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맏이 / 정성화

희라킴 2016. 3. 20. 13:46



맏이

                                                                                                                               

                                                                                                                                      정성화

 

 한 해 신수를 보러 갔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 운세까지 듣게 되는 철학관이었다. 당신은 올해 몸이 부서지지 않으면 큰돈을 잃을 운세이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역술인 말에 여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 일이 아니라는 듯 모두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그 사람에게는, 자식이 곧 취직할 것이며 올 한 해는 집에 돈이 자루째 들어올 운세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아이구, 좋것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올해 운이 좋다면 "그냥 열심히 " 살기로 하고, 운이 나쁘면 "진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유난히 시선을 끄는 한 여인이 있었다. 서른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자기 가족 신수 대신에 친정 동생들 운세를 묻고 있었다. 큰 동생은 올해 돈벌이는커녕 수중에서 돈 나가는 일밖에 없다고 하자, 그녀는 금세 얼굴색이 변했다. 둘째 동생 운세를 뽑아 보며 역술인이 두어 번 고개를 가로 젓자 그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3인 막내 동생 대학입시 운까지 챙겨 물었다.

 

 몇 벌씩 겹쳐 입은 옷이라든지 얼어서 벌겋게 된 양쪽 볼, 그리고 파카잠바 등 언저리에 붙어 있는 생선 비늘과 지느러미 조각이 그녀 삶을 짐작케 했다. 그녀는 세 동생에게 나눠 줄 액막이 부적을 써 달라고 간청을 하면서, 윗옷 안쪽을 한참 헤집었다. 그러더니 뭔가 한 주먹 꺼내 놓았다. 트고 갈라진 그녀 손등 아래서 쏟아져 나온 것은 만 원짜리 지폐로 접은 작은 딱지였다.

 

 네 귀가 맞물려 돌아가는 정사각형 모양 딱지, 그것은 서로를 감싸 안은 그들 사 남매 모습을 연상시켰다. 딱지 모서리가 삐뚤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접혀 있는 걸로 보아, 그녀는 그것을 하나 하나 접으면서 동생들에 대한 자신 사랑을 다지고 또 다졌을 듯 싶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그 딱지를 접었을까.

 

 향가 "제망매가"에서는 형제간을 한 가지에 난 나뭇잎으로 비유하고 있다. 같은 뿌리에 같은 줄기, 그리고 가지까지 같으니 얼마나 깊은 인연인가. 저희들끼리는 아침저녁으로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형제 중 어느 누가 이웃집 아이에게 한 대라도 맞고 오는 날이면 눈에 불꽃이 튄다. 당장에 달려가 사정없이 그 집 대문을 걷어차며 내 동생 때린 놈 나오라고 악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형제간 정(情)인 것이다.

 

 그녀를 보며 나는 이십여 년 전 일을 떠올렸다. 시골 어느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마음속에는 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반, 걱정이 반이었다. 엄지손가락이 베이면 혹시 어머니가 편찮으신가 싶기도 했고, 배구를 하다가 새끼손가락을 삐는 날에는 막내 동생이 걱정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자리에 이내 가난이 제자리인 듯 들어서고 있었던 때라, 다른 집만큼이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아 웃을 수 있고 따뜻한 방에서 잠들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싶었다.

 

 그러나 삶은 그리 녹록한 게 아니었다. 고개 하나를 겨우 넘었다 싶으면 또다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우리 가족을 넘겨다보고 있는 듯했다.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면서. 오기가 생겼다. "그래 덤벼 봐라, 나는 이제 더 이상 잃을게 없으니까"하며 고개를 더 빳빳이 세웠다. 연년생인 언니가 있었지만, 동생이 넷이나 되는 나는 호랑이도 쫓아 버릴 수 있는 그런 맏이 노릇을 해야만 했다.

 

 기쁨보다는 슬픔 앞에서 더 큰 자력(磁力)을 지니는 게 가족이다. 여동생이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겠노라고 스스로 말해 놓고도 이불을 들썩이며 울었을 때, 군에서 휴가 나온 남동생이 맨손으로 귀대할 수밖에 없어 고참에게 맞는 걸로 대신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때, 나는 내 동생들을 더 세차게 끌어안았다.

 

 아직 덜 아물어 회상할 때마다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는 상처이지만, 그 상처 때문에 우리는 서로 더 아끼게 되었던 것 같다. 허물어지려는 순간에 다시 하나가 되는 게 가족이다. 해서 가족이란 말에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희망"이 될 것이다.

 

 잎새 하나 없이도 마른 가지 끝에 움을 틔우며 편안한 얼굴로 피어나는 목련을 보면 맏이 인내심이 느껴진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고 있지만, 어쩌면 그 목련 또한 가지 끝마다 제 속울음을 여며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든 동생들 신발을 가지런히 챙겨 놓으며 이 신발들이 다시는 젖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던 날 밤, 나는 소리 죽여 울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생들 앞에서는 불안해하지 말 것, 눈물을 보이지 말 것, 돈 걱정을 하지 말 것을 원칙으로 정해 두고 있었지만 나 역시 돌아서서는 얼마나 자주 막막해 했었는지 모른다.

 

 명절이나 아버지 제삿날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우리 친정 식구들은 그 시절 얘기를 나누며 웃기도 하고 눈물을 찍어내기도 한다. 추억거리를 많게 해주려고 신(神)은 우리 가족에게 그런 굽이진 길을 걸어오게 하셨을까. 이젠 제 삶의 터전에서 성실한 손발과 정직한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생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든 아니든 맏이에게는 정년퇴직도 명예퇴직도 없다. 부모에게는 한결같이 효를 다하고 동생에게는 반(半)부모가 되어 우애와 자애를 보이며 묵묵히 맏이 길을 갈 뿐이다. 또 맏이는 스펀지와 같기도 하다. 궂은일이나 좋은 일이나 다 받아들여 머금고 있는. 그러나 내놓을 때는 아낌없이 내놓는 이가 또 맏이다.

 

 동생들과 힘없는 부모님을 위해 양팔 다 떼내어 주고 두 다리마저 내어 주고, 마침내 몸통 하나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맏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동생들을 위해 돈으로 딱지를 접어 모았던 여인, 그녀는 진정 아름다운 맏이였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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