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내가 살아보니까 / 장영희

희라킴 2016. 3. 20. 13:48

 


 

내가 살아보니까. . . .

                                                                                                        

                                                                                                                영희

 

 오늘 아침에 일어나 아무런 생각 없이 집을 나서 아무런 생각 없이 학교에 도착해 무심히 차에서 내리다가 문득 가을을 만났다.

 언제 어디서 떨어졌는지 퇴색한 플라타나스 잎 하나가 덩그마니 내 차 지붕 위에 얹혀져 있었다. 어느새 비껴 내리는
햇살은 한껏 부드럽고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 냄새가 풋풋하고, 흰 구름 몽실몽실 피어있는 하늘이 예사롭지 않게 푸르렀다. 새삼 정신차려 유심히 둘러보니 이제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다 조금씩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이 완연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마음이 이제는 차돌같이 굳어 아무런 틈새가 없는 줄 알았는데, 웬걸, 문득 휑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 가을이구나....

 나무와 풀들은 이 세상에서의 한 번 삶과 사랑이 치열했던 만큼 미련도 남고 아쉬움도 많으련만 이제 생명과의 이별을
저마다 다소곳한 순명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비에도, 너무 적은 햇볕 속에서도, 너무 강한 바람 속에 쓰러져도 아직은 가야할 시간이 아니라고 다시 추스르고 일어나 열매를 맺고, 마침내 스스로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서의 한 번의 삶과 사랑을 살아가며 나도 내 인생의 가을의 문턱에 서 있다. 아무리 먼 훗날 떠나
가도 여전히 하고 싶은 말 넘치고 아쉬움에 가슴 미어지겠지만 그래도 있는 날까지 있다가 내 시간이 오면 나무처럼 풀처럼 미련 버리고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어제 TV에서는 우리나라에서의 빈부차이를 보여주는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월곡동 빈민촌에서는 병들어 직업도
못 얻고 혼자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지만 단돈 100만원이 없어 집에서 쫓겨 나야 하는 사람을 취재했다. 그런가 하면 골프연습장까지 갖추고 있다는 강남의 어느 주상복합 아파트에는 아파트 한 채에 20억을 홋가해도 매물이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부자들의 명품을 선호하는 습성을 취재하면서 명품 핸드백에 거의 중독 증세를 보이는 어느 젊은 여자와 인터뷰를 했다.


 방에는 온갖 명품 핸드백이 색깔별, 모양별로 가득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에서 명품에 관한 잡지를 구독해 가면서
새로 나온 디자인을 구입한다고 했다. 50만원부터 500만원까지 하는 핸드백이 있다고 했다. 왜 굳이 명품을 들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그 여자는 대답했다.
"들고 다니면 사람들의 눈길을 느껴요. 저를 쳐다보는...."

 그 여자의 말에 나는 적이 놀랬다. 단지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느끼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를 하다니. 목발 짚고 다니니 누구나 다 나를 쳐다보는지라 나는 남의 시선이 싫은데, 그 여자는 그 시선 때문에 그 많은 노력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부러워서이고 나를 쳐다보는 것은 불쌍해서라고 하겠지만, 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 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단지 호기심이나 구경차원을 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우산 하나가 살이 빠져 너덜거렸는데 그 우산이 다른 우산에 비해 컸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업고
학교에 갈 때는 꼭 그걸 쓰셨다. 업혀 다니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게다가 너덜거리는 우산까지, 나는 그게 소름끼치도록 싫어서 비 오는 날은 학교 가는 것조차도 싫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 때 내가 찢어진 우산을 받고 다녔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는 아마 지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찢어진 우산이든 멀쩡한 우산이든 쓰고 다니면서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그 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살아 보니까 정말이지 명품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그 내용물이 중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명품백에도 시시한 잡동사니가 들었을 수 있고 비닐 봉지에도 금덩어리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런 말을 해 봤자 기껏해야 별꼴 다 본다고 욕이나 먹겠지만, 내가 살아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살아보니 남들의 가치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낭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을 희생하고, 내 인생을 조각 조각내어 조금씩 도랑에 집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주위 어른들이 겉모습, 즉 어떻게 생기고 어떤 옷을 입고가 중요하지 않고 단지 마음이 중요할 뿐이라고
말할 때 나도 코웃음쳤었다. 자기들이 돈 없고 못생기고 능력 없으니 합리화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살아보니까 그게 진실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으로 남을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다.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한 것
은 몽땅 다 망했지만, 내가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겨져 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1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 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지구에 중력이 존재하는 한 몸은 쭈글쭈글 늙어가고 살은 늘어지게 마련이다. 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구상의 80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입 아프게 말해도 이 모든 것은 절대로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짜 몸으로 살아내야
배울 수 있다. 그래서 먼 훗날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진 후 어느 가을 날 우리 제자나 <샘터> 독자 중 한 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 줄기 느끼며 '내가 살아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 하고 말하면, 내가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있을 것이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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