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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쓰기의 지름길 2 / 윤후명

희라킴 2016. 4. 18. 18:53

소설쓰기의 지름길 2 / 윤후명

 

 

1. 프롤로그

일컬어 ‘소설 창작 강좌’인데, 나는 그 첫머리부터 전혀 다르게 시작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따위의 소제목이 붙어야 제격일 첫머리를 ‘프롤로그’라고 붙인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러므로 눈치 있는 독자는 벌써 이 이야기가 다른 ‘강좌’와는 유형을 달리할 것임을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 이 글은 그 자체가 ‘설명’보다는 ‘묘사’에 가깝기를 나는 바란다. 왜냐하면 소설은 물론 설명과 묘사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극단적으로 말해, ‘설명이냐, 묘사냐?’라고 할 때, 묘사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첫머리부터 골치아픈 이야기로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서 속시원히 대답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만약 있다면 그 사람하고는 이 자리에 같이 앉아 있고 싶지 않다고 미리 밝히기로 한다. 그 사람은 당장 가까운 서점으로 달려가 “문학개론 책 없습니까?” 혹은 “소설창작법 같은 거 없습니까?” 하고 묻고, 그 수많은 책 중에서 아무거나 한 권 사서 독파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나는 끝까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입을 다물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나아가 우리는 지금부터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서로 탐구해 나아감으로써 그 대답에 이르는 방법을 강구하기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해서 소설을 쓰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좀더 신랄하게 말하면, 소설을 쓰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직접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까지 문제는 심화 내지는 확대된다. 이른바 ‘손은 못 따르고 눈만 높다(眼高手卑)’는 상황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소설을,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첫머리부터 ‘나’를 앞세워 이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니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나의 소설쓰기에 국한된다. 나의 소설쓰기는 소설가 윤후명의 소설쓰기일 뿐이다. 보편성은 보장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나의 소설쓰기를 물론 대입시켜 보겠지만, 또한 많은 부분을 다른 문학가들의 소설쓰기 이야기를 들어봄으로써, 어떤 합의점의 도출에 이르고자 힘쓸 것이다.
소설쓰기는 어느 한 가지 정해진 방법론이 없다는 데에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 말했다시피 나의 소설쓰기는 일반적, 보편적으로서의 소설쓰기가 아니라 소설가 윤후명 개인의 소설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보편성은 어디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우선 다음 글을 읽고 생각해 보기로 한다.


一家를 이루는 정신
李東河(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무슨 대단한 작가연해서 이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꺼내는 건 아니다. 문학도들에게 주는 글을 쓰다보니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의 삶부터 돌아다 보게 된다. 그러므로 별로 신통치 못한 작가임을 전제해 두고 얘기를 계속하기로 한다.
내가 장차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까까머리 중학생 때부터의 일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설프고 막연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문학에 대한 무지도 무지거니와, 어떻게 소설쓰는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숫재 깜깜절벽인 상태였던 것이다. 그 무렵, 우연히 야시장 바닥에서 정비석님의 『소설작법』이란 책을 발견하고 가슴을 두근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밤새워 그것은 뒤적거려 봐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나마 간신히 이해하고 지침으로 삼을 수 있었던 말은 기왕에도 흔하게 들어왔던 그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 정도였던 것이다. 많이 읽으라고? 하지만 당장 무슨 책부터 펼쳐 들어야 할지 도무지 요량이 서지 않았다. 하물며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대목에서랴.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붙잡고 사생결단해야 할 도서들을 일단 자기 책상 위에 일목요연하게 갖춰둘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문학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한 노릇이다. 문학수업에는 왕도도 없지만, 또한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성문법도 역사도 없다. 스스로 더듬어서 찾아가는 방법밖에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혹 길을 잘못 들지나 않았을까 하는 불안이 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어쨌거나, 나는 그 신산한 수련기를 거쳐 지난 육십년대 중반에 등단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통치는 못할망정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소설을 써오고 있는 형편이다. 말하자면, 저 까까머리 학동시절에 품기 시작했던 그 막연한 꿈을 ―어쨋든 이 정도나마―이루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결정적 요인은 무엇일까?
작가가 되는 비결을 묻는 문학지망생들에게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이른바 ‘나를 작가로 만든 요인 네 가지’가 그것이다. 그 첫째는, 체험적인 것이다. 나의 십대는 전후의 오십년대에 해당한다. 그 거칠고 황폐한 시기에 우리가족은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 가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었던 온갖 통절한 체험들이 나로 하여금 어린 나이답지 않게 이 세계의 감추어진 모습에 눈뜨게 했던 것이다. 상식과 현상의 뒤에 숨어있는 본질에 대한 관심에서 문학은 시작된다.
두번째는, 책읽기다. 나는 십대 한 시기를 오로지 책 속에 얼굴을 파묻고 뒹굴 수 있었던 행운을 누렸다. 독서목록은 주로 세계문학전집류였다. 그 시절만해도 대구시내에는 양서들을 고루 갖춘 대본집이 몇 군데 있어서 나는 그 집들을 순례하며 무작정 집어다 읽었다. 만사를 -학교가는 것조차도- 작파한 채였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작들을 이때 읽었다. ‘무작정 읽기’라고 내가 부르는, 이 시기의 남독이야말로 생각하면 내 문학의 텃밭에 더없이 좋은 밑거름이었다고 믿고 있다. 문학적 재능이라는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의 십대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없다. 문학이나 예술을 위해 이보다 불행한 환경은 달리 없으리라.
세번째 요인으로는 습작을 든다. ‘안고수비’라는 말이 있다. 눈은 높으나 손은 따르지 못한다는 뜻으로, 머리 속에는 희대의 걸작들이 득시걸거리지만 정작 원고지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마는, 그런 문학도들을 비아냥대는 말이다. 습작을 게을리한 탓이다. 원고지에 끈질기게 매어달리는 집요함 없이는 한편의 소설도 끝내기 어렵다. 나는 하루에 단편소설 한편씩을 쓴다는 목표를 내걸고 씨름해본 적이 있다. 고작 일주일을 버티는 것으로 끝나고 만 헤프닝이었지만, 그러나 그만큼 습작에 매달렸다는 증거다. 얼마나 많은 문학도들―특히 소설지망생들이 이 대목에서 주저앉고 마는지 모른다. 습작원고가 자기 앉은 키만큼은 쌓여야 비로소 작가가 된다는 말이 있다.
결국 전통적인 삼다주의―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선현의 가르침을 열심히 좇았다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사실이 그러하다. 그러나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하며,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작가의 꿈을 이루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한 번 뜻을 세운 이상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은밀히 품기 시작한 저 중학생때 그것은 한낱 어설프고 막연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문학이 무엇이며 소설이 어떤 것인가도 실상은 알고 있지 못하였다. 하물며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랴. 한편의 소설을 쓰는 작업이 어차피 그런 것이듯, 작가가 되는 길이야말로 홀로 시계 제로의 안개 속을 끈기있게 더듬어 오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자신이 특별한 재능을 타고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보다 별나게 더 노력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오직 한가지 분명한 이유란 다른 게 아니다. 작가의 꿈을 품고부터 그것을 이룰 때까지 단 한번도 그 꿈을 버린 적이 없었다는 바로 그 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한번 뜻을 세운 일이라면 마침내 그것을 이룰 때까지 꿈꾸는 일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어찌 문학도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랴. 욕구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변덕이 심하다. 열정만 가지고도 안된다. 역경에 처하면 쉽게 좌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은 한결같은 마음이며, 그것은 자기 꿈에 대한 순수한 사랑없이는 불가능하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 뜻을 이룰 때까지 꿈꾸는 일을 계속하는 것― 그것 없이 일가를 이루는 사람은 없다.

겨드랑이에 날개 달아 붙이기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 시절
한승원(소설가)

그 당시 우리 아버지께서는 나의 소설 써서 응모하는 일을 조선조 선비들의 과거에 비유하였고, 나의 그 소설이 세상에 발표되는 것을 등용문 통과와 신분상승의 기회쯤으로 여겼다.
나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탈바꿈이었다. 구름 저쪽에 있는 새 세계로 나아감이였다. 거듭나기였고, 보다 나은 삶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소설 쓰기는 나의 존재의미였다. 나에게 그것의 실패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실패가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죽음 그 자체일 터이었다. 누에고치에서 나비로 태어나지 못하고 마는 일은 나의 존재의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서울 미아리 고개 너머 왼쪽 비탈진 그곳은 세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상승기류의 한 출발점이었다. 그 세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자는 알고 있었고 모르고 있는 자는 모르고 있었다. 열심히 뽕잎 갉아 먹어대기로 말미암아 그 새로운 세계는 마치 양파처럼 한 껍질 한 껍질 벗기어졌다. 세상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거나 내 삶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거나, 좌우간 그 일은 아픔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창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날개를 가지려고 하는 자들은 모두들 개멋이 들어 있었다. 입으라는 교복을 입지 않고 까맣게 염색한 군복을 걸치고 다녔다. 머리를 덥수룩하게 길렀다.
문학을 하는 스물 한 두살 먹은 청년이나 처녀들에게는 순백의 열혈이 있었다. 이른바 문학청년이었다. 그 열혈 때문에 그들은 더욱 아픈 내출혈이 생기는 법이었다. 하지 않아도 좋은 고민과 번민을 하고 자학하고 불만족의 울분을 토막질하듯이 늘어놓았다.
한승원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고 헤매면서 몸부림쳤다. 거기엘 자주 출입하곤 한다는 친구를 따라 창녀촌의 쿠릿한 냄새를 맡으며 어술렁거리고, 비오는 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종로통이나 서울역에서 미아리 고개까지 걸어서 오곤 했다. 이방인 흉내였을까. 어느 누군가의 소설 주인공처럼 살아보고 싶어서였을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연습이었다.
무작정 상경한 청년은 돈이 없어 자취를 했고, 밀가루와 강냉이 가루에 우유가루를 넣은 죽을 쑤어 먹었다. 피를 팔아 깡술을 마셨다. 어처구니 없는 소모전이었고, 자살행위였다.
밤을 세워 소설을 썼고, 도시락을 싸들고 아침 일찍이 국립 도서관에 들어가서 세계 명작들을 읽었다. 도서관에 들어와 공부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시파들이었다. 고시파들은 소설 지망생의 책읽기를 흘끔거리며 비웃었다. 정신 빠진 놈이라고 한심스러워 했으리라.
학생시절에 세계 명작들을 훑어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선배들의 말을 따라 쓴 약을 먹듯이 고개를 회회 저어가면서 도스또예프스키, 까뮈, 싸르트르, 앙드레 지이드, 헤밍웨이, 로렌스, 톨스토이, 고리끼, 제임스 조이스 따위를 읽었다.
같은 학과 학생들보다 세 살이나 위였다. 삼년 동안 농사 짓고 김 양식을 하고 들어 갔던 것이다. 그 삼년 동인 나는 중학교 준교사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주경야독을 하였던 것이다.
『고시계』라는 잡지에서 중학교 준교사 검정시험에 합격한 자가 쓴 합격기를 읽었다. 말미에 그 자가 그 시험을 위해 읽어냈다는 책들이 적혀 있었다.
조윤제의 『국문학사』, 홍기문의 『정음 발달사』, 최현배의 『한글갈』 『우리말본』, 김형규의 『고려가요연구』 『국어학 계론』, 양주동의 『고가연구』, 김부시의 『삼국사기』, 일연의 『삼국유사』, 방종현의 『고시조 연구』, 조연현의 『현대 문학사』, 백철의 『문학개론』 등 삼십여권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사다가 일일이 밑줄을 그어가면서 독파했던 것이다. 한데 거기에서는 단 한 문제밖에는 출제되지 않았다. ‘신소설에 관해서 쓰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는 모두 어학에 관한 문제들 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때 읽어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나 향가나 고려가요나 고시조나 고대 소설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대학에 들어가자 교수들의 강의 내용이 별 것 아니었다. 내가 다 읽어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따로 공부하지 않고 밤낮으로 소설만 썼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에는 술을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친구들을 보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취한 친구들과 같은 수준으로 취해 보려고 막걸리에 소주를 타서 마셨다.
시 실기 강의를 맡은 김구용 선생께서 우리에게 말했다.
“시나 소설을 쓰려 하는 사람은 시나 소설만 읽어서는 안된다. 평론도 읽어야 하고, 미술 전람회에 가서 좋은 그림도 감상해야 하고, 음악 감상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연극도 보아야 하고 좋은 영화도 보아야 한다. 철학도 공부하고 역사도 읽어야 한다.”
그 무렵에 남산에 드라마센터가 개관했다. 거기에서 『햄릿』 『밤으로의 긴 여로』 『세일즈맨의 죽음』 『포기와 베스』를 공연했다. 그 때마다 나는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서 그것을 보러 갔다. 대한극장에서 상영하는 『벤허』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십계』 따위를 보러 가기도 했다.
세계의 대 시성들과 대 문호들을 만나는 일은 경이롭고 두려운 일이었고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 음악감상실을 드나들었다. 베토벤, 차이꼽스끼, 드볼작, 브람스, 헨델을 들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오페라도 열심히 들었다.
쓰고 또 써도 글은 되지 않았다. 김동리 선생은 나를 소설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일학년 한 학기 동안을 나는 방황하고 몸부림치고 악을 써대면서 보냈다. 그 해 여름 방학 동안에 쓴 단편소설 한편을 동리 선생이 극찬을 해주었다.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헌 책방에서 문학전집을 사다가 읽고 ‘전후 문제작가 선집’들을 읽고 ‘노벨문학상 수상전집들’도 읽었다.
그 서라벌 예술대학은 초급대학이었으므로 나는 2학년 후학기를 마치자 마자 자원입대를 했고, 나의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나는 군대생활을 문학수업의 한 방법으로 알고 인내하였다.
영내에서도 나는 소설을 썼다. 제대를 하고 학교에 취직을 한 다음 나는 완전군장을 하고 고지 기어 오르기를 하듯이 쓰고 또 썼다. 제대를 한 이듬해 나는 바라던 소설가 모자 하나를 얻어쓰게 되었다. 소설가 모자 쓰는 일을 과거 합격과 등용품으로 알고 계시던 아버지께서는 그 때 이승에 계시지 않았다.
30년 동안 소설을 써왔지만, 나는 지금도 소설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한편의 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늘 두려워지곤 한다. 때문에 틈이 나는대로 세계 명작들을 읽고 노자나 장자를 읽고 불경을 읽고 또 읽는다. 나는 요즘 로렌스와 카잔차키스와 마르께스와 젊은 후배 작가들을 새롭게 읽으면서 절망하곤 한다.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박양호(소설가, 전남대학교 교수)

가을이 되면 나는 책상위의 먼지들을 쓸어 내곤 한다.
여름철이면 더위를 몹시 타는 나는 청년시절부터 여름이면 늘 여행을 하곤 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지방에 있는 친구들한테 신세를 지거나 절간 근처에서 망연히 책을 읽고는 했다.
그러다가 가을이 시작되면 새삼스럽게 책상머리를 정리 정돈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를 쓰고는 한다.
돌이켜 보면 올 여름의 그 지독한 더위 속에서 나는 병원을 다니느라고…, 또 여행을 하느라고 한여름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제 가을을 맞아 연구실 밑에서 찌르륵거리는 가을 풀벌레 소리에 문득 고개를 흔들면서 흐트러져 있는 내 영혼을 맑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람들의 말대로 십대의 봄을 지내고 이 삼십대의 여름을 지나 사십대 후반의 인생살이 가을을 맞았으나 남은 것이 없어 허허로울 뿐이다. 인생의 봄부터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쓰는 일에 매달려서 이제 어김없는 중년을 맞았으나 아직도 스스로 내세울 만한 대표작 한편이 없으니 딱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여지껏 그래 왔듯이 결국 내가 할 일은 소설을 쓰는 일이니 이제 남은 인생이 주어지는 대로 또 열심히 쓸 뿐이다.
대학 일학년 때의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소설은 1프로가 재능이고 99프로가 노력이다.”
그렇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많은 문학도에게 있어서 최고의 적은 과연 자기 자신이 문학으로서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내부의 적이다. 그 고민 때문에 그 좋은 세월을 술로, 혹은 이상괴상한 몸짓으로 방황하는 수가 많다. 그런 문학도는 문학을 하는데 있어서 99프로가 재능이고 1프로가 노력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나 자신만 하더라도 74년 등단이후 지금까지의 연간 4~5편의 단편과 1편 정도의 중편 소설을 20년간 꾸준히 발표해 왔다. 그래서 그 결과로써 몇 권의 창작집과 또 몇권의 장편 소설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읽는 소설가 지망생인 젊은이는 1년간 몇 편의 단편을 썼는가? 그리하고는 작가 지망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그렇게 노력하지 않고도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의 대한민국 문단이 단 1권의 소설집으로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작가가 되는 그런 왜소한 역사밖에는 안되는가?
따져보면 아주 자명한 대답이 나온다. 그것은 ‘문학이란 쓰는 것이다’라는 명제와 직통하는 것이다.그 이외의 것이 있다면 읽는 것이다.
엄연한 것은 지금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 세월도 결국은 가게 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인생의 가을을 맞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국은 죽게 되는 지극히 논리적인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허망한 삶속에서 문학을 택했으면 그날의 하루하루를 쓰고 읽는데에 다 바쳐도 모자라는 것이 시간인 셈이다.
그런 각오와 노력을 하는 사람만이 우선 작가가 될 것이고… 그 이후에도 계속 정진하는 사람만이 한 사람의 작가로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소설을 쓰는 일은 아주 길고 긴 마라톤을 하는 것과 같다. 40년 50년을 끊임없이 소설을 써내야 하는 일이 작가의 길인 것이다. 따라서 꾸준히 참고 기다리면서 계속 쓰는 사람에게는 영광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도 한 때는 문학을 했다’라는 자조만 읊조리는 사람이 되거나 혹은 문학 구경꾼으로 남을 것이다.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하지만 문창과에 들어 왔다는 것은 이미 갈길을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가지 뿐이 아니잖는가?◑

◇윤후명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했으며,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과 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명궁』, 창작집으로 『부활하는 새』, 『원숭이는 없다』, 장편소설로 『별까지 우리가』, 『약속없는 세대』 등이 있다. 녹원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한국창작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주 : 위 자료 [포엠월드]에서 가져옴.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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