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
조현미
두 눈 가득 촛불이 일렁인다. 건드리면 눈물이 노드리듯 쏟아질 것 같다. 어찌나 절실한지 막 육신의 허물을 벗은 혼조차 돌아올 것만 같다.
그 개의 이름은 똘이라 했다. 폐지를 줍는 모자와 오래된 한옥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노모가 돌아가신 뒤 둘의 유대는 더욱 긴밀해졌을 터, 어느 날 그 집에 불이 났다. 화마가 누옥을 집어삼켰고 아들은 구급차에 실려 갔다. 형체조차 없는 집에 똘이만 남았다.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만 감지했을 뿐, 본능처럼 주인을 기다렸다. 타다 만 서까래가 그 집의 유골 같아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이웃들이 더러 수북이 인정을 담아 주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밥보다 절실한 그 무엇이 푸르러 깊은 눈에 그렁그렁했다.
똘이의 눈빛이 오래전 지상을 떠난 한 영혼을 초혼했다.
볕이 꼼지락거리는 유년의 봄, 십여 년째 한식구로 살아온 충직한 개 덕구가 죽었다. 덕구의 부재가 너무 휑한 엄마가 강아지 한 마릴 먹여야겠다고 버릇처럼 되뇌었다. 마침 고등학교에 다니던 큰오빠가 친구네 개가 새끼를 낳았다고 말했다. 엄마는 시세에 걸맞은 돈을 오빠에게 건넸고 며칠 후 우리 집에 식구가 늘었다.
뜻밖에도 오빠가 데려온 강아지는 두 마리였다. 털빛이 보리 이삭같이 누런 녀석이 오라비였고 군데군데 얼룩무늬를 입은 아인 동생이라 했다. 신이 난 우린 당장 이름부터 지었다. 오라비는 메리, 누이는 바둑이.
동기간임에도 둘의 외모와 성격은 천양지차였다. 바둑이는 식탐이 많아 뱃구레가 땅에 질질 끌릴 지경인데 메리는 발바리에 약골이었다. 명색이 오라비임에도 늘 밥그릇 싸움에서 바둑이에게 밀리곤 했다. 눈치 빠른 엄마는 둘의 상태를 단박 꿰뚫었다. 오빠는 강아지 값으로 받은 돈을 일찌감치 닦아 쓰곤 무녀리 두 마리를 얻어온 거였다.
메리는 걸핏하면 아궁이를 파고들었다. 영악한 바둑이가 볕이 자옥한 장독대나 뜰팡을 제 자리로 점찍어 둔 탓이었다. 게다 입도 짧았고, 묽은 변엔 뭔가 수상쩍은 것들이 꼬물거렸다. 옆구리가 생선가시처럼 앙상했다.
어느 날, 장에 갔던 엄마가 약을 지어왔다. 메리 몫의 죽을 쑨 뒤 곱게 빻은 멸치와 알약을 섞었다. 바둑이가 호시탐탐 밥그릇을 넘볼 때마다 부지깽이를 들어 둘을 격리시켰다.
엄마의 애틋한 정성이 메리에게도 가 닿은 것일까. 시르죽은 눈에 샛별이 뜨더니 처진 꼬리에도 물이 올랐다. 콧잔등이 잘 닦은 단추 같았다. 중병아리에게도 등을 쪼이기 일쑤더니 송곳니를 드러내며 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이듬해, 설을 앞둔 장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바둑이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 뜨뜻한 데서 낮잠을 자거나 마실을 간 거려니 했다. 엄마의 시장바구니를 보고 나서야 상황을 짐작했다. 바둑인 젖을 뗀 지 채 한 돌도 안 되어 주인집 조상을 위한 제물이 되어 떠나야 했다. 빈 밥그릇에 뜬 개밥바라기가 바둑이의 초롱초롱한 눈매 같아 자꾸만 눈이 젖었다.
한솥밥을 먹는 날이 늘면서 메리는 늠름한 청년으로 자랐다. 녀석은 늘 엄마와 함께했다. 별이 꾸벅꾸벅 조는 새벽, 논물을 보러 가는 엄마와 그림자마냥 동행했다. 달빛이 홑이불처럼 널린 가을밤, 깨를 터는 엄마 옆을 지키는 것도 메리뿐이었다.
메리와 함께 맞는 세 번째의 가을은 여느 해보다 일렀다. 나락이 고개를 수굿하는가 싶더니 잦은 비바람에 몸살을 앓았다. 고추도, 콩팥도, 깨도 덜 여물었다. 돈으로 살 만한 것들은 이미 장에 내간 지 오래였다.
어느 날, 엄마가 갈무리해 둔 씨감자를 꺼냈다. 뜨물에 치렁치렁한 미역을 잘라 감자를 숭덩숭덩 썰어 끓인 국은 제법 구뜰했다. 눌은밥과 구정물 찌끼에 이골이 난 메리의 눈이 순간 반짝했다. 큼지막한 감자조각만 골라 메리의 밥그릇에 던져 주었다. 엄마가 손사래를 쳤다. 말만 못할 뿐,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각은 매한가지라고 누누이 말씀하시던 당신이었다. 그날 아침, 엄마 얼굴엔 오래 해를 감춘 하늘처럼 먹구름이 자욱했다.
울안에 들어서자마자 메리를 불렀다. 부르기 무섭게 꼬리에 바람이 일던 녀석이 그날따라 늑장이었다. 엄마를 따라 밭에 나갔으려니 했는데…. 마루 밑, 엄마의 고무신이 있던 자리에 메리의 목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날은 추석을 목전에 둔 오일장날이었다.
퍼렇게 마음을 벼렸으나…, 마른 깻단 같은 엄마를 보는 순간 입이 얼었다.
여동생이 수돗물처럼 풍경을 쏟아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메리는 오랜만의 나들이에 여동생만큼 달떴다. 모녀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오리를 걸어 읍내 장터로 향했다. 가축 전에 다다라서야 뭔가 불안한 듯 눈빛이 여울처럼 흔들렸다. 이윽고 흥정을 마친 개장수가 메리를 트럭에 올렸다. 앙탈을 부리는 여느 개와는 달리 메리는 순순히 차에 올랐다. 발바리인 녀석은 뭇 개에 비해 턱없이 작았다. 두려움과 원망이 이글거리는 눈동자 틈, 메리의 담담한 눈빛에 엄마는 가슴이 미어졌다. 차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메리는 엄마 쪽으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엄마는 일부러 메리의 목줄을 풀어준 거였다. 훠이훠이 제 살 길 찾아 가라고 엉덩이를 밀었으나, 졸랑졸랑 뒤를 따르던 못난 녀석이었다. 메리의 나이 채 네 살도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그날, 엄마는 물 한 모금조차 안 드셨고 이후 우리 집은 더 이상 개를 키우지 않았다.
모니터에 뜬 똘이의 눈빛이 자력처럼 나를 흡인했다. 삼십여 년 전, 그날의 풍경이 두 눈 속에 고스란했다. 너무 깊은 슬픔은 눈물이 되지 못한다고 하던가. 메리도, 엄마도 어쩌면 똘이처럼 눈빛으로, 온몸으로 울었을 것이다.
말레이 반도의 열대우림에 사는 취옹족은 인간과 동물, 식물에 고루 ‘루와이’라는 인격성을 부여한다. 한갓 달팽이든 나무든 꽃이든 의식이 있는 존재들은 인간과 동류라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과 가장 깊이 교감한다는 개야 말해 무엇하랴마는. 너무도 많은 개가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을 등졌고, 등지고 있다.
그해 추석, 엄마는 주인 여읜 밥그릇에 수북이 쌀밥을 담아 주었다. 엄마는 메리의 ‘루와이’를 최초로 인정해 준 단 한 사람이었다.
똘이의 ‘루와이’가 많은 이들과 교감한 덕분일까. 방송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녀석은 주인에게 돌아갔다. 그 어떤 사탕발림에도 곁을 주지 않던 녀석의 눈빛이 주인의 한 마디에 파랗게 살아났다.
둘의 재회를 지켜보는 눈이 촉촉해졌다. 채 눈물이 되지 못한 슬픔이 그제야 가락으로 화해 비처럼 쏟아졌다.
똘이와 주인이 한 덩이가 되어 집으로 향한다. 둘의 실루엣 위로 메리와 엄마가 얼비친다. 메리를 혼자 보낸 게 못내 겨웠던 걸까. 녀석이 떠난 지 오래지 않아 엄마는 메리의 뒤를 따르셨다.
서녘, 파래처럼 젖은 하늘에 개밥바라기가 뜬다. 손 내밀면 곧 달려와 안길 것만 같은, 별의 눈자위가 흠씬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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