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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를 찾아온 아버지 / 정호승

희라킴 2016. 3. 16. 07:20

 

시를 찾아온 아버지

 

                                                                                                                    정호승

 

 

 인생은 슬프다. 인생이 슬프기 때문에 시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슬프지 않은 인생은 없다.

슬픈 인생 중에서도 노인들의 인생은 더 슬프다. 떠나야 할 때에 떠난 노인들보다 떠나야 할 때에

떠나지 못한 노인들의 인생은 더욱 슬프다.

 

 노인들의 슬픔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다. '사람은 늙으면 적당한 때에 떠나야 한다'는 말은 관념의

소산이 아니라 구체의 소산이다. 태어나는 일에는 순서가 있지만 죽는 일에는 순서가 없어 노인들

고통은 구체적이다. 그 고통의 구체성은 마음보다 육체가 먼저 허물어지는 일에서부터 비롯된다.

노인들의 육체는 마치 밑돌 없는 돌탑 같다. 탑머리에 산까치 한 마리 내려앉아 날갯짓을 하거나

다람쥐라도 한 번 드나들면 그대로 허물어질 듯하다.

 

 내 아버지도 그렇다. 올해 여든 여덟이신 아버지도 육체가 먼저 허물어졌다. 한쪽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시력을 잃었으며, 청력 또한 일상의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툭하면 보행 중에

넘어져 코뼈가 휘어지거나 몸 군데군데 멍 자국이 가실날이 없다. 지난 해 가을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혼자 힘으로 걷지도 못하다가 이제 조금 회복돼 부축을 하면 지팡이를 짚고 조금씩 걷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서러운 것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바로

아버지가 그렇다.

 

 아버지를 부축해서 처음으로 공중목욕탕에 모시고 갔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내가 팬티를 벗겨드릴

차례가 되자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계셨다. 다 큰 아들 앞에 발가벗고 알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한순간 난감하신 듯했다(나야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목욕탕을 다녔으니

난감할 리 있겠는가).

"아버지, 뭘 부끄러워하시고 그러세요."

 

 나는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아버지한테 한마디 하고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서슴없이 아버지의 팬티를

벗겼다. 그러자 아버지의 손이 천천히(아마 아버지는 빨리 손을 움직이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고추를

가렸다. 나는 말없이 아버지의 손을 툭 쳐서 아버지의 고추가 드라나도록 했다. 그러자 아버지와 내가

한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온탕에 아버지를 잠시 앉아 있게 한 뒤 때밀이용 침상 위에 아버지를 눕혔다. 뜻밖에 아버지는

너무나 가벼웠다. 마치 뼈라는 가는 막대기에 옷이라는 피부를 붙여놓은 것 같았다. 침상 위에 누

있는 아버지의 앙상한 모습이 아직 살아 있다는 점이 다를 뿐 문득 이집트 미라박물관에서 본 미라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아버지는 평생 다리를 꼬고 앉는 나쁜 습관 때문에 척추측만증에 걸려 척추가

휘어졌는데, 침상 위에 모로 누워 있는 '휘어진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 하나의 구부러진 못이었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녔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그날 공중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다시 만난 아버지를 보고 쓴 시 <못>의 전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삶을 내 시의 원천으로 삼은 일이 거의 없다. 어머니의 영원한 모성을 바탕으로 한 시는 내가 생각해도

유난히 많다 싶을 정도이지만, 아버지를 내 시의 한가운데에 모셔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내 시 속으로 당신 스스로 걸어들어 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늙은 아버지를

외면하지 않았다. 시에겐 어떠한 책무가 있는가. 그런 아버지를 따뜻하게 껴안아 드려야 하는 책무가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므로 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시가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는다. 다만 내 시 속으로 걸어들어오는 우리 삶의 슬픈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비극의 풍경들을 소중히 여길 뿐이다. 아무튼 그날 이후 아버지는 시를 쓰는

아들에게 알몸을 맡기는 게 미안했는지 자꾸 내 시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너거 아버지는 요새 똥 못 눠서 고민이다

어머니는 관장약을 사러 또 약국에 다녀오신다

내가 저녁을 먹다 말고

두루마리 휴지처럼 가벼운 아버지를 안방으로 모시고 가자

어머니는 아버지의 늙은 팬티를 벗기신다

옆으로 누워야지 바로 누우면 되능교

잔소리를 몇 번 늘어놓으시다가

아버지 항문 깊숙이 관장약을 밀어넣으신다

너거 아버지는 요새 똥 안 나온다고 밥도 안 먹는다

늙으면 밥이 똥이 되지 않고 돌이 될 때가 있다

노인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사촌여동생은

돌이 된 노인들의 똥을 후벼 파낼 때가 있다고 한다

사람이 늙은 뒤에 또다시 늙는다는 것은

밥을 못 먹는 일이 아니라 똥을 못 누는 일이다

아버지는 기어이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다녀오신다

이제 똥 나왔능교 시원한교

아버지는 못내 말이 없으시다

아머니는 굽은 등을 더 굽혀 설거지를 하시다가

너거 아버지 지금 똥 눴단다

못내 기쁘신 표정이다

 

'똥 못 누는' 나의 어버지 때문에 쓴 시 <노부부> 전문이다. 매일 변비 때문에 심각해지는 아버지

보고,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 쓰게 된 시로,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 가슴에 와닿았다.

사실 나는 아버지의 집으로 출퇴근한 지 벌써 5년이 넘는다. 내 작업실을 아예 아버지의 집으로 옮긴

탓이다. 내가 아침에 아버지 집으로 출근했다가 밤늦게 아내가 있는 집으로 퇴근을 하는 것은 노부모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바로 비수가 아닌가. 죽음을 뜻하는 '죽을 사(死)'자는 '어느 날 저녁에 느닷 없이

날아오는 비수'다. 그 죽음의 비수가 아버지에게 날아오면 더이상 아버지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더이상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아버지를 많이 보기

위하여 아침에 어버지의 집으로 간다. 아버지의 집에서 하루 종일 노인들의 삶의 비밀을 엿보면서

나 또한 노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아버지에겐 이제 고향도 없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오직 하루하루 순간순간 죽음만 있을 뿐이다.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퇴근하기 위해 아버지의 방문을 열면 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두 손 모아 기도하고

계신다. 아버지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름대로 짐작해볼 수는 있다.

 

오늘 하루도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것, 그리고 곧 찾아올 죽음을 너무 기다리지 않게 해달라는

것, 또 너무 두려워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이 시 <나팔꽃>은 내가 쓴 시가 아니다. 미수(米壽)의 아버지가 내 시 속으로 걸어들어 와 쓴 시다.

아버지는 밤마다 기도할 때 죽어 나팔꽃으로 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지도 모른다. 누가 나무에게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나무가 꽃을 피웠다고 한다. 나도 아버지에게 인생을 보여 달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팔꽃으로 피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 <시평> 2007.가을호

 

 

PS: 나이듦으로 들어가는 나이...

나의 아버지는 내 나이를 넘어 막내인 나를 낳으셨지만 이 글을 읽으니

새삼 그의 품이 그립고,말 없이 신세지지 않으시려했던 꼿꼿한 그의 자존심이 생각난다.

97세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오늘 아침 만난 달맞이꽃으로 다가온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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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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