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주황색에 대하여 / 정성화

희라킴 2019. 6. 18. 17:52



주황색에 대하여 


                                                                                                                                 정성화



작년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김밥을 말 때 수시로 속 재료 한두 가지를 빠뜨린다. 그 중 당근 채를 빠뜨렸을 때가 가장 당황스럽다. 김밥이 밋밋하면서 맛이 없어 보인다. 이게 주황색의 위력일까.

 육십 년대에 처음 나온 플라스틱 제품은 대부분 주황색이었다. 수돗가에 놓인 큰 물통에는 늘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가 둥둥 떠다녔다. 우리 집 강아지는 마당가에 둘둘 말아놓은 고무호스가 신기했던지 그걸 갉아대며 놀았다. 무료한 나는 툇마루에 앉아 바가지가 바람에 일렁이는 걸 바라보곤 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주황색은 사람을 나른하고 지루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기억 속에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주황색은 '삼양라면' 봉지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 심부름으로 우리 밭에서 기른 고구마 한 자루를 들고 선생님 댁에 간 적이 있다. 바로 돌아오려는데 인정 많은 사모님이 저녁을 먹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날 난생 처음으로 '라면'이라는 걸 먹었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이 떠있는 국물 속에 꼬불꼬불한 면이 들어있던 그것은 '천상의 음식' 같았다. 한 단에 삼십 원이라고 했다. 국수 두 다발을 사서 우리 여덟 식구의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액수였다. 라면은 혀에 남는 맛이 아니라 머리에 남는 맛이었다. 가게에 들를 때면 라면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고 그 주황색 봉지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주황색에는 가슴 아린 기억도 있다. 대학시절 내내 밤에는 중·고등학생들에게 과외를 하러 다녔다. 행여 과외 일자리가 끊어질까봐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하루 저녁에 두 군데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늘 배가 고팠다. 그때 거리에서 간간히 포장마차를 만났는데, 포장마차의 천막은 죄다 주황색이었다. 천막 틈새로 새어나온 김이 밤하늘에 하얗게 풀어지는 걸 보면서 걸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천막에 비추어졌고 경쾌한 웃음소리와 도란도란 나누는 말소리도 들렸다. 밝은 곳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불빛을 머금은 주황색은 정말 아늑해 보였다.

주황색은 통통 튀는 색이다. 환한 곳에서 보는 주황색 건물들은 놀러나갈 준비를 마치고 잔뜩 신이 나 있는 듯 보인다. 주황색에다 형광 안료를 더한 것들은 '내가 제일 잘 나가~' 라며 흥얼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남의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나에게는 주황색 옷이나 가방, 신발이 거의 없다. 남편이 어느 해 내 생일 선물로 사준 주황색 플랫슈즈도 몇 번 신지 않았다. 남편과 외출할 때 억지로 신은 게 다다.

 사람마다 그 사람만의 분위기가 말과 행동이 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를 어떤 색과 연관시켜보곤 한다. 절대 속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무채색, 궂은일을 도맡아하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은 베이지색,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은 짙은 보라색,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명랑한 사람은 주황색과 줄잇기를 한다. 나는 이 중에서 무채색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색상과 채도는 없고 명도의 차이만 있는 색이다. 나의 지난날이 그랬다. 조금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맑았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무채색이던 나의 마음이 달라지고 있다. 내가 '미세스 주황'이라고 별명 붙인 그녀 때문이다. 그녀는 늘 웃는다. 연한 배처럼 사근사근하고 친절하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한다. 흥이 많고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와 같이 있으면 나도 마음이 약간 들뜨면서 행동이 커진다. 나의 마음에도 조금씩 주황색이 입혀진다.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즐겁게 사는 사람, 그리고 삶의 멋을 아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에게는 내가 먼저 다가간다. 그들은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애쓴다. 다른 이의 삶과 비교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유머감각도 풍부하다. 말하자면 '밝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나도 그렇게 나이를 먹고 싶다. 너무 뜨거운 사람은 부담스럽고, 너무 무기력하거나 냉소적인 사람은 불편하다. 그런 면에서 가장 적절한 삶의 채도는 '주황색'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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