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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 쓰기의 지름길 1 / 윤후명

희라킴 2016. 4. 18. 18:52

 

소설 쓰기의 지름길 1 / 윤후명

 

 

어느 소설가 지망생의 편지

한 번도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초면에 이렇게 무례한 서신을 올리게 됨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전혀 모르시지만, 저는 선생님의 존함을 잘 알고 있고 선생님을 많이 만나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낳으신 작품과 언론매체를 통해서 말입니다.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으신 선생님께 무례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게 된 사연이나 목적을 명확하게 말씀드려야 정도일 것 같습니다.
저 ○○이라는 사람은 소설가가 되고자 합니다.
되고자 한다고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확연하게 체득하고 있습니다만 이제 저는 일생에 너무나 큰 병을 얻어 헤어날 길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일부 친구들은 “이제 주제 파악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걱정어린 충고와 조언을 하고, 제 아내는 “이제 마음 편하게 살 때도 되었는데 왜 사서 고생이슈?” 하며 극구 만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용기를 듬뿍듬뿍 주는 후견자도 있으니, 그들은 바로 저의 아들과 딸입니다.
”아빠, 소설 언제 써?”
이 말은 저에게 있어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이요, 표류하는 난파선에 등대요, 가슴이 울컹거리는 청량제입니다.
선생님!
저는 타고난 재주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며, 아둔하고, 둔탁하고, 볼품없는 한덩이 메주에 불과한, 나이만 39살이나 된 정말 한심한 우수마발입니다. 이런 제가 감히 소설을 쓰고자 한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다가 기겁할 일이라는 겁니다.
선생님, 그러나 저는 평생을 두고 이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겁니다. 죽는 순간까지 평생의 업으로 이 길을 가리라고 이미 혼화(魂化), 육화(肉化)가 되어버렸습니다.
선생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진수렁에 빠져 헤매는 저에게 힘을, 용기를 주십시요! 그 진수렁에 헤매도 저는 결코 좌절하지 않겠습니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일생대란(一生大亂)이기에 사나이 나이 사십이 되어 이렇게 목을 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린 시절 배움의 길에서 탈락하고, 뒤늦게 방송통신대학 법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더 늦게 뜻을 갖고 문학의 길에 들어선 저는 2년 전 ○○대 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열정을 불태우고 있으나, 길은 요원하고 고목나무에 새싹을 돋우려 하니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높은 절벽만 실감할 뿐입니다. 3년 전부터 나름대로 정열을 퍼부었습니다만,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출발은 고사하고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저승사자처럼 한스러워 뼈를 깎는 눈물만 삼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로 창작의 염을 부여잡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만, 더 깊고 끝을 알 수 없는 심연만 느낄 뿐입니다. 10세 때 시인이 되어보겠다는 어렴픗한 경험과,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일기를 써 온 경험밖에 없는 졸부로서, 대학에서 전공도 못했고, 전문 강좌 또한 수강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설창작 서적 몇 권을 읽고 단편소설을 분석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제, 소재, 에피소드, 구성, 인물, 배경, 사상, 시점, 문체, 겉얘기 등등을 모아 창작노트를 준비하여 출발하고자 하면 막히고, 출발하고자 하면 막혀버리니 무슨 연고인지 무슨 마가 덮여 씌었는지….
선생님,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고귀한 조언의 빛을 주십시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아주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편히 앉아서 공명을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 불치의 중병, 천만길 늪에 바진 저에게 지푸라기가 어떻게 생긴 것이라고 조언만 해주시면 생명줄이 붙어 있는 한 꼭 잡고야 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고귀한 말씀, 꼭 주십시오! 그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이 길은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영광의 길도 아닌 것, 알고 있습니다. 출산보다도 더 큰 고통일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눈물과 땀, 그리고 피나는 가시밭길인 것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숨을 쉬고 있는 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이젠 저의 의지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16년 동안 농민을 지도하고 있는 저는 ○○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홀로 가는 길임을 압니다. 꼭 읽어야 할 소설창작 교과서와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적, 필수적 요소와 소설가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와 창작공부에 도움이 되는 장·단편 소설과 창작노트는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선생님의 고견을 주십시오.
창작에 여념이 없으신 선생님께 부담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저에게 용기를 주십시요!

‘이상 문학상’을 받고 나서 나는 이와 같은 엄청난 편지를 받았다. ‘엄청난 편지’라고 한 뜻은 웬만한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편지를 이렇게나마 공개하고, 내 막막한 ‘소설쓰기의 지름길’을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가령, 이 편지에 우선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다음은 제임스 A. 미치너의 책 『작가는 왜 쓰는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러 권의 책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효과적인 이야기 방법이라는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고, 내 창작에 일관하는 몇 가지 신념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나는 나처럼 동물인 다른 인간들과 이 지구상에 함께 살고 있으며 그 인간의 행태와 제도는 충분히 연구하고 분석할 가치가 있다.
―증거를 추적해나가는 데서 이차적인 자료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소설을 구성해나가는 데서 자극적인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것에 대한’ 소설은 늘 실패로 끝난다.
―성공한 소설은 인물들로부터 시작하고 그들과 함께 지적,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인물들은 그들이 처해진 상황, 그들의 시대적 주제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위대한 소설은 작가가 외롭게 인간의 경험을 탐구하는 데서 얻어진 것이지 학술적 조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제인 오스틴, 투르게네프, 그리고 헨리 제임스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물론 소설은 학술적 조사를 바탕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조사는 예술적 견지에서 볼 때 늘 이차적인 기능에 머물고 만다. 조사를 바탕으로 한 작가들이라면 졸라, 발자크, 톨스토이, 디킨스, 드라이저 등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휼륭한 소설들은 늘 예술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조사는 ‘빙산의 일각’ 원칙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 완성된 작품 속에서 조사는 10분의 1 정도만 드러나야 하고 나머지 10분의 9는 가라앉아서 작품 전체에 안정성과 강력한 힘을 주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을 늘 한쪽으로 쏠리는 괴짜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그러다가도 내 성품과 교육에 알맞은 문장 스타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벌어진 예술가는 참으로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을 기획하는 데서 건축적 구도가 완성되지 않으면 별로 해놓은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어휘를 선택하는 데서 음악이 최우선이다.
―이야기를 해나가는 데서 두 가지 타입의 서술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즉 묘사(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을 직접 보여주는 것)와 진술(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을 간접적으로 요약하는 것)이 그것이다. 둘 중 어떤 한 쪽을 특별히 잘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두 가지를 교대로 사용하면서 예술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이야기 방법의 요체이다.
―소설을 이루는 중요 부분들을 예술적으로 잘 연결시키는 것이 이야기 방법의 핵심이다. ‘한편 어디어디에서는―’하고 장면을 바꾸는 것은 고전적인 수법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방법은 너무 진부하여 오히려 그 효능이 떨어지고 있다. 그러니 작가는 그 나름대로 소설의 각 부분을 연결시키는 장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독자의 주의를 끄는 제일 좋은 방법은 훌륭한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독자의 주의를 계속 끌려면 무엇보다도 이야기에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소설의 처음 몇 장을 아주 어렵게 만들라. 그렇게하여 일부 독자들을 떨어져나가게 하라(내가 쓴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분명 있다. 또 내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과도한 상징과 부자연스러운 은유는 천재작가 혹은 문예창작과 학생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다.
―애매모호하지만 재미있는 사투리를 사용하고 싶은 욕망은 극력 억제되어야 한다.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는 책들은 반짝 인기를 누리지만 곧 잊혀져 버리고 만다.
―늘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하여 글을 쓰라. 만일 어떤 책을 쓰려고 하는데 그 내용이 내게 재미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재미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저자가 아니라 작가이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증언을 해야 한다. 그의 작품은 꾸준하고 유기적인 전체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인용해놓고 보니, 이것도 그리 쓸모있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편지를 보낸 소설가 지망생에게는 요컨대 한 마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 마디 금과옥조가 필요할 것인데, 도무지 어렵기만 할 뿐이리라.
게다가, 우리에게는 『남태평양』 『도곡리 철교』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작가 자신부터 스스로를 겸양하여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기도 한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그의 책을 조금만 더 읽어보기로 한다.

어느 주말,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난 이미 아흔 살이고 다 써버린 인생의 끝에 와 있어. 난 메인 게임에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선수야. 그러니 작가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
나는 메일러, 바이덜, 캐포티 같은 작가가 은근히 부러웠다. 그들은 자신이 예술가임을 끊임없이 증언 하였다. 그리고 예술가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늘 일깨워주었다.
스스로 공인임을 자처하는 작가들과 비교해 볼 때 나 같은 작가들은 노조에 가담하지 않은 노동자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노조비도 내지 않고, 파업을 하거나 동료 노동자를 채근하는 더러운 일도 하지 않고 노조가 이끌어낸 임금 인상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임 승차꾼이고 또 그 사실을 인정한다.

자, 이제 읽기를 끝내기로 한다. 요컨대 이런 뼈아픈 반성을 하고 있는 그의 조언에서 우리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엿볼 수는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그 책에 씌어진 트루먼 캐포티의 일화를 도입부로 다시 인용하면서, 한 대학에서 행한 강연의 일부를 다음에 소개하기로 한다.◑ (소설가)


주 : [포엠월드]에서 가져옴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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