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보따리 최장순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보따리를 가져왔다. 보물이라도 챙기듯 꼭꼭 싸맨 것을 풀자 참았던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보따리는 어머니의 몸이자 동반자였다. 자식들 집으로 다니러 가실 때에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보따리 속에는 얇은 이불과 수의가 들어 있었다. 80세를 넘긴 어느 윤달 어머니가 손수 지으셨다고 했다. 몇 해 전 수해를 입었을 때에도 보따리는 무탈했다. 물이 차오르자 어머니는 맨 먼저 그것을 다락방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스무 살 새댁의 ‘*풀보기’ 때만 해도 어머닌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가마를 탄 어머니 뒤로 옷이며 음식을 바리바리 싼 보따리와 농을 짊어진 일꾼들이 줄을 이었다. 농 안에는 행주치마 몇 죽, 저고리 한 죽, 적삼 한 죽, 버선 몇 죽 등 평생 입을 옷이 들어 있었다. 일가친척들이 새색시 혼수품을 구경하러 오면 어머니는 친정에서 해온 골무나 버선을 시댁 친척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강릉 최가 집에 보따리를 풀었지만, 풍성한 혼수품만큼 살림살이는 풍성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보따리를 이어야 했다. 물건을 팔러 장으로 갈 때에도 머리에 인 광주리 위에 또 하나의 보따리가 덤으로 얹혔다.
아파트 베란다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초당마을과 바다를 바라보시던 어머니. 등을 굽혀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은 어머니는 작은 보따리처럼 보였다. 수많은 기억의 넝쿨이 거의 걷힌 백수의 어머니와 팔순을 바라보는 형님의 갈등은 부쩍 심해졌다. 모자지간이라기보다는 두 노인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 두 분의 실랑이를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치우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된 갈등, 어머니의 끊임없는 참견과 잔소리에 형님의 화가 부딪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고집을 감당하지 못한 형님은 끝내 어머니를 방에 밀어 넣고 말았다.
다툼은 매번 늙은 아들의 승리로 끝나는 듯 보였지만 그것은 명목상의 승리에 불과했다. 금세 어머니의 반격은 시작되었다. 치매기가 있는 어머니는 방금 전에 있었던 다툼을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늘 처음인 듯 형의 비위를 긁었다. 지치는 쪽은 형님이었다. 결국 형님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늙은 어머니의 투정쯤 그냥 받아넘길 수 없을까?’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하는 형님에게 못내 섭섭했던 나는 참다못해 한마디했다.
“그래, 너 말 잘했다. 당장 어머니 모시고 올라가!”
용수철처럼 튕겨 나오는 형님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형님이 매일 치르는 고충을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직접 어머니를 모시는 형님과 가끔씩 찾아뵙는 나와는 현실적 거리감이 큰 것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머니를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듯한 형님이 못마땅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부질없는 물음을 내 스스로에게 던졌다.
가족들 의논 끝에 당분간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현대판고려장’ 같을 요양원을 생각하면 내내 마음이 불편했지만, 늙은 형님에게도 휴식기가 필요하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한 세기를 사셨어도 아직 정신 줄을 완전히 놓지는 않고 계시는 어머니,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적응하실 동안 면회는 오지 마세요.”
다짐을 받듯 원장이 우리들에게 말했다. 가족이 가면 따라나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고통의 기간이 길어진다는 설명이었다. 마음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너 달이 지난 후 요양원을 찾았다. 몇 달 새 어머니는 많이 수척해지셨다. 웅크리고 앉아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계신 어머니는 건들기만 해도 바스라질것 같은 거푸집이었다. 남아 있던 기억의 끈마저 놓은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 아들의 이름을 되뇌었다는 어머니는 매일 손을 꼽으며 부르던 이름마저 이젠 지워버린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오래 살아 자식들 고생시키나, 얼른 죽어야 할 텐데…….”
요양원에 들어가신 뒤 늘 읊조리던 말씀이었다고 했다. 어느 날 원장이 어머니에게 말했단다.
“할머니 이 약을 드시면 금방 죽을 수 있어요. 드실래요?”
“사람이 제 명대로 살아야지 어떻게 약을 먹고 죽을 수 있나.”
좀 전과는 달리 정색하며 말하시더란다. 과연 어머니다운 말씀이었다. 그것은 더 오래 살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말이 아님을 나는 안다. 어머니는 주어진 환경에 철저히 순응하는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천명天命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면회실 창 너머 어머니 곁으로 차마 다가설 수 없었다. 누이들이 어머니를 안고 “엄마 미안해, 미안해.” 하며 우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랬다. 한참 후에 막내 동생이 어머니가 주무시니 들어오라고 했다.
검불처럼 가벼워진 어머니를 품에 안았다. 마치 갓난아기 같은 가쁜 숨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행복했다. 자나 깨나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던 내가 아니었던가. 삶의 끝물에 이른 어머니를 보듬어 안고 당신이 그랬듯 등을 쓰다듬고 토닥거렸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포옹, 창문으로 비치던 햇살이 다 비껴간 후에야 나는 어머니의 깊은 잠을 흔들어 깨웠다.
“어머이, 셋째가 왔어요, 셋째!”
“누구……? 장순이?”
어머닌 힘겹게 실눈을 뜨셨다.
“그 먼 데서 어떻게 왔나? 밥을 해야지…….”
기억의 문을 다 닫은 어머니가 잠시 닫힌 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한나절씩 걸리던 때를 떠올렸음인지 차로 세 시간이면 닿는 거리를 늘 먼 길이라고 하셨다. 막내아들에게 밥 한 끼 손수 지어주려 했던 맘도 잠시, 어머니는 금세 아무 일 없다는 듯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으셨다.
보따리 속에서 당신이 손수 지으신 수의를 꺼냈다. 하얀 보를 덮고 있는 어머니를 염습사가 어루만졌다. 보 밑으로 손을 넣은 염습사는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몸을 닦았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마지막 옷인 수의로 갈아입혔다. 나들이 치장을 마친 듯 어머니는 곱고 편안해 보였다. 이제 더 이상 종종걸음을 치지 않아도 되는 길, 노상 들고, 끼고, 이고 사셨던 삶의 보따리도 한줌 재로 어머니와 함께 하늘로 갔다.
* 풀보기 : 해현례(解見禮)에 대한 순수 우리말. 풀보기의 풀은 동사어간 ‘풀(解)’이고 보기는 ‘보(見)’의 명사형이다. 강릉지방에서는 혼례를 치르면 신부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름내 시집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장만했다. 본격적인 시집살이를 하기 위해 가을에 그것들을 챙겨 시집으로 다시 가는 것을 풀보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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