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녹색의 합창 / 이순금

희라킴 2016. 3. 20. 13:47

 

 

 

녹색의 합창

 

 

                                                                                                                                             이순금

 

 

  지난 봄에 삶아 얼려 놓은 쑥을 녹여서 물을 조금 붓고 믹서에 곱게 갈았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쑥개떡을 만들어 볼 참이다. 쌀은 불려 방앗간에서 빻아왔다.

 

 큰 양푼에 갈은 쑥을 붓고 그 위에 얼개미로 쌀가루를 술술 쳐서 내려놓았다. 덩어리가 뭉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필요한 것들을 양푼 옆에 바짝 모아놓고 편한 자세로 앉아 수북이 쌓인 흰 가루를 무심코 손으로 툭 건드려 본다. 그러자 온 천지가 눈에 덮였다. 일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하얀 세상이다.

 

 높은 곳은 산이 되고 낮은 곳은 들이 되었다. 생명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태초의 신비가 서려 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하얀 빙하기가 존재한다. 한 번 더 손을 대고 휙 저어본다. 좀 전보다 더 많은 산이 생겨났다.

 

 물주전자를 들고 산꼭대기에다 줄줄 부어본다. 물은 골짜기를 타고 흘러 내려 시내가 되고 강이 되고 낮은 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려 한다. 아직 추운 빙하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물이 지나간 자리는 금방 얼어붙는 듯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바라보는 체감 온도는 영하 50도쯤 되어 보인다. 나는 제일 높은 설산 속으로 오른손을 푹 넣었다. 손이 금방 얼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스친다. 허나 손끝에 잡히는 동토의 속살은 말캉하고 부드러웠다. 한 움큼을 쥐고 잡아당겨서 바라본다. 녹색이다. 그 속에 생명이 숨어있다.

 

 하얀 설원에 생명의 색을 골고루 뿌려본다. 풀과 나무들은 살기 좋은 평지를 골라 자리를 잡아주기도 하고 백두산 꼭대기에 낙락장송을 심어 보기도 한다. 아름다운 알프스의 푸름도 만들어 보고, 남극의 하얀 빙산들은 그냥 두어보기도 한다. 제일 높은 설산의 봉우리를 주먹으로 꾹 눌러서 호수를 만들고 녹색의 물을 채워본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설산의 짙푸른 호수를 나 홀로 바라보고 있다. 눈이 부시고 코끝이 시려 온다. 서서히 얼어붙었던 지구가 푸른 봄을 맞고 있다. 아직은 곳곳에 만년설이 남아 있지만 오래잖아 푸르러질 것이다.

 

 나는 다시 열손가락으로 중앙의 대륙을 뒤집어본다.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힘을 가한다. 지금 나는 지구를 주무르고 있다. 설산도, 푸른 평원도, 오대양 육대주가 내 손아귀에 들었다. 빙하의 얼음을 녹여내어 녹색의 덩어리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전체가 고루고루 섞이는 행복한 녹색의 세상을 꿈꾸며. 빈부와 인종의 대립과 재난의 각기 다른 색깔들을 한데 버무려서 오직 녹색으로 만들려 한다. 딱딱하게 뭉치지 않고 얼룩얼룩 소외된 곳 없이 정성을 다해 주무르고 있다. 지구에 물이 모자라도 흠이요, 넘쳐도 흠인 것처럼 물 관리를 적당히 해가면서…. 마침내 둥근 모습의 큰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동글납작하게 만든 쑥개떡을 찜솥에 넣고 김을 올린다. 투명한 뚜껑을 통해 익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서먹서먹하게 모여서 녹색이라는 합일을 어렵게 이룬 재료들이 열을 가하자 점점 끈기있게 뭉치고 있다. 감내堪耐의 시간이 흘러간다. 함께 힘을 모아야 새롭게 변할 수 있음을 터득하고 있는 듯하다.

 

 뜸을 푹 들이고 나서 뚜껑을 연다. 뜨거운 안개가 걷히자 진녹색의 하모니가 터져 나온다. 내가 걱정했던 것들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거기엔 어떤 차별이나 이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가 되어 녹색의 찬가를 부를 뿐이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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