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의 『 세월이 가면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시인의 詩 '세월이가면'에 얽힌 에피소드.
박인환시인은 아시다시피 전후의 극심한 허무주의를 비감으로 노래했던 시인인데, 죽음을 앞둔 말년에
여류시인 '버어지니아 울프'의 자살에 관한 만가 형식의 시 <목마와 숙녀>, 그리고 <세월이가면>이라는
시를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그중에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와 노래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를 훗날 '명동황제'란 애칭으로 부르게 된 연유가 담긴 노래이기도 합니다.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잇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박인환(朴寅煥, 1926.8.15-1956.3.20)
강원 인제(麟蹄) 출생.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平壤醫專) 중퇴.
종로에서 마리서사(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 《세월이 가면》 《목마(木馬)와 숙녀》 등은
널리 애송되는 시이다.
인제가 낳은 시인 박인환은 1950 년대를 극명하게 살다 갔다.
비록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셨지만 온 몸으로 불태운
그의 시혼은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출처 : | greatopen | 글쓴이 : 참사람 원글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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