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회귀선 / 김응숙

희라킴 2019. 6. 21. 17:34



회귀선 


                                                                                                                             김응숙


 만면에 홍조가 가득하다. 푸르디푸른 산능선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댄 채, 여름의 태양이 미소를 짓는다. 하늘의 치맛단에 서서히 붉은 물이 든다. 다대포의 푸른 품에 빠져버린 또 다른 태양이 사탕처럼 녹고 있다. 해면에서는 반짝이는 물비늘의 카드섹션이 시작된다. 물에 적신 하얀 손수건 같은 얇은 파도가 올라와 달구어진 갯벌을 다독인다. 넓은 갯벌에 덧칠이라도 한 듯이 붉은 윤기가 흐른다.

 몰운대에서 노을을 바라본다. 언뜻 부는 바람을 타고 꼬리에 붉은 깃을 단 햇살 하나가 내게로 날아와 꽂힌다. 내 가슴에도 태양이 녹아들 듯 붉은 물이 든다. 한 번 물든 가슴은 꼼짝없이 그리움의 포로가 된다.

 누구나 돌아갈 때가 되면 으레 지나온 것들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해질 녘,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는 모래사장에 덩그마니 놓인 모래집을 자꾸만 뒤돌아본다. 어두운 골목길,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는 곧 놓아야만 하는 연인의 손이 더욱 가슴에 사무친다. 잡은 손을 떨쳐도 한참이나 따라 나오시는 백발의 어머니, 흐릿한 눈으로 뒤돌아본 신작로에서 자꾸만 그 그림자는 흔들리고 있다. 돌아갈 때가 되면, 정작 이별을 하기도 전에 두고 가야 하는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대포의 노을은 두고 가야 하는 그리운 것들에게 써내려가는 태양의 편지이다. 살아온 날들이 뜨거운 만큼 그 사연은 길어진다. 차마 하지 못한 고백은 저기 동그란 구름 속에 붉은 글씨로 적혀 있고, 그래도 남아 있는 미련은 선홍빛 아쉬움이 되어 구름가를 적시고 있다. 좀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던 회한은 자주색 구름 뒤에 살짝 가려져 있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문장은 오렌지색 햇살로 써서 가장 잘 보인다. 편지는 편광을 받아 하늘 가득 펼쳐진다. 편지 한 장 남기지 않는 이별이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또 읽는다.

 한 줄이라도 놓칠세라, 어떤 이들은 편지를 사진기로 찍느라 여념이 없다. 바다의 숨결과 함께 출렁이던 이들도 괜히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본다. 다른 이들은 이름 모를 여인이 흘린 갈색 머플러 같은 다대포의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다. 그 뒤를 붉은 발자국을 꾹꾹 찍으며 노을이 소리 없이 따른다. 그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갯벌이 짙어진다.

 이 시간쯤이면 왠지 모를 허전함에 휩싸인다. 나도 어디론가 돌아가야만 할 것 같다. 어린 시절 땅거미가 질 때까지 정신없이 놀다가, 친구들이 모두 돌아간 공터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을 때처럼 말이다. 저만치 어머니께서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손짓을 하시면, 나는 괜히 설움에 복받치며 마구 달려가곤 했다.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창문 틈으로는 어린이 저녁 방송의 시그널 음악이 새어 나왔다. 그때 어머니 손을 잡고 뒤돌아본 하늘에는 지그시 눈을 감은 태양이 마지막 붉은빛을 녹여 달콤한 솜사탕을 만들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 것을 예감한 태양은 기꺼이 자신의 권위를 버린다. 강렬하기만 했던 태양빛이 어두운 색의 필터를 한 겹 끼운 것처럼 수그러진다. 점점 더 자신의 빛을 순화해가며, 부드럽고 유연한 면모를 드러낸다. 열기가 잦아들며 둥근 윤곽에 음영이 드리워진다.

 지금은 누구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 낮의 끝자락을 들추고 밤이 스미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가벼운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한다. 다대포의 여름 해변이 수굿해지는 태양을 끌어당기며 출렁인다.

 밤과 낮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 시간은 원천으로 회귀하는 시간이다. 얽혀 있던 마음의 매듭들이 부드러운 노을빛에 녹아 느슨해진다. 치열하고 고단했던 일상들이 어스름한 해거름 속으로 물러난다. 하늘 한가운데서부터 청색 비단 같은 얇은 어둠이 드리워지자, 사위어가는 노을빛이 마지막 힘을 모아 몰운대를 밝힌다. 마치 태고의 사원에 횃불이라도 켠 듯하다. 절로 마음이 가라앉는다.

 기우는 빛을 등 뒤로 받자 산의 능선이 더욱 뚜렷해진다. 홀로 돌아가야 하는 태양의 고독을 이해라도 하는지 산들이 묵직한 그림자를 안고 침묵에 든다. 나도 조용히 잔광에 잠겨본다.

 눈을 감으니 양수 같은 노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따뜻한 기운이 차오른다. 이 휴지의 시간이야말로 축복의 시간이다. 뭇 생명들을 위하여 자연이 준비한 정화의 시간이다. 깊은 숨을 쉬며 차분히 기다린다. 문득 먼 여행에서 돌아와 집 안에 들어선 기분이다. 신발도 양말도 다 벗은 것처럼 심신이 편안해진다.

 태양은 이제 바랑을 지고 고개를 넘는 나그네처럼 산등성이를 넘는다. 반사되지 않고 나직이 깔리던 빛이 어둠으로 바뀌며 다대포에 내려앉는다. 물에 젖은 명주 같은 어둠이 산등성이에 찰싹 달라붙어 산의 굴곡을 더욱 뚜렷이 하더니, 기어코 먹물을 풀어 커다란 수묵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 다대포 해변에도 어둠이 스민다.

 회색으로 채색된 산기슭에 더 짙은 색의 길을 내며 철새들이 둥지로 돌아가고 있다. 갯벌을 따라 멀리 나갔던 사람들도 더욱 길어진 그림자를 달고 돌아오고 있다.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는 집으로 돌아온 이들이 켠 전등 불빛이 하나둘 창문을 비춘다.

 해질녘의 다대포는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돌아와야 하는 곳이다. 어디에서 떠났는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 얼마나 오랜 세월 삶의 뒤안길을 서성였는지도 묻지 않는다. 지나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은 이는 다대포로 오라. 노을을 보며 지나온 것들을 마음껏 그리워하면 이곳이 바로 그대가 떠나온 그곳이 된다. 따뜻한 그 빛에 흠뻑 젖어 그대가 떠났던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수평선의 경계가 거뭇해진다. 색과 형태가 사라진 풍경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다가온다. 모두들 방향을 바꿔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시간, 짙어진 어둠에 잠긴 바다와 갯벌을 가르며 마치 회귀선인 양 다대포의 해변이 하얗게 출렁인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떡시루에 김 오르듯 / 김은주  (0) 2019.06.28
일곱 살 여름 일기 / 박동조  (0) 2019.06.25
주황색에 대하여 / 정성화  (0) 2019.06.18
사진, 또 하나의 언어 / 김근혜  (0) 2019.05.21
어머니와 귤 / 이어령  (0) 2019.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