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낙엽이 가는 길 / 김순경

희라킴 2019. 9. 25. 18:15



낙엽이 가는 길 


                                                                                                                                김순경


 산골짝의 새벽은 늦게 찾아온다. 큰 산일수록 계곡이 깊어 하루해가 짧다. 긴 능선을 넘어온 햇볕이 자리 잡을만 하면 어느새 반대편 산마루에서 서성인다. 붉은 기운을 쏟아내는 저녁노을이 나뭇가지에 걸리면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어둠이 찾아든다. 발원지를 알 수 없는 맑은 물줄기가 계곡의 작은 마을을 지나 바깥세상으로 나간다.

 밖에서 보면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만 대의 차들이 쌩쌩 달리는 경부 고속도로가 이중으로 막고 있어 접근조차 어렵다. 작은 절벽과 암반으로 된 입구가 뭔가가 있음을 짐작케 하지만 동네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는다. 어찌나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예전에 유배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세상을 등지고 은인자중하면서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동네 같다.

어느 날, 마을 입구에 음식점이 생겼다. 노송을 배경으로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라는 식당 간판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오래된 감나무가 수호신처럼 지키던 마을 어귀의 작은 밭이 언제부턴가 식당의 주차장이 되었다. 가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긴 식당 이름을 시처럼 읊조렸다. 어떤사람이 주인이기에 저런 이름을 지었을까 싶었다. 며칠 전, 우연히 찾은 찻집에서 주차장 감나무와 눈이 마주쳤다.

밑둥치가 유난히 검은 감나무엔 이파리가 보이지 않는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던 무성한 감잎은 어디로 갔을까. 휑하니 비어버린 허공에는 붉은 감 몇 개가 늦가을 햇볕에 속살이 보일 정도로 빨갛게 몸을 태운다. 이파리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빨간 감이 억센 잎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서리치듯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감은 춤을 추듯 운율을 탄다.

 감나무는 차마 열매를 떨어뜨리지 못한다. 밤나무나 갈참나무는 적당한 시기가 되면 영근 열매부터 떨어뜨리지만 감은 그렇지 않다. 모두가 자식같은 열매를 멀리 보내고 추운 겨울을 준비하는 늦가을에도 감나무는 열매를 자식처럼 보듬고 있다. 언제까지나 달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않는다. 홍시가 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잎과 인연을 끊은 붉은 감은 파란 가을 하늘과 보색을 이룬다.

 감꽃은 벚꽃처럼 화사하지도 아까시꽃처럼 꿀이 많지도 않다. 그렇다고 천리향이나 만리향처럼 향기가 좋은 것도 아니다. 멋모르고 달려든 벌 나비가 하나둘 떠나면 왕관 같은 감꽃은 땅에 떨어진다. 긴 세월 넓은 이파리 밑에 숨어 딸부잣집 막내아들처럼 푸른 감은 좋은 것만 받아먹고 체중을 불려 나간다.

 넓은 감잎들이 떠나간다. 떨켜가 수분을 끊자 맥없이 떨어져 나간다. 한동안 기를 쓰며 버텼지만 주황색이 점점 짙어지자 하나둘 가지와 이별한다. 자신의 역할이 끝나면 어김없이 둥지를 떠나보내는 어미 새처럼 나무도 나뭇잎을 떨쳐낸다. 땅에 떨어진 갈색 감잎들이 굼벵이처럼 온몸을 움츠린다. 늦가을 찬바람에 멍석말이하듯 돌돌 말린 낙엽들이 바람 따라 우왕좌왕하다 구석 한쪽으로 모여든다.

 지난여름이 아쉬운지 나무 곁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모여든 가랑잎들이 출전 북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듯 몸을 추스른다. 돌격명령이 떨어지면 어디든 뛰어들 준비를 마친 병사들처럼 나무둥치 근처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나뭇가지는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한다. 지금 떠나면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여기까지가 인연이라는 것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쌩하니 불어온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검은 가랑잎 하나가 마당을 가로지르자 좀비처럼 모두가 따라나선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돌진하는 병사들처럼 정신없이 달려간다. 계곡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달려온 가랑잎은 낙화암에 몸을 던진 삼천 궁녀들처럼 허공에 몸을 날린다.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가는지. 지나온 무더운 여름이 그립고 아쉽지만 계절은 덧없이 흘러간다. 평생 젊음을 간직할 줄 알지만 어느새 서리가 내려앉은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찬바람이 앙상한 가지를 울리는 한겨울이되면 정처 없이 떠돌던 가랑잎은 어디에선가 잘게 바스러진다. 가을만 되면 무성한 잎들이 그렇게 사라지지만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다. 삭풍에 떨고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쳐다보며 모두가 아쉬워한다. 굴러가는 낙엽이 지난날을 불러낸다.

 사십 년 전, 이 동네에 온 적이 있다. 친구들이 여름 방학 동안 봉사활동을 하던 산골 마을이었다.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했지만 농사짓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봉사단 단장이었던 친구가 시골집으로 찾아왔다. 동민 위안의 밤이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분위기를 이끌 사람이 없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따라나섰다.

시외버스를 타고 양산을 거쳐 비포장도로의 한적한 곳에 내렸다. 고속도로 밑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감춰진 산골 동네가 나타났다. 어두워진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동네사람들이었지만 노래를 부르고 장구를 치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끝없이 이어지는 노래는 온갖 풀벌레소리를 불러왔다. 떠나는 날, 천성산 산자락의 아침은 늦게 찾아왔다. 날마다 같이 공부하고 놀았던 여자아이들은 눈물 흘렸고 막걸리를 마시며 동네일을 함께한 마을 청년들은 말끝을 흐렸다.

 낙엽이 가라앉는다. 방금 떨어진 가랑잎이 계곡에서 빙빙 돌더니 천천히 물속으로 빠져든다. 낙엽이 가는 길은 어디일까. 멀리서 지켜보던 감나무는 마지막 작별 인사처럼 가지를 흔든다. 빨간 홍시 하나가 주차장 바닥에 툭 떨어진다. 마치 물 풍선이 터진 것처럼 선홍빛 액체가 사방으로 튄다.

모두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애를 쓴다. 종이에다 글을 쓰고 돌에다 자신의 이름과 글씨를 새기기도 하지만 자식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완성하려는 일에 모든 것을 건다. 지체가 높거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욕심을 부린다. 나무나 사람이나 유전자 번식을 위한 노력은 같지 않을까.

 계곡물에 비친 늦가을 햇살에 눈이 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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