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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의 비밀스런 시 창작 노트 / 이영춘 시인

희라킴 2016. 3. 16. 07:11

나의 비밀스런 시 창작 노트

                                    / 이영춘 시인

 

 

나는 내 시를 어떻게 빚어내는가? 이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의 ‘시작법 비의’를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사실은 ‘비의’랄 것도 없다. 다만 내 글쓰기의 ‘과정’ 내지 혼자만의 독특한 ‘버릇’이랄까 그런 것을 중심으로 이 글을 쓴다.

 

 

1.시가 써 지지 않는 날들

 

숙면인지 무엇인지 모를 시간들이 내게는 숨어 있다. 때로는 거의 세 네 달까지 한 편도 못 쓸 때가 있다. 시 쓰는 방법조차 잊은 게 아닌가 할 정도다. 누군가 말했듯이 “시란 놈은 멀리하면 할수록 배신감을 느껴서 도망간다.”고 했다. 아마 내가 시에게 사랑을 주지 않아서 그렇겠다고 생각하면서 접근하기도 한다. 직장에 있을 때는 시간이 없어서 사랑을 듬뿍 줄래야 줄 수가 없었다. 시는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만큼 다가온다. 한 포기 꽃을 가꾸어도 관심가지는 만큼 자라듯이 말이다.

 

시가 안 써 질 때는 무조건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처 ‘체험’하지 못한 상황이나 분위기에서 아,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하면서 ‘소재’를 얻기도 한다. 아마 이런 것을 일러 간접체험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또한 마음이 많이 황량할 때는 ‘소설’을 읽는다. 또한 가을날 오후처럼 마음이 쓸쓸할 때는 ‘시’를 읽는다. ‘시’속에서 나와 같은 우울을 만나고 ‘소설’속에서 나와 같이 방황하는 주인공을 만난다. 좋은 작품이나 좋은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서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아무튼 ‘직접체험’에서 미처 건져 올리지 못한 이야기들을 책을 통한 ‘간접체험’에서 끌어 올릴 때가 있다는 이야기다.

한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가 있었다. 강원대 유인순 교수의 기행산문집「세상의 문을 열다」상권에 중국, 베트남 등지의 ‘수장’하는 풍습을 적은 대목이 있다. 그 글을 보면서 문득 내 어머니의 ‘돌무덤’이 생각났다. 그래서 쓰여진 시가 <풍장>이다.

 

정지문 밖으로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내 어미니 발자국,

돌무덤 속으로 발걸음 옮긴 지

칠백 삼십 번 돌고도 반나절,

풍장으로 저물어가는 육탈의 성찬식에

까마귀 무리지어 허공을 맴도는데

내 가슴에 묻은 풍장은 봉분으로 솟아 올라

비 오는 날도, 눈 오는 날도

꺼억-꺼억- 짐승 소리를 낸다

 

멀리서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

분명 헛것인데,

내 몸에서 자꾸 소리가 들린다

“큰 애야! 너, 이제 오니?”

 

풍장風葬.전문(2008년 심상 3월호)

 

 

2.문학은 인생 이야기이다

 

 

흔히 학문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정의를 내릴 때가 많다. 그러나 나는 강의를 할 때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다. ‘문학은 곧 인생 이야기’라고. 물론 이 명제는 보편적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만큼 정확한 답은 없는 듯싶다. 굳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인생 이야기’가 글의 소재가 된다고 하면 이해가 빨리 된다.

 

한 예로 어느 날 아침 전어를 굽게 됐다. 전어를 약한 불에 올려놓고 외출할 시간이 급한 김에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면서 응접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남자에게 소리를 친다.

“불에 올려 놓은 고기 안 타는가 좀 보라”고.

샤워를 마치고 욕실 문을 열자 온 집안이 고기 타는 냄새로 화장터를 이룬다.

순간 기분이 아주 많이 상한다. 그걸 못 먹게 된 게 문제가 아니라 내 부탁에도 아랑곳없이 또한 냄새가 그리 진동하는 데도 코끝도 발끝도 ‘무관심’한 것, 그 자체가 문제다. 그래서 기분이 상했다. 그 상한 기분이 종내는 시가 되었다.

어느 날, 차창 밖으로 뿌연 하늘을 쳐다보던 네 살짜리 손자 아이가 “엄마, 날씨가 아픈가 봐”라고 천둥번개 같은 말을 했다. 詩 같은 이 아이의 말을 어떻게 써 먹을까 늘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그 날 내 기분과 딱 매치가 되었다.

 

아침에 전어를 태웠다

기분이 새까맣다

천둥번개 한 번 친 적이 없이 몰려온

내 몸의 날씨,

 

어느 날 고개를 잔득 뒤로 져치고

하늘을 쳐다보던 네 살짜리 아이가

“하늘이 이상해!”

“날씨가 아픈가 봐!”

“진찰하면 돼!”

시 같은 아이의 말에

가슴 후려치던 한 순간,

 

오늘 아침 새까맣게 탄 전어 등처럼

아픈 날씨처럼

내 몸의 날씨가 후줄근하다

 

<날씨가 아픈가 봐>전문 (2007년 유심 여름호)

 

이렇게 나는 생활 속에서 글의 소재를 얻어 쓴다. 이런 인생 이야기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때로는 쓸 거리가 없다고 느낄 때도 많다. 그러나 「글쓰기, 글 잘 쓰기(번역:송정희)」의 저자 앤 라모트Ane Larmott 는 “쓸 거리가 없다고 하지 마라, 네 어리던 날부터 살아온 이 시간까지 뒤돌아보라. 쓸 거리가 무궁무진하다.”라는 말로 글쓰기의 자세를 일러주고 있다.

나의 시 <컵라면>역시, 컵라면을 먹으려고 뚜껑을 확, 여는 순간 거기 모여 있는 국수 올들이 그것을 만들었을 어느 공장의 여공들 얼굴로 떠올랐다. 결국 이 시는 내 인생 이야기도 되고 동생의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다.

 

꼬불고불한

머리들이 모여 있다

혹은 웃는 듯도 하고

혹은 우는 듯도 한

그 얼굴들은

마치 내 동생이

직공생활을 하면서

야간학교를 마치던

마산 어느 공단의 여공들 얼굴 같아서

감히 나는

컵라면을 먹을 때마다

목 줄기가 라면처럼 배배 꼬여 진다

마치 내 동생의

피와 살이

내 건강한 폐부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아서

컵라면 전문 (1991년 현대문학 1월호)

 

 

3. 글 쓸 때 나의 버릇

 

나는 글을 쓰고자 하면 ‘음악’부터 틀어 놓는다. 그렇다고 음악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음악을 듣는 게 좋다.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는다. 또한 정서가 잡힌다. 그래서 문하생들에게도 ‘음악을 들으라’고 권하기도 한다. 또한 음악을 잘 알거나 잘 하는 사람을 많이 좋아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근간의 일이다. ‘제6회 대관령국제음악제’에 관한 시와 산문을 쓰라는 청탁을 받았다. 고민을 많이 했다. 잘 모르니까---그러나 우선 내가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나 브람스부터 찾아 들으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일단 음악은 다른 어느 장르의 예술보다도 감정 전달이 가장 빠르다. 문학은 ‘문자’라는 매체를 통해서 그 느낌을 전달받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음악은 곧 바로 전달되는 감동의 효용성이 있다. 대관령국제음악제에 관한 시를 쓰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음악은‘화합’과 ‘통합’의 상징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가슴보다는 머리로 쓴 詩이지만, 이런 시를 그려냈다.

 

대관령 정상, 그 산 허리에 온음표 같은 달이 걸리고

아스라한 달빛 강을 건너온 이름표를 단 음악들이

내 붉은 심장 한복판을 흔든다

 

높고 낮은 선율의 푸른 물방울 구르는 소리,

이 심장에서 저 심장 한 쪽으로 건너가는 소리,

마음과 마음이 포개지는 소리,

우리는 드디어 하나가 된다.

 

圓,,, 그 하나로

이름표를 단 소리들이 나뭇잎사귀 같은

둥근 귀를 달고 달려온다

 

소리의 언어, 소리의 물방울들이

천상의 음계, 그 사다리를 밟고

우리들 가슴에 동그랗게 내려 와 앉는다

 

아, 지상도 하나, 세계도 하나, 마음도 하나,

하늘 높이 비둘기 떼 날아오르고

우리들은 음악의 잎사귀에 보름달 같은 귀를 대고

환하게 불 밝히는 별이 된다 별들이 된다

 

(하나, 그리고 원圓)전문

 

 

4.마무리 단계

 

시인 박제천 선생은 처음에 시 100편을 쓰고 나니 ‘시가 약간 보이더라’고 하였고 300편을 쓰고 나니 ‘시가 뭔지 조금 알겠더라’고 한 말을 읽은 적이 있다.(시, 어떻게 고칠 것인가? 2005년, 문학과창작사)

또한 어디선가 읽었는데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고 나서 300번을 퇴고한다고 쓰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300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아마 오자가 나왔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어떻든 이렇게 많이 퇴고를 해야만 좋은 시로 다듬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원고를 다 쓰고 나면 일단 출력하여 가방에 넣고 다닌다. 또, 한 部는 머리맡에 비치해 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베개 머리에 둔 시를 꺼내 읽는다. 걸리는 곳이 너무 많다. 퇴고를 한다. 다시 한 2-3일 묵혀 두었다가 다시 읽는다. 한 구절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면 아예 버린다. 괜찮은 구절이나 시가 되겠다 싶으면 건진다. 이런 식으로 반복한다. 그럼에도 활자화된 다음에 보면 또 거슬리는 곳이 눈에 띈다. 시집 묶기전까지 또 고쳐 놓는다.

 

참, 하나의 비법이 있다면 다 작성된 작품을 반드시 거꾸로 읽는다는 점이다. 누구도 이 방법은 잘 실행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만의 ‘비법’인가 싶었다. 그러나 이미 내가 이런 방법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분들은 다 안다.

거꾸로 읽으면 영락없이 거슬리는 구석이 발견된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제거해 낸다.

 

또 하나의 방법은, 행갈이를 해 보기도 하고 전부 다 붙여서 ‘산문시’ 형태로 만들어 보기도 한다. 그러면 반드시 불필요한 어미나 조사, 단어, 어절들이 보인다.

 

시인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고 경멸하는 것은 문장호응과 정서법을 제대로 안 지키고 쓰는 시인들이다. 누구나 어쩌다가 오자를 낼 때도 있겠지만, 긴가민가한 것은 반드시 사전이나 문법책을 토대로 해서 써야 한다. 때로는 아주 애매모호한 문법이 있을 때 나는 지금도 학교 현장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후배 선생님들에게 꼭 확인해 보고 쓴다. 물론 띄어쓰기도 마찬가지다. 컴에 나오는 빨간 줄만 믿는 것은 큰 오산이다.

원고가 너무 길어져서 야단이다. 그러나 ‘비밀? 혹은 비의’가 어찌 이 정도로 끝날 수 있겠는가? 양해를 바라면서 마친다.

 

 

- 출처: 2009년 스토리문학 10월호-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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