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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 쓰기의 지름길 3 / 윤후명

희라킴 2016. 4. 18. 18:53

소설 쓰기의 지름길 3 / 윤후명

 

 

그러면 내 경우는 어떠한가.
내가 어떤 소설을 어떻게 써왔는가하는 물음에 나는 항상 당혹할 수 밖에 없다. 이 삶에서 그렇듯이 나는 작품에 대해서도 헤매기만 할 뿐 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내 소설은 그 헤맴의 내적, 외적 기록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자, 스스로도 뭔가 ‘글쎄, 그래도…’ 하는 뒷말이 덧붙여진다. 언제나 읊조리듯이 작가는 작품으로써만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도대체 작품 말고 이러쿵저러쿵 무슨 군소리가 필요할 것이냐.
이렇게 말해도 역시 ‘글쎄, 그래도…’ 하고 덧붙여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다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 작품이 어떤 작품이든 저 우주 지평선까지 이르는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나는 애써 왔으며, 그것은 우리네 모든 삶의 형평감각에 입각하여 미적-언어적-문학적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상투적으로 해오던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일 것인가.
‘글쎄, 그래도…’
나는 중얼거린다. 그리하여 어줍잖게 지난 과정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몇몇 노트를 뒤적거릴 수밖에 없다.
나는 우선 소설을 어떻게 써왔는가?
우선 1990년에 펴낸 문학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춰본다. 이 문학선은 내가 문학인이 된 지 실로(!) 24년만에 펴낸 첫 종합보고서 같은 것이기에 그 서문부터 읽으면서 나 자신을 더듬어보는 것이 순서이리라 여겨지기도 한다.

가사미산 밑에 와서 산 지 벌써 5년이 되었다. 40대에 들고부터의 이 5년 동안 몸과 마음은 내가 생각해도 많이 망가졌고 그만큼 희망의 단위 함량도 많이 떨어졌다.
희망이 무엇일까? 그것이 자기 구제의 마지막 권능이라 할 때, 인간은 죽는 그 순간까지 그것을 버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나이에 의해서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은 늘 함께 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하여금 희망을 무색케 하도록 놔둬서는 안된다. 희망이란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희망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희망에게 미안하다. 다시, 영생불멸의 희망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가령, 내가 「희망」이라는 시에서,

내게 황새기젓 같은 꽃을 다오
곤쟁이젓 같은, 꼴뚜기젓 같은
사랑을 다오
젊음은 필요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 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금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다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라고 노래했을 때, 나는 새로운 ‘사랑’을 희망에게 심어주려 한 것이다. 모든 종류의 사랑에 대한 희망을 죽는 날까지 내 영생의 잣대로 삼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게는 문학이 필요하다.
가사미산이란 새로운 도시 안산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산이다. 이 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의 의견이 구구하다. 갓 모양을 닮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한자 표기의 ‘可使美’는 뜻은 훌륭할지 몰라도 단순히 소리를 적기 위해 가져다 쓴 글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뜻풀이에 나는 석연치가 않다. 갓 모양? 그렇다면 같은 모양으로 옹기종기 늘어 앉은 이곳 산들은 왜 다른 이름일까? 가장자리? 어디를 중심으로 가장자리일까? 이리저리 둘러보면 더 가장자리 산들이 많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작은 산은, 그 작은 규모에 아랑곳없이 예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간직해 왔다. 얼마 전까지도 성황제가 올려졌던 성황당의 큰 나무 엄나무에는 지금도 울긋불굿한 천이 걸려 있고 그 옆 묵은 소나무 숲은 한낮에도 으시시한 기운이 감돈다. 옛날 나라의 장군들이 매년 한번씩 이곳에 모였다는 그 옛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어도, 범상치 않은 으시시한 기운은 어떤 전설을 가시화하고 있다. 시를 공부하는 한 토박이 청년은 어릴 적에 이 숲을 두려워해 한낮에도 일부러 돌아다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산을 신령스러운 산이라 부른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의 상상은 날개를 펼친다. 학자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나름대로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핵심에 있는 말(사상)을 나는 ‘가라’라고 상정해놓고 있다. 쉽게 알 수 있는 바, 한글 사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라’는 ‘검다’라는 뜻이다. 이는 단군왕검의 ‘검’이며 웅녀(熊女)의 ‘곰’이며 임금의 ‘금’이다. 크고 위대하고 범접하지 못할 대상에는 ‘검다’는 뜻이 붙는다. 몽고말로 카라(khara:검다)도 그러하고, 터키말로 카라(gara:검다)도 그러하고, 일본말로 가라(黑, 玄:검다)도 그러하다. ‘가라’는 하물며 왕조 이름에도 차용된다. 청동기시대 말 남시베리아 문화를 대표하는 카라수크문화, 옛 위구르 제국의 수도 카라발가순, 신강 위구르의 고대 유적도시 카라호조,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 흉노족의 서역 경영중심지 카라샤르, 터키의 왕궁터 카라테페, 파키스탄 최대의 도시 카라치, 중앙아시아의 카라쿰 사막, 카라쿨 호수, 소련의 카라 해(黑海), 그리고 10~12세기 중앙아시아의 터키계 왕조 카라 한(朝), 그리고 우리 나라 김해지방의 가라국(加羅國), 옛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한(韓)’을 가라로 불렀음도 기억해야 한다. …이 모두 글자 그대로 ‘검다’라는 뜻을 앞세워 신성성을 강조한다. 이들 명칭이 알타이어를 쓰는 지역에만 분포되어 있음도 주목해야 한다.


‘검’에 귀착되는 ‘가라’는 ‘가야’와 ‘가락’을 낳고 또 ‘가마’(감, 고마, 구마)와 ‘가막’(감악)을 낳아, 우리나라의 도처에 감곡, 가마산, 가마봉, 감악산…을 있게 한다. 공주의 옛 이름 웅진(熊津)이 본디는 고마나루였음도 이 맥락 위에 있다. 일본의 수많은 지명이 이 테두리 안에 드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여기서 ‘가라’ 이야기를 길게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우선 가사미에서 ‘미’가 산의 옛말 ‘메, 뫼’의 변형이라고 본다. 가사미는 ‘갓뫼(미)’에서 온 것임을 추인한다.
역시 갓 모양인가? 가장자리 산인가? 그렇게 안이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 이 산의 뒤쪽 수리산 어귀에 ‘가마를 뒤엎어놓은 형상’(!)이어서 붙였다는 가마산이 있고 그 아랫마을을 가마골로 불렀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갓뫼(미)〉감뫼(미)로 읽은 차례를 밟는다. 드디어 내 결론에 이르렀다. 가사미산의 신령스러운 소나무숲은 지금도 검푸르다. 이 산 아래 와서 살게 된 것에 우연이 아니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이곳의 보호수인 엄나무에 대해서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썼다. 여기 이 신령스러운 산이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 닿아 있고, 또 옛 역사에 닿아 있어서 오늘의 나를 만들고 있다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의 내 작업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는 중편소설 「돈황(敦煌)의 사랑」을 비롯한 몇 작품에서 저 멀리 서역의 옛 유적들을 끌어들인 것도 현재 우리의 즉물적이고 속물적인 쬐끄만 사랑을 보다 원대하고, 보다 심원한 곳에 뿌리박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뜻에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몰골이 너무도 보잘것 없어서 그냥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사미산 밑에 살면서 이 산의 의미가 저 멀고 깊은, 겨레의 뿌리까지 닿아 있다고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 문학이란 어차피 이 세계를, 이 우주를 나름대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작업에 다름아닌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병들어 왔으므로 이제는 문학을 빼버리고는 내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인이 되어 꼬박 10년 동안 시만을 써서 시집 『명궁(名弓)』을 냈고, 2년 공백 뒤에 소설가가 되어 꼬박 10년 동안 소설만을 써서 소설집 세 권을 냈고, 이제 시와 소설을 함께 쓰고자 하며 세기말에 이른 지금. 그러나 나는 아직 ‘무엇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 아마 마지막까지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무엇을 쓰든지 그것은 문학으로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영원히 그 뒤를 볼 수 없는 우주 지평선과 같은 삶의 지평선에 문학을 놓고 현실을 그 속에 투영하는 일―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과제가 주어졌음을 느낀다. 문학은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 어떤 것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 인간을,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직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굳이 내 말이 아닌 것이다. 허무주의와 회의주의를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은 삶을 긍정하는 문학, 폐허 속에 묻혀 갈 우리들의 아름다운 일순(一瞬).
이제 이 세기말을 맞아 지난 세월의 발자취를 더듬는 자리에서 시인으로 태어났고 소설가로 다시 태어난 그 무렵의 일들을 돌이켜본다. 어디에선가 썼던 대로 이른바 ‘나의 문학 수업 시절’이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긴 여름의 뙤약볕과 가을의 조락, 그리고 늘 내가 감당해야 했던 무겁디무거운 어두움. 나는 혼자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내가 도달할 곳은 어디인 것일까.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나는 끝없이 회의하며 가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 자신을 깊은 나락 속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던 순간들을 그 하나의 실낱같은 빛이 건져주었다. 이제 내 문학적 재생의 길이 열렸다. 나는 이제야말로 무엇인가 쓰지 않으면 안된다. 쓰고 싶다는 의욕은 내 게으른 천성을 질타한다. 새로운 길이 열렸으므로 나는 그 길로 질주해 보고 싶다… 열심히 산다는 것, 이것이 금년에 배운 유일하고 귀중한 교훈이다.

1070년대가 저무는 해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변신한 나는, 그 당선 소감이라는 걸 이렇게 썼다. 그러나 사실 아직 소설가라고 일컫기엔 어림없는 노릇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느 선배 문인의 말대로 소설가라는 꼬리표를 달자면 적어도 단편소설을 열 편은 써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소설가가 되느냐 못 되는냐의 기로에 섰다는 생각에 나는 자신감과 불안감을 함께 갖고 그 눈 내리는 서울 변두리 동네를 헤매고 또 헤맸다. 그 무렵처럼 내 삶이 철저하게 고립되고 망가져 있었던 때는 없었다. 기필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도 나는 그 무렵의 외로움을 글로써 나타내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릴 때가 있는데, 아무리 열심히 써놓고 봐도 그 절박함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아쉬움만 남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나는 문학 공부를 이론을 통해서 해본 적이 없다. 삶 자체가 문학 공부일진대 수학 공식 같은 이론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므로 오로지 작품을 읽고 쓰는 행위만이 공부였다. 그래서일까. 그 눈 많이 오던 해의 서울 변두리 동네에서 갑자기 신춘문예에 당선한 나는 또 한번 혼돈 속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 그것은 내가 일찍이 소설가가 될 꿈을 갖지 않았다는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혼돈이었다. 오랫동안 오로지 읽고 쓰는 행위에 몰입해온 것은 거의 맹목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소설가를 경원해 왔으며 때로는 그 ‘이야기꾼’으로서의 역할을 매도하기까지 해왔었다. 더군다나 ‘한국 소설’은 내게 절망이며 벽이었다. 그런데 삶의 길은 기구해서, 나로 하여금 뒤늦게 소설가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몰아세운 것이었다.
본래 어려서부터의 절실한 뜻은 시인으로서 한평생을 살다 가려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한 편의 훌륭한 시만도 못하다고 나는 믿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전국을 돌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3학년 때 서울에 정착한 어느 가을날, 나는 우연하고도 운명적으로 시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시가 아니라 행만 바꾼 치졸한 산문이었다. 그 가을의 고독과 침잠은 내 삶의 중요한 모티브였음을 나는 지금도 확실히 기억한다. 시인이 되지 못하면 나는 살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내 뜻은 한층 가열되기만 했다. 그리하여 여러 대학에서 실시하는 작품 모집이나 백일장에서 상장을 받기도 하고 또 2학년과 3학년에 걸쳐 『학원』잡지의 ‘학원문학상’을 받기도 하면서 시인에의 꿈을 키웠다. 모든 시인들의 작품들이 모방의 대상이 되었고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은 시의 렌즈, 시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보여졌고 이해되었다. 그것은 시로 정말 병든 시절이었다.
대학 2학년 때. 나는 한 해를 꼬박 바쳐 한 편의 시를 썼다. 제법 긴 그 시는 고심참담끝에 씌어지고 만져지고 다듬어져서 겨우 완성이 되었다. ‘코끼리가 꾸덕꾸덕 마른 땅을 디디고 간다’든가 하는 이상한 구절만이 지금 떠오를 뿐이지만, 위대한(!) 시가 탄생한 것이었다. 물론 신춘문예를 겨냥하고 있었다. 한 해를 꼬박 바쳐쓴 ‘위대한’ 한 편의 시이기는 해도 그것만 응모하기엔 왠지 허전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하루 만인가 이틀 만인가 또 한 편을 급조하여 각각 다른 신문에 응모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역시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다. 그 눈 속을 기다림에 지쳐 돌아다니던 어느 날, 드디어 당선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다. 그때의 기쁨이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 이제야 시인이 되었구나, 삶의 뜻을 찾게 되었구나. 그러나 그 당선작은 내가 한 해 동안 꼬박 심혈을 기울여 쓴 시가 아니라 하루 이틀만에 쓴 시였다.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1967년, 정확하게 계산하면 내 나이 만 20세 때였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시인’이 되었으나 나는 별 신통한 시를 못 쓰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아직도 내 목소리를 갖지 못한 채로 무작정 쓸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시가 당선된 이듬해에 다시 신춘문예 공고가 났을 때, 부랴부랴 ‘소설’ 한 편을 써서 응모한 것이 이른바 최종에 오른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번 해본 짓’일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소설가가 되고 싶은 뜻은 없었다. 시만이 내 정신을 이끌어주고 구제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1969년, 평소 어울리던 젊은 시인들 몇과 ‘칠십년대’ 동인을 결성하고부터 나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 비로소 내 목소리로 노래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다. 제 목소리가 뚜렷하지 않은 시인이 어떻게 시인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열심히 썼다. 그 결과가 1977년에 나온 한 권의 시집 『명궁(名弓)』 속에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그런데 시집을 내고 나자 나는 내 속에 도저히 풀어내놓지 못한 문학적 갈구가 도사리고 있음을 두려운 마음으로 감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혈을 짜다시피 이룩해놓은 『명궁』의 세계는 그러나 내게는 새로운 세계에의 눈뜸에 지나지 않았다. 불과 한 권의 시집을 내놓고 좌절하고 있는 내가 가련했다. 하지만 나는 새 길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 무렵의 정신적 방황은 실로 참담한 것이었다. 황음(荒淫)과 사주(邪酒)에 나를 내던져 버리고 나는 지옥길을 가는 듯이 방황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자.
나는 마침내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태어남에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어떻게든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의 나를 버려야 한다. 과연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만 한 마리 새로서 비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78년은 내가 과거의 나를 모두 버리는 해가 되었다. 한 권의 시집으로 니타내졌던 세계는 그리하여 버려졌다. 이 ‘버려짐’의 행동은 내가 어줍잖게도 입산을 기도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나는 산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얼마 되지도 않아 산에서 내려온 내게는 그야말로 빈사의 삶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제 철저하게 빈털털이요 외톨이였다. 긴 여름의 뙤약볕이 내게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뜻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모두가 부질없는 객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죽음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 같았다.
죽음을 생각할 지경이 되어서도 나는 소설이라는 게 있다는 깨달음에 쉽사리 도달할 수가 없었다. 하루 또 하루 막막한 날들이 죽음으로 향한 행진인 듯 어둡게 어둡게 흘러갔다. 그렇다. 그것이 비록 내 삶에 어떤 구원을 줄지는 몰라도 소설을 써보기로 하자. 그런 다음에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신춘문예까지는 앞으로 넉 달이 남아 있었다. 한 달에 한 편씩 모두 세 편의 단편 소설을 쓴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꽤 오랜 세월 시의 문법에 익숙했던 내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마지막 날까지 소식은 오지 않았다. 이제 죽으려면 우선 독한 술을… 하면서 낡은 바바리코트의 호주머니에 손을 찔렀을 때, 뒤늦게 ‘축하합니다’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쯤은 더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릴 적에 글을 끄적거리기 시작한 것은 소박하게 외로움과 그리움 때문이라고 나는 고백한다. 그것을 호소하거나 해소할 대상이 절실한 만큼 원고지에 매달렸다. 글쓰기로 언젠가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 누군들 외로움과 그리움에 몸부림치지 않으랴만, 그것은 그것과 싸우면 싸울수록 더 커지는, 신화 속의 괴물과 같은 것임을 일찍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그것을 싸워서 이겨내는 길은 없다. 지혜롭게 비켜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것이 운명이라고 하는 것임을 나는 이제 알겠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외로움과 그리움을, 너무나 커져버려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두 괴물을 붙안고 오늘도 먼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을 지혜롭게 비켜가는 방법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비켜가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내 삶에 대해서 언제나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우직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운명’이다.
그리하여 내 프로메테우스는 영원히 다시 돋는 외로움의 간(肝)을 독수리로 하여금 쪼아 먹게 해야 하고, 내 시지푸스는 영원히 다시 굴러 떨어지는 그리움의 바위를 산위로 올려놓고 올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 문학인이 된 과정은 그럭저럭 적혀 있는 것 같으나 ‘어떤 소설을 어떻게’는 여전히 오리무중 속을 헤매고 있다. 이 서문을 쓸 때는 위에 밝힌 대로 세 권의 소설집(중단편집)을 펴내고 있다. 곧이어 두 권의 장편소설을 더 펴냈으나, 내적, 외적 상황은 예나제나 마찬가지이다.◑ (소설가)


주 : 위 자료 [포엠월드]에서 가져옴.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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