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제10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슬픔의 무게 / 김영미

희라킴 2019. 9. 9. 18:47


[제10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슬픔의 무게 


                                                                                                                                  김영미


"여보, 소가 울어요." 남편은 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운다고요?" 내가 재차 묻자 들려던 숟가락을 힘없이 내려놓는다.

삼십여 년 소를 키우며 별일을 다 겪어봤지만 기둥과 문을 잇는 경첩 사이에 발이 끼기는 처음이다. 발목이 끼인 소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다른 소들이 술렁이더니 날뛴다. 소는 순한 듯해도 흥분하면 방향을 잃은 대포와 다름없다. 육중한 덩치와 거친 뿔이 만나 내뿜는 힘에 공포가 보태어진다면 주인일지라도 감당이 안 된다.

 소보다 센 트랙터의 힘을 빌려 발을 빼냈다. 우사 바닥에 내려진 소는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이내 풀썩 쓰러지고 다시 뒷다리에 힘을 주고 버둥대다 내동댕이쳐졌다. 그러기를 네댓번하더니 체념하고 누웠다. 본능으로 일어서려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된 것이다.


 급히 온 수의사가 고개를 젓는다. 빤히 보이는 우려가 쐐기 박음으로 기정사실이 되었다. 생명을 키우다보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 열에 열 마리를 온전히 다 키워낸다면 좋으련만 이번처럼 중간에 도태되는 녀석이 있다. 생명은 다 존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어쩔 수 없는 생을 당겨 고통을 줄여야 한다.

 물병에 더운물을 담아 소에게 다가갔다. 겁을 먹은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히며 온 몸을 꿈틀댄다. 다리만 아니라 척추가 부러졌음이 분명하다. 저대로라면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길 수가 없다. 허연 거품이 밀라붙은 입에 목이나 축이고 가라는 심정으로 물을 부었다.

 가축으로 태어날 때부터 이미 길은 정해져 있었다. 가축의 존재 가치는 이익을 낼 때뿐이다. 제 몸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소는 생존 의미가 사라진다. 경제논리의 잣대가 각박하기는 축산이라고 다르지 않다. 저울에 오른 소의 무게에서 사료 값을 제하면 남는 이익이 나와 가족의 생계비다. 박박 긁어모아야 겨우 쥐어지는 이익인데 오늘은 손해가 커다란 바위만하다. 더하여 하고 싶지 않은 숙제까지 받아들었다.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한다. 아예 어린 엇부루기였다면 회복실에 안아다 놓고 깁스라도 해보는 방도를 취했을 것이다. 웬만큼 살이 올랐어도 도부의 손에 맡겨 인간에게 보시할 기회도 주었으리라.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소는 당장 눈앞에 생긴 손실일 뿐이다. 축산이라는 업을 선택하면서 각오한 일이나 막상 닥칠 때마다 죄인이 된다. 생을 단축시킬 용기는 없고 두고 보는 것은 더 고통스럽다.

 성한 소들이 맴을 돌더니 뿔을 내밀며 앞발굽으로 바닥을 긁는다. 가만 두라는 경고다. 봉변을 당할 것 같아 급히 우사를 빠져나왔다. 목숨을 걷어가려는 손을 막아보려는 모양이다. 동족을 지키고자하는 본능이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평소에는 앙숙처럼 우열을 겨루더니 정작 단합이다. 생사여탈권을 쥔 주인과 맞서기까지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바닥에 붙은 소에게 실날같은 기적을 바라본다. 짐승은 스스로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타고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기에는 부상 정도가 너무 심하다. 걱정이 되어 살피다가 또 꼴이 보기 싫어 "이제 그만 가라" 말을 던지고 돌아서기도 여러 번이다. 어서어서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목숨이 걷혀가기를 바랐다. 더디 흐르는 시계바늘은 머릿속으로 아예 자리를 옮아 왔다. 가쁜 숨이 초를 세다 그러다 멈춰주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길었다. 저승 냄새를 맡은 고양이나 떠돌이 개가 멀끔히 져다보다 돌아간다.

 금방 소를 실어나갈 차와 도부가 들어올 줄 알았다. 오후가 되어서도 남편은 모른 척 딴짓이다. 그동안에도 소는 배속에서부터 우러나는 고통을 뱉는다. 아마도 아프리카의 세링게이였다면 벌써 사자의 이빨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울음은 두려움으로 변해 축사 안에 스민다. 빙 둘러앉은 성한 소들은 먹지도 않은 여물을 게워 되새긴다.

 남편은 소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밖으로 돈다. 아이들도 늦게 들어와 나가 버린다. 나도 축사가 보이지 않는 들로 도망을 갔다. 잊으려 해도 이랑 사이나 돌 틈에 숨었다가 호미 끝에 달려 나온 신음은 악머구리 같이 따라붙는다. 도리질에도 그치기는커녕 또 다른 기억을 불러들인다.

병상에 누운 엄마를 지켜봐야 할 때가 있었다. 배배 뒤틀리는 육신과 달리 정신만은 그대로 두는 암의 잔인함. 진통제도 듣지 않던 시간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속에서 녹아지는 내장.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희망이라곤 없이 견딘 시간은 지상에 어떤 활자로도 온전히 표현되지 않는 슬픔이었다. 바라보기만도 무거웠던 시간이 되돌려졌다.

사람과 짐승의 목숨을 같은 저울에 잴 것이냐! 처음부터 무게가 다르다. 소와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무게가 같을 순 없다며 허공에 답을 구했다. 긍정도 부정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답을 다시 그러모아 쥐었다. 눈을 부릅뜨고 묻고 대거리를 하며 맞섰다. 애초 답은 없었다.

소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감내해야하는 가축으로의 운명이 어떠한지, 눈 앞에서 신음하는 동료가 곧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까지 안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태어나 길러지고 또한 죽음을 맞을 짐승들이 운다. 자연에서는 자연스러우나 사육에서는 가장 잔인하게 죽어가는 동족을 바라보는 눈길이 처연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만 가다오."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감은 눈으로 물이 흐른다. 더는 볼 수 없어 돌아서는데 묵직한 무엇이 가슴을 누른다. 관념의 무게일 뿐이라고 애써 덜어내도 온 몸이 휘청인다. 차라리 칼을 휘두르는 잔인한 용기를 갖고 싶다. 견디다 못한 내가 채근하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남편이 벌컥 역정을 낸다.

"낸들 도부를 부르고 싶지 않겠나. 기다려야지 우짜겠노." 내가 안달을 내는 사이 남편은 속울음을 울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이라는 책임은 항상 황소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잘 키워 내어도 밀린 사료비며 약값을 갚고 나면 그 자리 곰배치기 일쑤인 살림이다. 들썩이는 물가를 따라잡기는커녕 올려져있던 눈물과 균형을 이루는 책임이 새삼 보인다.

 남편이 밥을 가득 뜬 숟가락을 입에 우겨 넣는다. 이러다 사람까지 탈이 날까 걱정이다. 숟가락에 얹힌 밥이 무거운 것일까. 소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슬픔이 목을 막는 것일까. 남편이 그만 숟가락을 놓고 만다.

 지는 노을이 유난히 무겁다. 신음은 그쳤다. 그 대신 축사에서는 또 다른 속울음이 새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