주전자 속 막걸리의 텁텁한 냄새. 아랫목 콩나물시루에서 물 떨어지던 소리. 약식 고두밥을 한 움큼 집어먹던 찐더운 서리 맛. 정짓간 시렁 위에 차곡히 쌓여 있던 보시기들…….
참고, 기다리고, 눈감고, 듣고, 생각하고.
열 식구 끼니 걱정인 이웃 저녁상에 눈치 없이 끼어들어도 상호 새엄마는 선뜻 숟가락을 내어놓았다. 읍내 참외밭 주인은 작은 참외를 줄기째 두렁에 옮겨 놓아 동네 아이들은 여름 내내 입이 쓰도록 참외를 깨물고 다녔다. 도시 방적공장에 취직한 상철이 누나는 박봉을 꼬박 모아 동생 등록금을 보내오고, 동네 잔칫날 명자 아버지는 버꾸춤으로 마을 사람들 흥을 돋우었다.
놔두고, 입 다물고, 믿고, 내어 주고, 지나가고.
어머니 장 마중을 가던 어느 날, 어린 내가 눈 반짝이며 물었다.
“어머니가 왜 좋았어요?”
한동안 먼 산만 올려보던 아버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냥 좋더라.
2. 계속 가거라
우스꽝스러운 비옷을 입고 등교하는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이는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가 본 기억이 없다. 한 시간 벌판길을 걸어 다닌 통학 길이었으나 장마철에도 우산을 들지 못했다.
우산이 흔치 않은 시절 탓도 있지만, 튼실하지 못한 우산이 작은 아이의 손에 견디기 어려운 까닭이 더 컸다. 집에 우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녹물이 든 검정 나일론우산과 대나무 마디가 잡히던 푸른 비닐우산도 기억한다.
하지만 그 우산들은 아버지의 중절모자를 받쳐주거나 어머니의 양단 한복을 감싸주는 역할을 할 뿐 아이의 손에까지 건너오진 않았다.
아버지는 요소비료 포대로 우의를 만들어 주었다. 직사각형의 포대 자루 위에 단을 만들고 검정 고무줄을 끼워 마치 비닐도롱이를 연상시켰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표 자루 우의를 입고 비닐 모자를 푹 눌러써야만 했다. 그리고 너부죽이 고개를 숙이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몇 걸음 딛다가 뒤돌아보고 또 뒤를 돌아보고 반복하였다. 아버지는 연신 손사래를 쳤다.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버지는 묵묵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하나의 준엄한 목소리였다.
“계속 가거라.”
3. 뼈째 삼켜라
노릇한 갈치구이가 입맛을 돋운다. 도톰한 갈치 살을 발라 갓 지은 흰밥에 얹어 먹으면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다.
어릴 때 나는 갈치를 먹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갈치 맛을 몰랐다. 어머니의 시장 망태기에 갯내음이 풍기는 날은 손님이 온다는 징조였다. 들판 시골집의 빈객에게 갈치구이는 최고의 대접이었다. 아궁이 짚불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는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구워진 갈치는 손님상에만 올랐다.
5촌 아재가 온 날도 아재 밥상에 기름기가 반지르르한 갈치 한 토막이 놓여 있었다. 군침을 참지 못한 나는 연신 흘끔거렸고, 아재는 절반을 뚝 잘라 내 밥그릇에 올려주었다.
아재를 배웅하고 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다시 갈치 한 토막을 구우라는 주문을 했다. 그때의 기대감이라니. 아버지는 직접 갈치구이 먹는 법을 가르쳤다. 잔뼈까지 꼭꼭 씹어 삼켜야 아까운 살을 버리지 않는다며 시범을 보이셨다. 뼈째 먹지 않으려면 그만둬야 한다는 엄포가 서운했다. 나는 뼈를 자디잘게 가루가 되도록 씹고 또 씹었지만, 매번 목으로 넘어가는 것은 고인 침이었다. 결국, 생선 먹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뼈째 삼키는 것. 그것은 갈치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밥그릇의 한 톨 밥알도 남기지 않는 세심, 두꺼운 고전을 끝까지 읽어 내는 끈기, 마라톤을 완주하는 집념. 무슨 일이든 온 힘을 다해 야무지게 하라는 말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뼈째 삼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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