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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필의 `隨筆`을 깨트립시다/이관희

희라킴 2016. 4. 2. 08:23

대한민국 수필 작가님에게

 

수필의 '隨筆'을 깨트립시다
- 수필이
'隨筆'에서 해방되는 날을 꿈꾸며 -

   
   

  수필문학의 본질적인 특징(정의 定義)은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의 특징이란 그것이 그 일로 하여금 그 일이 되게 하는 근본 요인으로 작용할 때 진정한 의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수필문학의 특징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난 1세기 동안 한국 현대수필문학은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을 수필 작가마다 가슴에 표찰이라도 해서 달 듯, 그리고 수필이라는 마을 거리에 현수막이라도 내다 걸 듯하여 왔지만 그 결과는 <우물 속에 빠진 달>이나 되풀이 해서 그려 온 것이 우리 수필 문학의 역사였으며 현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물 속에 빠진 달>이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수필은 문학이론적으로 무엇을 창작하는 문학인지 오리무중이라는 뜻 입니다.
  문학이론서를 찾아보면 시는 시어를 창작하고 소설은 인물(사건)을 창조하는 문학이라는 뜻이 금방 눈에 들어 옵니다. 그러나 수필은 아무리 책장을 뒤적여 보고, 이 책 저 책을 찾아 보아도 무엇을 창작하는 문학이라는 <문학적 창작 대상>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론서 마다 되풀이 하고 있는 말은 수필은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는 창작 이론이 아니지 않습니까?

  창작이론이란 '무엇을 어떻게' 창작하느냐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즉 시는 시어를 창작하고 소설은 이야기(인물)를 창작한다고 말하듯이 수필은 무엇을 창작한다고 그 <문학적 창작 대상>을 말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수필은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것은 글의 형식에 관한 말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필자는 그 말이 글의 형식이나마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매우 의문이지만) 무엇을 창작한다는 <문학적 창작 대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무형식'을 창작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혹은 '붓 가는 대로'를 창작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 밖에 수필은 작가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쓰는 문학이라는 등등의 말들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들은 글의 제재(혹은 주제)에 관한 말들이 아니겠는지요? 작가가 느끼고 생각한 것이라든지 대상(사물)의 의미에 관해 말하는 일은 수필만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예술활동 공통의 주제(혹은 제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가 느끼고 생각한 것과 사물의 의미에 관해 말하지 않는 음악이나 회화나 시나 소설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음악이 음악이 되고, 회화가 회화가 되며, 시가 시 되고, 소설이 소설이 되는 그 각기 다른 예술 장르의 특징은 그 느낀 것과 생각 한 것, 그리고 사물의 의미를 가져다가 예술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구체적인 창작물로 창작해 내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희곡은 이야기의 줄거리, 인물의 성격, 그리고 배경의 분위기 등을 통해서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시 또한 운율의 조직이라든지 이미지의 구성에 의해서 의미가 함축적으로 표현된다(金永德 <문학개론> 일조각).

  즉 음악은 그 <느낀 것과 의미>를 가져다가 노래를 만들고, 회화는 그림을 그리며, 시는 시어를 창작하고, 소설은 인물(사건)을 창조하는 등 각기 그 예술적 창작 대상을 창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필은 무엇을 창작하느냐 이 말입니다. 몰톤(R.G. Moulton)식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수필이 창작하고 있는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조연현 <문학개론> 정음사) 그 문학적인 <창작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수필은 결국 <있는 것의 토의의 문학>인 비창작 산문문학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필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느낀 것과 의미>를 가져다가 <'어떤' 존재론적 창작 대상을 '어떻게' 창작하느냐>에 관한 대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대답이 시어를 창작하는 일을 통해서 의미를 형상화하는 것입니까? 혹은 소설적인 인물(사건)을 창작하는 일을 통해서 의미를 형상화하는 것입니까? 진정으로 필자는 우리 수필문단의 동의와 합의를 얻고 있는 권위 있는 수필문학 이론서를 통해서 그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대답은 말고 말입니다.

  우리 수필문학이 내어 놓고 있는 창작이론에 해당 한다고 할 수 있는 이론이라면 <있는 것의 토의의 문학>-(조연현 <문학개론> 정음사)이라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있는 것의 토의'가 순수창작문학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작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비창작 문학에 속하는 산문문학을 이름입니다. 그 같은 산문문학의 창작적인 요소라면 겨우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조연현 <문학개론> 정음사) 정도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 현대 수필 근 1백년 동안 수필문학이 아직 그 창작이론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수필은 문학이론상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순수 창작문학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창작 문학이 아닌데 어떻게 '창작 이론'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수필 문학이론서마다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말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그것을 수필문학 이론의 최고봉처럼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수필은 순수 창작문학이 아닌 '있는 것의 토의'인 산문문학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수필문학 이론서 마다 창작 이론이 아닌 <글 쓰기 안내서>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수필문학이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창작문학'이었다면 이론가들 마다 아주 활발한 독자적인 창작이론을 전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필은 순수 창작문학이 아닌 '있는 것의 토의'의 산문문학일 뿐이었기 때문에 <글쓰기> 이상의 이론을 말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수필작가들은 모두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이 순수창작문예물이 아닌 작문 정도의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수필작가만도 2천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2천여명의 대한민국 수필 작가들 중에 자신의 작품이 작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비창작 문학이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특별히 우리의 수필문학은 서양의 '에세이'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문예수필>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발전되어 왔습니다. '문예수필'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무 문학이론서에서도 그 말뜻을 풀이해 주고 있는 것을 본 일은 없지만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는 대한민국 작가님들은 틀림없이 그 말을 <창작수필>이라는 뜻으로 알고 창작작업(?)을 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 2천여명의 수필작가들은 자신이 창작하고 있는 그 <문학적 창작 대상>이 무엇이라고 대답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시어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수필은 시가 아니니까요. 소설적 이야기(사건. 인물)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수필은 소설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무엇을 창작 한단 말입니까? 수필창작의 실체가 문학이론적으로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를 창작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경험한 이야기를 쓰는 것'을 가지고 '창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란 수필의 소재(혹은 제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서 수필가는 무엇을, 즉 그 어떤 <총계에 부가하는 존재론적인 문학적 대상을>을 창작하느냐가 바로 창작이론에 대한 대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는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문학적 대상. 사물)를 소재로 삼아 <시어>를 창작하고, 소설은 <허구의 인물(사건)>을 창작하는데 수필은 무엇을 창작하느냐는 말입니다. 수필을 창작한다구요? 글쎄 그 창작한다는 수필의 문학적 창작 대상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시어' 입니까? '인물(사건)' 입니까?

   대답이 없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의 2천여명의 수필작가들은 <창작이론>도 없는 창작 작업을 하고 있다는 기이한 현상 속에서 글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수필문학이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우물 속>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 하고 필자는 조심스럽게 진단 해 봅니다. 수필 이론이 처음에 잘못 뒤집어 쓴 외투를 놓고 '실은 무형식이라는 말은 형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또한 붓 가는 대로라는 말도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라는 식으로 '隨筆'이라는 이름자의 뜻에 관해 변명하는 일에만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있는 사이에 시와 소설이론은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도망가고 있습니다.

  달은 본래 인간 세상을 비추는데 달로서의 의가 있는 것입니다. 달이 인간 세상을 굽어 보는 것이라면 수필은 당연히 달이 굽어보는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그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달이 우물 속에 빠져 있으니 인간 세상을 비추지 못하고 따라서 수필가는 우물 속에 빠진 달만 되풀이 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필의 DNA(정의 定義)가 진정 그것의 '무형식성과 붓 가는 대로'에 있다면 우리 수필문학은 오늘 당장에 저 <우물 속에 빠진 달>을 밖으로 건져 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물>이란 <한정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정된 곳 쳐 놓고도 폐쇄성을 면치 못하는 것이 우물의 공간적 성격입니다. 그렇다면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야 말로 '형식'이며 '구속'이었던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달을 건져 내야 합니다. 달을 '무형식과 붓 가는 대로'라는 형식과 구속에서 해방 시켜야 됩니다. 그리하여 수필로 하여금 무주 공산을 환히 비추며 온 세상을 활보하고 다닐 수 있도록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저 <우물 속에 빠진 달>을 건져 내는 자기 개혁의 행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수필이 '隨筆'에서 해방 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隨筆'이라는 글자 뜻을 곧장 '무형식'과 '붓 가는 대로'라는 문학이론적인 말로 옮겨 놓은 그 잘못된 <뜻 풀이>야 말로 한국 현대 수필을 <우물 속에 빠진 달>이 되게 한 그 장본인, 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隨筆'이라는 글자의 뜻은 본래 '따라서 수'자에 '쓸 필'자로 <붓 가는 대로 쓴다> 라는 뜻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의 뜻은 아무렇게나 라는 뜻이 아니고 물 흐르듯이 막힘 없이 써 내려 가는 '자연스러운 글'이라는 설명은 '隨筆'을 변명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형식'이라는 말 역시 '형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아무 제한이나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형식'이라고 토를 다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본래부터 '隨筆'이라는 글자 뜻은 '붓 가는 대로'가 맞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에세이'라는 글자 뜻도 결국은 '무형식의 시험 삼아 써 보는 글'이라는 것이 맞습니다. 그 글자들의 뜻을 놓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라느니 '자유스러운 형식'이라느니 변명 해 봐야 낯 가리고 아웅하기 이고 손 바닥으로 해 가리기 밖에 안 됩니다. '隨筆'이라는 말뜻은 우리 말로 하면 어쩔 수 없이 '아무렇게'라는 잘못된 뜻으로 오해 될 소지가 충분히 있는 말인 것이 맞습니다.

  문학이론서마마 빠지지 않고 소개하고 있는 홍매(洪邁)라는 사람이 처음 수필이라는 말을 썼을 때의 '隨筆'이라는 글자의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습벽이 게을러서 글을 많이 읽지 못했다. 생각나는 대로 혹은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적어 놓았기 때문에 차례가 맞지 않아 隨筆이라 해 둔다(윤병로 외공저 <문학개론> 성균과대학교출판부)"

  그리고 문학이론서 마다 소개하고 있는 몽테뉴의 '에세이'라는 말도 '무형식의 시험 삼아 써 보는 글'이라는 뜻이 맞는 뜻풀이 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수필이란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을
'隨筆' 이라는 이름 자의 뜻대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대답 한다면 수필이란 '게으른 자'들이나 쓰는 글이요, '글을 많이 읽지 못한' 무식한 자들이나 쓰는 글이며, '생각나는 대로' 아무 계획 없이 '그때 그때 형편에 따라',  '앞 뒤 차례도 없이' 그저 '시험 삼아 써 보는', <아니면 말고> 식의 잡문이나 낙서 같은 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시중에서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이 '아무렇게나'라는 뜻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근거 없는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명하신 수필작가이신 모모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이런 글이나 쓰시는 작가님이시란 말입니까?

  아니지요! 세상에 그런 모욕이 어디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대한민국 수필작가 여러분! 여러분은 문학이론적으로는 변명 할 길이 없는 바로 그러한 작가님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대한민국 문학이론서 그 어디에도 수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론으로서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그 이상의 이론을 내어 놓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동안 필자가 찾아 본 문학이론서들 가운데서 단 한 권, 윤재근 교수의 <말하는 에세이>(본지 2007 봄호 윤재근 <말하는 에세이> 참조.) 라는 책에서 비로소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가 아닌, <심상의 산문>이라는 구체적인 명제를 들어서 수필문학의 창작이론을 개진 해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문단적 공론에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隨筆'이라는 글자의 뜻은 <붓 가는 대로>가 맞습니다. 그리고 '에세이'라는 말의 뜻도 <무형식의 시험 삼아 써 보는 글>이라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은 문학이론서마다 동의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필자는 대한민국 천하의 수필가님들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隨筆'이라는 글자의 뜻이 그렇다는 것 하고 수필 창작법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입니다! 아니, 어째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이름자의 뜻 풀이에다 그것의 존재 방식을 꽁꽁 붙들어 매 놓아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소설은 결코 '小說'이라는 '작을 소' 자에 '말씀 설' 자라는 글자의 뜻에 소설의 운명을 매어 놓고 있지 않습니다. 소설 뿐만이 아닙니다. 필자도 '寬熙'라는 필자의 이름자의 '너그러울 관' 자와 '밝을 희' 자에 나의 생존의 목을 매어놓고 있지 않습니다. '寬熙'라는 이름은 나라는 개체를 다른 개체들과 구별하여 부르는 일정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나의 이름자의 뜻에서 나를 낳으신 부모님의 나에 대한 뜻을 헤아려도 보기도 하고, 나 자신 또한 나의 이름자의 뜻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아보는 일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앞을 내다보는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열어 놓고 하는 살핌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름자의 뜻으로 나의 발목을 묶어 놓는다면 그것은 폐쇄적인 운명론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름 자의 뜻이 소 말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隨筆'이라는 이름자의 뜻은 소 말뚝이 되어 왔고 지금 현재도 그렇습니다!

  '小說'이라는 말의 동양적인 뜻은 "시정의 잔소리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구인환 구창환 <문학개론> 삼영사). 그러나 소설이 '시정의 잔소리'에 묶여 있습니까? 내 말의 뜻은 소설문학이론이 '시정의 잔소리'라는 이름자 뜻에 발목이 매어서 그 창작 이론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隨筆'은 그 이름자 뜻에다 목줄을 매어놓고 근 1백년의 역사가 지나도록 괄목할만한 문학적 업적은 고사하고 그 창작이론조차도 내어 놓지 못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隨筆'이라는 글자의 뜻은 아무리 <그 본래의 뜻은 '자연스럽게'>라는 뜻이라느니 혹은 <자유스러운 형식>이라느니 좋게 변명해 보았자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격 밖에 안 됩니다. '隨筆'이라는 글자의 뜻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이고 또한 '에세이'라는 말도 '시험 삼아 써 보는 글'이라는 뜻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누가 감히, "그렇기 때문에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써야 된다"는 이론 아닌 이론을 세워놓고 한 발짝도 거기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은 것입니까? 산신령이 그랬습니까?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뜻의 말도 '아' 할 때 '아' 하지 않고 '어' 할 때 '어' 하지 않으면 다른 뜻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무형식'과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이야 말로 바로 '아' 할 때 '아' 하지 않고 '어' 할 때 '어' 하지 않은 말이 아니었을까요?
  '무형식'의 무 자는 '없을 無' 자 입니다. 없을 무자의 첫 번째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다가 오는 뜻은 어쨌든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런 게 아니고 없다고 할 정도로 자유스러운 형식---"이라느니 하며 매번 변명을 달아 주어야 한다면 그 말뜻은 이미 '아' 할 때 '아' 하지 않은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형식이 없는 것은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어떻게 존재하는 것의 이론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지난 1백년간 이 땅에는 분명 수필문학은 있었지만 그 창작이론은 나올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隨筆'의 그 <'없을 無' 자 형식>이라는 이론 아닌 이론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또 '붓 가는 대로'라는 말도 "실은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참 변명을 해 주어야만 한다면 그 말뜻 역시 이미 '어' 할 때 '어' 하지 않은 결과가 되고 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지난 근 1백년 동안의 한국 현대수필문학의 역사가 아니었느냐 말입니다.

  물이 물 흐르듯이 흐르려면 아무렇게나 흘러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제방 공사를 잘못 해 놓으면 오히려 홍수가 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이 흐르는 데는 질서와 조화가 있어야 되는 법인데 잘못된 제방 공사가 그 질서와 조화에 되레 구속을 가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隨筆'이라는 글자의 뜻하고 수필문학 이론하고는 아무 직접적인 상관이 없어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小說'이라는 글자 뜻하고 소설이론 하고는 아무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도 세계사가 놀랄만한 걸출한 소설 문학작품들과 그 이론이 나올 수 있었던 것 하고 같은 이치 입니다. 그런데 누가 수필이란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이론 아닌 이론을 정 해 놓은 것입니까? 그 같은 매우 <잘못된 문학이론적 표현>이야 말로 바로 자연스런 물 흐름의 질서와 조화를 무시한 잘못된 제방공사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 잘못된 제방공사 때문에 수필문학은 문학적 질서와 조화가 있는 문학이 되기는커녕 독자들로부터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실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모욕>만 받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필자는 그 동안 살펴 본 수필문학이론서 마다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수필문학의 정의에 대해서 변명하고 있지 않은 이론서를 본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하나 같이 그 말 뜻은 본래 형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며, 또한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변명을 하는 일을 빠트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잘못된 문학이론적 표현 하나를 놓고 이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수 많은 이론가들이 헛된 수고를 되풀이 하는 데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야 된단 말입니까? 그 시간 동안에 수필문학의 순수 창작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고민해 보고 그 창작이론을 개진해 보았더라면 우리 수필문학의 위치가 오늘날 같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에 그 표현을 올바르게 바꿉시다. 그리하여 '아' 할 때 '아' 하고 '어' 할 때 '어' 합시다. 그렇게 해야만 더 이상의 혼미를 거듭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지만 비로소 수필창작이론도 그 동안 '시도 조차' 해 보지 못했던 기형적인 질병에서 해방되어 새롭게 성장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천만다행하게도 시중에 나와 있는 수필 이론서들 가운데에는 이 같은 수필문학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창작이론의 싹'이 움트고 있는 모양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 필자의 눈이 번쩍 뜨이게 한 참으로 반가웠던 명제 하나를 소개 한다면 姜凡牛 교수의 "시가 말을 놓을 자리에 놓는 글이며, 소설이 인물을 놓을 자리에 놓는 글이라면, 수필은 마음을 놓을 자리에 놓는 글이다.(강범우 <수필 인간학> 미래문화사)"라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이 명제에서 이미 수필문학의 창작 이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머지 않은 날 수필도 음악은 노래를 창작하고, 회화는 그림을 창작하며, 시는 시어를 창작하고, 소설은 인물(사건)을 창작한다고 분명하게 그 예술 창작의 대상을 말 할 수 있듯이 수필도 무엇을 창작한다고 그 <문학적 창작 대상>을 말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필이 '隨筆'이라는 그 이름자의 '뜻'에서 해방되는 자기 개혁의 고뇌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은 수필이라는 글자의 뜻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것이 곧장 수필문학의 이론이 되어야 할 절대적인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이론 아닌 이론을 문학이론서에서 지워 버립시다. 먼저 필자부터 그 일을 실행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을 수필문학의 이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隨筆'이라는 말과 '에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는 홍매라는 사람과 몽테뉴도 결단코 수필이란 '아무 계획 없이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글'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니, 곧 그들이 남긴 글은 결코 그런 '게으른 자'들이나 쓰는 글이 아니고, '글을 많이 읽지 못한' 무식한 자들이나 쓰는 글이 아니며, '생각나는 대로' 아무 계획 없이 '그때 그때 형편에 따라', '앞 뒤 차례도 없이' 그저 '시험 삼아 써 본' 글이 아닐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 입니다. 몽테뉴의 '수상록'이 어디를 보아 그런 게으른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생각나는 대로 끅적거린 글이란 말입니까? 홍매라는 사람의 글도 문학 이론서마다 그의 글을 예로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 없이 그런 무식하고 무책임한 글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의 글이 그런 무식하고 게으른 글이라면 어떻게 문학 이론서들마다 그런 무식한 글이나 쓰는 사람이 붙인 이름 자 뜻을 그대로 문학이론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 같은 일이야 말로 참으로 무식하고 무책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의 문장력이란 그가 어떤 글을 쓰기 시작 할 당시에 갑자기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을 통한 문장수련을 통해서만 길러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장난하듯 끄적인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자신의 문장력을 크게 벗어 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홍매라는 사람과 몽테뉴가 '隨筆'과 '에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 할 당시 그 말의 뜻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의도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들의 문학은 결단코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낳고 있는 오해대로 <아무렇게나 쓴> 문학이 결코 아니었다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문학이 그 이름자의 뜻 같은 그런 문학이 아닌 빼어난 문학이었다면 '隨筆'이라는 이름자의 뜻이 수필문학의 이론이 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문학 이론을 그 이름자의 뜻에서 찾는 것이 더 온당한 학문적 태도입니까 아니면 그 결과물 곧 '작품'에서 찾는 것이 더 온당한 학문적 태도입니까?

  우리 나라의 수필 문학의 오류는 그 이름자의 뜻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자의 뜻을 그대로 문학이론처럼 소개한 그 누군가의 무책임한 판단에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수필문학의 '무형식'은 끊임 없이 '隨筆', 즉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고정된 족쇄적 형식>과 <방법이 아닌 방법>을 깨트려 버리는 자기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수필은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잘못된 <뜻 풀이>야 말로 가장 완고하고도 든든한 형식이며 구속 곧 이 땅의 수필문학의 족쇄였던 것입니다.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이론이 아닌 이론을 벗어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거듭하는 용기 있는 '새로운 실험 정신'의 창작 작업을 통해서가 아니면 진정한 수필문학의 자유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날마다의 '새로운 실험 정신'이야 말로 다른 모든 문학 장르들도 동일하게 가고 있는 문학이라는 이름의 예술활동의 유일한 발전의 길일 것입니다.

  수필은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닙니다. 수필은 <자유로운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쓰는 글>입니다. 이것이 '아' 할 때 '아' 하고 '어' 할 때 '어' 하는 바른 말입니다. 이 땅의 수필문학이 <'隨筆'이라는 이름자의 뜻에서 해방 되는> 그날이 <우물 속에 빠진 달>을 건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비로소 이 땅의 수필문학이 '있는 것의 토의'에 그치는 비창작 문학에서 <창작문학>으로 거듭나는 원년이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는 이 땅의 수필은 아무리 저희들 끼리 좋게 변명하고 칭찬해 주어도 전체 한국 문단이 외면 할 수 밖에 없는 비창작 산문문학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수필이 마침내 '隨筆'이라는 그 이름자의 뜻에서 해방 될 날이 지금 막 눈 앞에 다가 오고 있다고 믿습니다. 강범우 교수의 <수필은 마음을 놓을 자리에 놓는 글이다>라는 명제가 그렇고, 윤재근 교수의 "문학으로서의 수필은 시적 수필이다" 라는 명제라든지, "에세이를 심상(imagery 心象)의 산문이라 하고 소설을 이야기의 산문이라 한다(윤재근 <말 하는 에세이> 문학수첩)"라는 등의 창작이론적인 명제들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 밖에 조연현 교수의 다음과 같은 명제도 수필문학의 창작이론의 길을 비쳐주는 서광과 같은 명제일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서정시적인 정서나 감흥을 가지면서도 서정시가 아니고, 소설적 구성을 가지되 소설이 아니고, 희곡적, 비평적 요소를 가지면서도 희곡도 비평도 아닌 데에 수필의 독자적인 양식이 있다"(조연현 <문학개론> 정음사) 

  강범우 교수와 윤재근 교수의 명제에서는 수필은 무엇을 창작하느냐에 관한 <무엇>의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조연현 교수의 명제에서는 <어떻게> 창작하느냐는 방법적인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길목이 열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필자 자신도 졸고 <수필과 형상화>라는 글을 통해서 '수필은 수필문학적 감성을 창작한다'는 말로 수필 창작이론을 유치하게나마 개진 해 본 일이 있습니다만 그 동안 필자가 공부 해 온 수필문학의 창작이론에 관한 말들을 필자의 말로 바꿔서 정리 해 본다면 "시가 그 문학적 대상의 본질에 관한 시(poetry)적 감동의 운문적 형상화 작업이라면, 창작문예수필은 그 문학적 대상의 본질에 관한 시적 감동의 산문적 형상화 작업이다"라는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창작문예수필이 서정수필을 중심기둥으로 발전해 온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H.Read라는 사람이 '시에 있어서 서정시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산문에서는 수필이 차지하고 있다"(정한모 김용직 공저 <문학개설> 박영사) 고 한 말은 창작문예수필의 본질을 바로 꿰뚫어 본 견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정시가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순수 창작문학이라면 서정수필이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순수창작 문학이 못 될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에게 창작문학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는 이양하, 피천득, 윤오영, 유병근 등 일일이 그 이름을 다 거론 할 수 없을 정도의 걸출한 창작문예수필 선배 작가들이 있고, 한 세대 아래로는 정목일과 윤희경 등 이 또한 그 이름을 다 들 수 없는 수 많은 빼어난 창작문예수필 작가들이 있으며, 그들의 빛나는 문예작품들이 있습니다. 없는 것은 저들을 바로 평가 해 줄 <창작문예수필 이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학예술의 어느 한 장르의 창작이론은 한 개인의 문학이론만으로 성립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 할 것도 없이 각인의 작가는 각자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창작이론을 가지고 있게 마련 입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한 분야의 예술 활동은 그 분야의 예술계 전반이 공감하는 표준어 격의 이론이 정립되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수필문학 근 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 현대수필문학이 21세기를 <창작문예수필 시대>로 열어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대한민국의 현대 창작문예수필 1백년의 창작이론은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다음 차례는 '시는 시어를 창작하고 소설은 인물(사건)을 창작한다'는 식으로 '수필은 무엇(존재론적 창작 대상)을 창작한다'고 전체 문단적인 합의를 얻으며 당당히 선언 할 수 있는 창작이론이 나올 차례 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절대 전제조건은 수필문학이 '무형식의 붓 가는 대로'라는 <잘못된 문학이론적 표현>에서 해방 되는 일이며,  '隨筆'이라는 글자 뜻의 말뚝에서 놓여나는 일이 아닐까 생각되어 본 졸고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2007년 새 봄의 아침에 수필이 '隨筆'로부터 해방되는 날을 꿈 꾸며. @


李寬熙

서라벌 예대 수학
美 패시픽 크리스찬 칼리지 졸업
美洲 '한국일보'문예로 시 등단
美洲 '한국일보'문예로 소설 등단
'현대문학'으로 수필 등단
시집: '사랑하고 죽으리라'
소설집 : '아내의 천국'
수필집 : '꽃과 여인을 노래 할 수 없는 시대'
현재 : 'e-수필' 컴퓨터 편집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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